「십일조와 헌금에 대하여」
여러 교회가 십일조와 헌금을 율법적으로 강조하여
성경의 일부만을 인용하여 가르치는 경우가 허다하여
주님이 원하시는 정직한 가르침이 필요합니다.
성도들로부터 더 많은 헌금을 유도하기 위해,
성경의 일부만을 떼어서 가르치는 것은 조작행위(manipulation)입니다.
심지어 헌금을 많이 할수록 더 부자가 될 것이라고 가르치는
사이비 가르침도 횡행하고 있는 것이 슬픈 현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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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도가 십일조의 예에 따라 자원해서 소득의 십분의 일로
물질의 헌신을 한다면 얼마든지 가능합니다만
그것이 ' 하나님의 명령이다, 성도의 의무이다.
하나님의 것을 도둑질하는 것이다 ' 라고 강요한다면 커다란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헌금은 얼마를 해야 하는가는
구약의 십일조에 준하여 드리는 것을 참고 할 수 있으며
자유함과 자원함의 원리에 따라
즉 형편에 따라 많이 할 수도 있고 적게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김윤희 교수 구약학 = 김준곤 목사 딸)
https://www.youtube.com/watch?v=FfdvTLoemkk
은혜스러운 말씀을 듣고 감격하면
십일조나 헌금을 강요하지 않아도 스스로 자원하여 주님께 바칠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그것을 원하실 것입니다.
그리고
미국에 있는 유대의 랍비에게 십일조를 받느냐는 물음에 대한 그들의 대답은
' 내가 있는 회당(synagogue)에서는 어느 누구도 십일조를 하는 사람이 없으며
만약 십일조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하나님의 법을 어기는 것이며
하나님께 범죄하는 것이다 '라고 대답을 했다고 합니다.
그의 설명에 의하면 '십일조는 레위인들만 받게 되어 있으므로
레위인 아닌 사람에게 주는 것은 잘못된 것이며
또한 오늘날 더 이상 레위인들에 의한 제사장 제도는 존재하지 않으므로
십일조는 잘못된 것이라'고 했다고 합니다.
그는 이렇게 부연설명을 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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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율법을 지켜야 한다면
십일조는 당연히 하나님께서 허락한 자에게 주어야 하며
그렇지 않으면 주는 자나 받는 자 모두 말씀을 어기는 죄를 짓는 것이라 했고,
그 랍비는 자신이 수석랍비 (chief rabbi of his synagogue)이기는 하지만
레위파가 아닌 유다지파이므로 십일조를 받을 수가 없으며
이것은 예수님(유다지파)도 마찬가지 이었고
베드로(유다지파)도 사도 바울(벤자민지파)을 포함한 어느 제자도
십일조를 받지 않았다 '고 합니다.
유럽이나 미주의 대부분의 교회당에서는 십일조를 하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그들을 정죄하거나 비성경적이라 여겨 구원이 없다고 해서는 안 됩니다.
이런 왜곡된 가르침 속에서,
지금도 어떤 사람들은 더 부자가 되기 위하여,
교회에 맹목적으로 헌금을 하고 있습니다.
이런 맹목적 헌금태도가 교회의 타락을 부추기게 합니다.
십일조와 헌금에 관한 정직한 성경의 가르침을 살펴보아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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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예수님의 가르침
마태 23:23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를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 바 의(justice) 와 인(mercy)과 신(faith)은 버렸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
예수님은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십일조 헌납 그 자체만은 좋게 여기셨습니다.
그가 이 말씀을 하신 때는 아직 그의 구속사업이 완성되지 않은 것인 만큼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시기 전이므로)
구약적인 제도가 그대로 적용되던 때였습니다.
십일조를 정확히 바친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에게 예수님은 화를 선포하셨습니다 !
아니 십일조를 정확히 드리고도 화를 얻게 된다는 말입니까?
그것도 예수님으로부터 !
