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신경, 십일조, 유아세례
요즘 『사도신경』을 하지 않는 교회가 많아 졌다.
나와 다르다고 이단 시 하지 말고,
그 이유를 알아보고 시정할 것은 시정하고, 하나님 기뻐하시는 일을 해야 할 것입니다.
사도신경은 사도들이 만든 것이 아니고 로마캐토릭의 신조입니다.
『동정녀 마리아에서 나시고』
예수님께서는 a virgin 에게서 태어나셨습니다.
천주교에서는 The Virgin 이라 하여 마리아를 신격화하고 예수보다 상위에 둡니다.
예수는 남동생이 4명이고 여동생도 2명 이상 있었습니다.
『거룩한 공회와』
holy Catholic Church(로마 캐토릭 교회)를 가리킵니다.
로마캐토릭 교회가 어떻게 거룩합니까?
개신교에서는 억지로 holy catholic church 로 바꾸어
'보편적인, 일반적인 교회'로 바꾸어 말하고 있습니다.
『성도가 서로 교통하는 것과』
여기서 성도는 살아있는 동안 선행이 많은 聖人(Saint)를 가리키고
그들의 공덕을 나눠주기를 바라는「통공교리」고백입니다.
『죄를 사하여 주시는 것과』
캐토릭에서는 사제에게 '고해성사'함으로 죄 사함을 받고...
어떻게 사제가 죄 사함을 할 수 있습니까?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부활 후에 지하세계로 내려가셔서
구약시대에 죽은 혼을 데리고 3층천으로 올라가셨습니다.
천주교에서는 빼버렸습니다.
신앙의 고백이 되기 위해서는 예수를 통한 구원이 언급되어야 하는데 없습니다.
빌라도에게 고난을 당하셨다고 남에게 미루지 말고
모든 사람이 죄인이고 내 죄 때문에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셔서
나를 구원하셨다는 핵심이 있어야 하는데 핵심이 빠진 고백입니다.
중세 캐토릭은 개신교회 기독교인들을 개종하지 않는다고
6000만명 이상을 잔인하게 죽였습니다.
그 외에도 제사 허용, 마리아 상에 절하기, 신부들께 죄용서 권한 부여, 연옥설,
세계 종교의 통합 등 로마 캐토릭이 구원이 있습니까?
구원없는 그들의 신조를, 핵심이 없는 그들의 신조를
오랫동안 해왔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우리가 거룩한 예배시간에 외울 필요가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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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십일조』을 하지 않는 교회가 많아졌고,
『십일조』는 예수께서 피로 사신 그리스도인의 자유를
함부로 제한하는 것입니다.
왜 아브라함은 멜기세덱에게 전리품의 십분의 일을 드렸을까요?
물질의 주권자가 내가 아니고, 하나님이라는 선포입니다.
또한 하나님의 제사장에 대한 예우로서, 멜기세덱이 하나님의 제사장이라는 선포입니다.
율법시대에는 십일조는 법이었습니다.
이것은 좋든 싫든 드려야 했습니다. 마치 국가에 세금을 바치는 것과 같습니다.
이 십일조는 제사장들에게 드려졌고, 제사장들은 생업에 종사하지 않고,
십일조에 의해 살며 제자장의 업무를 수행할 수 있었습니다.
십일조의 구약적 제도로서의 헌납은 신약교회에서 시행되지 않아야 합니다.
교회의 지도자들이 신자들에게 십일조 헌금(십일조는 최소한도의 헌금임)을 장려하면서,
그것을 신약시대 성도의 헌금의 표준인 듯이 가르치는 일이 있다면, 시정되어야 합니다.
(박윤선 목사-대한예수교장로회 헌법주석 107-110p 십일조 헌금 문제 )
모세율법은 이스라엘에 주어진 옛 언약의 내용이지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확증된 새 언약 위에 세워진 교회에 주어진 법이 아닙니다.
이스라엘은 옛 언약에 실패했고 옛 언약의 경고대로 비참한 심판을 받았습니다.
이미 완성되고 폐하여진 모세율법은 이스라엘 족속도 제대로 메지 못하던 멍에인데 (행15장)
새 언약의 백성들인 교회가 지켜야 할 의무나 도리는 더더욱 아닙니다.
이미 시효가 지난 십일조 운운하며 모든 소득의 십분의 일로 못 박는 것은
예수께서 피로 사신 그리스도인의 자유를 함부로 제한하는 것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한국교회들이 주장하는 돈으로 내는
모든 소득의 십일조 의무는 성경적 근거나 설득력이 없습니다.
청교도주의에 영향을 받은 초기 한국선교사들이 교회 재정자립을 위해 도입한 십일조 제도는
어디까지나 사람의 전통이나 유전일 뿐입니다.
물론 성도가 십일조의 예에 따라
자원해서 소득의 십분의 일로 물질의 헌신을 한다면 얼마든지 가능합니다만
그것이 하나님의 명령이다, 성도의 의무라 주장한다면 커다란 문제가 있습니다.
그런데 헌금은 얼마를 해야 하는가는
구약의 십일조에 준하여 드리는 것을 참고 할 수 있으며
자유함과 자원함의 원리에 따라
즉 형편에 따라 많이 할 수도 있고 적게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김윤희 교수-김준곤 목사 차녀))
미국에 있는 유대의 랍비에게 십일조를 받느냐는 물음에 대한 그들의 대답은
내가 있는 회당(synagogue)에서는 어느 누구도 십일조를 하는 사람이 없으며
‘만약 십일조를 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하나님의 법을 어기는 것이며
하나님께 범죄하는 것이다’ 라고 대답을 했다고 합니다.
유럽이나 미주의 대부분의 교회당에서는 십일조를 하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그들을 정죄하거나 비성경적이라 여겨 구원이 없다고 해서는 안 됩니다.
성전과 제사가 버림을 당한 시기의 이스라엘에 경고한 선지자가 말라기 선지자였습니다.
이 말라기 말씀이 유명한 십일조 도적질이 나오는 말씀이지만 (말3:7-10)
이 말씀은 십일조를 빼돌려 성전과 제사를 황폐케한 제사장들에게 한 경고일 뿐