그렇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십일조와 헌금을 많이 한다고 하더라도
올바르지 않으면. 예수님은 우리를 책망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십일조보다 훨씬 더 중요한 것이,
의와 인과 신을 강하게 선포하셨습니다.
정의와 긍휼과 믿음이 빠진, 형식상의 십일조 헌금은 의미가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교회에 십일조를 하고,
그 십일조에 대해 목사님이 아무리 경건한 듯한 태도와 말로 축복을 해도
예수님은 그 기도에 제한 받지 않으실 것입니다.
십일조 이전에, 우리의 의(justice)와 인(mercy)과 신(faith)을 보시는 것입니다.
거짓 선지자와 같은 목사들이 헌금을 많이 하면 할수록
더 부자가 될 것이라는 말에 속아서,
더욱 부자가 되기 위하여 우리가 십일조와 헌금을 한다면,
과연 예수님은 우리를 칭찬하시겠습니까?
의와 인과 신이 없는 헌금과 십일조를 한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을 저주하심으로써,
예수님은 분명한 메시지를 전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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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서도 모세율법의 십일조를 행하라고 하셨으므로
우리도 그 십일조를 해야 한다면
예수님께서도 하신 할례도 해야하고,
성전의 제물과 예물도 있어야 하고,
제사드리는 제사장도 있어야 하고,
성전도 있어야 할 것이며,
예수님처럼 성전세도 내야할 것이고,
최후의 만찬으로 알려진 유월절도 지켜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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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의와 인과 신이 있으면 헌금과 십일조를 하지 않아도 되는가?
이것은 우문에 불과합니다.
정의와 자비와(mercy, 긍휼히 여기는 마음), 믿음(faith)이 있는 사람은
당연히 십일조와 헌금을 하게 됩니다.
예수님도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즉 십일조와 헌금은 의와 인과 신에서 자연스럽게 나온 결과물인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십일조가
세금 전 십일조인가 세금 후 십일조인가를 놓고 많이 고민합니다.
이 사람에게는 의와 신과 인이 약하다는 증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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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사도 베드로의 가르침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자신의 전 재산의 반을 바쳤음에도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습니다.
전 재산의 반을 바친 아나니아와 삽비라에게
사도 베드로는 결코 굽신거리거나 칭찬하지 않았습니다.
전 재산의 반은 십일조의 다섯 배입니다. 아니 다섯 배 이상일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들의 잘못된 태도로 인해 비참한 최후를 맞았습니다.
십일조와 헌금은 드리는 태도가 더 중요한 것이라는 것을 명심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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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사도 바울의 가르침
고후 8장과 9장에서 아주 자세한 가르침이 제시되어 있습니다.
1) 십일조 헌금의 본질
십일조 헌금의 본질은 성도를 섬기는 일입니다.
즉 교회 안에 가난한 성도와 복음전파자들에게 물질을 공급하는 것입니다.
결코 화려한 교회당 건물을 짓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또한 교회안의 성도가 아닌 사회 자선사업을 하기 위한 것도 아닙니다.
그리고 십일조와 헌금은 단순히 자신들의 개교회 만을 위한 것이 아니고,
어려움에 처한 다른 교회들에게 도움을 주기 위한 것이기도 합니다.
예루살렘교회의 어려운 성도들을 위해,
고린도교회와 마게도니아교회가 도운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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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십일조 헌금의 태도
십일조 헌금은 결코 강제 명령이 아닙니다.
그러나 반드시 사랑의 마음에서 출발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사랑으로 즐겨내는 자를 사랑하십니다.
억지로나 인색함으로 하는 것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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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얼마를 내야 하는가?
현재 가지고 있는 범위 내에서 해야 합니다.
결코 빚을 지면서 하는 것은 성경적이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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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누가 헌금을 많이 하는 것인가? (누가복음 21:1-4)
결코 절대적인 금액이 많다고 해서 많이 한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칭찬한 과부를 상기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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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십일조 헌금한 자들의 결과는?
고후9:8
“하나님이 능히 모든 은혜를 너희에게 넘치게 하시나니
이는 너희로 모든 일에 항상 모든 것이 넉넉하여
모든 착한 일을 넘치게 하려 하심이라”
올바른 태도로, 사랑의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십일조와 헌금을 한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은혜가 있어, 결코 굶주리거나 하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필요를 채우실 것입니다.
또한 모든 것에 넉넉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나 자신의 유익을 위한 것이 아니라,
모든 착한 일을 넘치게 하려 하심이 목적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나 십일조와 헌금을 했다고 해서,
그 몇 만 배, 몇 십만 배를 되돌려 받아 더 부자가 될 것이라는 헛된 믿음,
미신적 믿음에서 탈피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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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십일조와 헌금의 사용
십일조와 헌금은 성도를 섬기기 위한 것입니다.
가난한 성도들을 돕고, 고아와 과부를 돕고, 사역자들을 후원하는 것입니다.
불필요한 행사비용으로 지출하거나,
과도한 건물에 투자하는 것은 결코 잘못된 것입니다.
또한 과시하기 위한 사회 자선사업에 사용되는 것도 옳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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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십일조 헌금의 영적 의미
십일조와 헌금은, 그것이 만일 복음 전파에 사용된다면,
복음전파에 동참하는 것이고, 복음을 직접 전파하는 사람의 동역자가 되는 것입니다.
또한 그것이 가난한 성도들을 돕는데 사용된다면
십일조와 헌금을 한 사람은 가난한 성도들을 도운 것이고
이는 하늘에 보물을 쌓은 것입니다.
그러나 십일조와 헌금이, 필요 이상의 교회당 건축에 사용된다면,
그는 교회당 건물의 건축에 동참한 것입니다.
만일 타락한 목사에게 헌금하여 그가 횡령하거나 악한 목적에 사용된다면,
헌금한 사람도 그 타락한 목사의 행동에 자신도 모르게 동참하게 된 것과 같습니다.
비록 선의로 헌금했을지라도,
그의 헌금은 전혀 유용하게 사용되지 않게 된 것입니다.
십일조와 헌금은 단지 교회에 드리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그것이 어떻게 사용되는 지가 중요합니다.
십일조와 헌금은 받는 사람의 사역에 적극 동참한다는 뜻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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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헌금을 반드시 자신이 속한 지역교회에 해야 하는가?
성경 어디에도 헌금을 반드시 자신이 속한 교회에만 해야 한다고
되어 있는 구절이 없습니다.
십일조와 헌금은, 그곳이 자신이 속한 교회이건, 아니면 다른 선교 단체이건,
다른 지역의 교회이건 간에.
자신이 판단해서 가장 유용하게 사용될 수 있는 곳에 드려지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백부장 고넬료가 교회를 통하지 않고,
직접 가난한 자들을 구제한 것도 하나님께서 기쁘게 받으셨습니다. (행 10:1~4)
그런데 만일 자신이 속한 교회의 어려움에 처한 형제를 보고도 도와 줄 마음이 없다면,
그는 자신을 다시 점검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더구나 자신의 가족이나 부모 등을 돌보지 않고,
더 부자가 되기 위해 교회에만 헌금하는 것은, 탐욕의 표현일 뿐입니다.
가장 현실적인 문제는, 자신이 속한 교회에 헌금을 함에 있어서
헌금이 성경적으로 가난한 자와, 사역자를 위해 사용되지 않고
엉뚱하게 사용되는 경우입니다.
이 경우는, 자신이 직접 다른 가난한 성도를 돕는다거나
참다운 사역자에게 직접 헌금해도 좋을 것입니다.
이것이 하늘에 보화를 쌓는 것입니다.
한국 교회에 이단세력과 타락한 목사들이 발호하기 쉬운 원인 중에 하나가
바로 성도들의 무분별한 헌금입니다.
좀 더 부자가 되겠다는 욕심으로 무분별하게 헌금을 하는 행태가 만연되어 있기에,
이단들이 이점을 이용해서 세력을 키울 수 있고,
타락한 목회자가 발호할 수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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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고후9장 6절의 해석
“이것이 곧 적게 심는 자는 적게 거두고
많이 심는 자는 많이 거둔다 하는 말이로다”
이 구절은, 헌금을 많이 내도록 유도하기 위해서 이용하기 가장 쉬운 성경구절입니다.
이 구절의 진정한 의미를 모르고,
단지 헌금을 많이 하면 더 부자가 될 것이라는 착각을 갖도록 가르치는 데 문제가 있습니다.
이 구절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다음 절을 살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각각 그 마음에 정한 대로 할 것이요
인색함으로나 억지로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즐겨 내는 자를 사랑하느니라.”
(고후9:7)
고후6:7절의 한글 성경에는 없지만,
KJV 에는 “그러므로 (so),“라는 단어가 있습니다.
즉 6절을 단순히 해석하지 말고, 7절이 더 중요한 내용이라는 뜻입니다.
7절의 중점은 “즐겨내는 것”입니다.
헌금을 즐거운 마음으로 내라는 뜻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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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즐거운 마음으로 내는가?
헌금을 하여 그 헌금으로 가난한 자들이 어려움에서 벗어나며,
사역자들이 복음을 전파하여 하나님의 복음이 널리 전파되는 것을 생각하고,
이러한 사역에 자신이 동참자가 된다고 생각하면 즐겁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6절에 “거둔다”는 단어를 단지 이 땅에서 나에게 더 많은 물질이
안겨질 것이라고 해석한다면 너무나 허무한 해석입니다.
이 땅에서 나에게 더 많은 물질을 갖고 살아가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여기서 ‘거둔다’는 의미는 장래 하늘에서의 보상을 의미하는 것이
더 크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좀 더 부자가 되기 위한 욕심으로 맹목적으로 헌금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사랑과 긍휼과 헌신의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분별있는 헌금을 해야 할 것입니다.
※
그리고
목사님들이 십일조나 헌금을 강요하게 되면
성도들의 자발성을 훼손시켜 마지못해 드리는 결과를 초래하는 것이 되고 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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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율법이전의 십일조
율법이전, 즉 아브라함으로부터 모세의 율법 전까지, 십일조가 있었습니다.
이 십일조는 하나님이 명령하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즉 자발적인 감사와, 권위에 대한 순종의 의미였습니다.
아브라함이 멜기세덱에게 자발적으로 가장 좋은 것의 십일조를 드린 것이지
멜기세덱(창15:18-20)이 십일조를 강요하거나 명령한 것이 아닙니다.
십일조를 멜기세덱에게 드린다는 의미는 무엇일까요?
왜 아브라함은 십분의 일을 드렸을까요?
물질의 주권자가 내가 아니고, 하나님이라는 선포 입니다.
또한 하나님의 제사장에 대한 예우로서,
멜기세덱이 하나님의 제사장이라는 선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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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율법시대의 십일조
율법시대에는 십일조는 법이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것을 좋든 싫든 드려야 했습니다.
마치 국가에 세금을 바치는 것과 같았습니다.
첫째, 땅을 유업으로 받지 못한 레위 시람들을 위해 바치는 십일조가 있었고,
(레27:30-33, 민18:21-31)
둘째, 예루살렘에서 열리는 절기 행사를 위해 땅의 소산 중에서 바치는 십일조가 있었고
(신14:22-27)
셋째, 과부, 고아, 나그네를 위해 3년마다 바치는 십일조가 있었습니다.
(신14:28, 29:12-13)
이스라엘 백성은
모두 소득의 23.3%를 십일조로 바쳤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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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신약시대의 십일조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셔서 승천하신 후에는
성전과 제사장의 규례들이 신약계시로 말미암아 폐지되었습니다.
(히브리서 9:10)
십일조도 마찬가지로 구약적 제도로서의 헌납은 신약교회에서 시행되지 않아야 합니다.
교회의 지도자들이
신자들에게 십일조 헌금(십일조는 최소한도의 헌금임)을 장려하면서,
그것을 신약시대 성도의 헌금의 표준인 듯이 가르치는 일이 있다면, 시정되어야 합니다.
(박윤선 목사-대한예수교장로회 헌법주석 107-110p 십일조 헌금 문제 )
※
특히
교회 직분자 선출에 있어 십일조나 감사헌금을 결부시켜 따지는 것은
성경적이 아닙니다.
율법은 폐하여 졌으나, 성령의 법이 지배하는 시대이므로
우리는 성령의 법에 따라야 할 것입니다.
비록 십일조의 율법적 의무는 없어졌지만,
내주하시는 성령의 음성에 따라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헌금은 어느 정도로 해야 할것인가는
십일조의 범위를 참고하여 하면 될 것입니다.
외식적으로 의무적으로 행하는 십일조가 아니고,
즐겁고 기쁜 마음으로 분별있게 헌금생활을 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십일조와 헌금을 했다고 해서
나의 할 일을 다 했다는 환상에서 벗어나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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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말라기 3장 8절-9절의 해석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의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
나의 집에 양식이 있게 하고 그것으로 나를 시험하여 …”
많은 사람들이 이 구절을 오해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이 구절을 십일조를 교회당에 해야 한다는 것으로 오해합니다.
그러나 말라기에서 분명히 말한 것은
온전한 십일조를 나의 집 즉 여호와의 집에 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호와의 집이 어디입니까? 교회당입니까?
교회당 즉 교회 건물은 결코 여호와의 집이 아닙니다.
교회의 예금 구좌일까요?
이것도 여호와의 집이 아닙니다.
여호와의 집은 바로 성도입니다.
가난한 성도와 참된 사역자를 말합니다.
온전한 십일조는 성도들과 참된 사역자에게 드려져야 합니다.
여호와의 집은 교회당 건물을 필요이상으로 화려하게 장식하거나,
최신의 음악 악기를 구입하거나 하는 것을 말하지 않습니다.
이웃의 불쌍한 영혼을 버려둔 채
필요 이상의 화려한 교회당을 짓는 일에 몰두하는 것은 비성경적입니다.
가토릭이 중세 바디칸의 성당을 짓기 위해 면죄부를 파는 것과
크게 다른 점이 무엇인가 묻고 싶습니다.
그 방법이 다르기는 하지만
둘 다 목적하는 바가 크고 화려한 성당이나 교회당을 짓는 것입니다.
만약 주님이라면,
의식주의 해결이 어려운 농어촌 교회의 교역자나,
먼 이국 땅에서 어렵게 선교를 하는 선교사나,
우리 사회에 추워 떨고 있는 노숙인이나,
못 먹어 죽어 가는 아프리카의 아이들을 살릴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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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기도, 수요예배, 금요철야 예배 등은
유럽이나 미주 등의 교회에는 없는
신앙심 깊은 한국 교회에만 있는 한국 특유의 예배의 형식입니다.
그렇다고 이들 예배가 없는 교회당을 비성경적이고
구원받지 못할 교회라고 단정해서는 안 됩니다.
십일조나 헌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님께서는 21세기를 살아가는 저희들에게 말할지 모릅니다.
“화 있도다, 부자되기를 원하는 자들이여 !
너희가 십일조와 헌금을 드리고는 있으나
그것보다 더 중요한 의(justice)와 인(mercy)과 신(faith)은 왜 버리는가?
물질을 바치는 것도 중요하지만,
정의(justice)와 긍휼(mercy)과 믿음(faith)도 함께 행해야 한다.”
- 아멘 -
2020.12.7(월)정오
이우길 집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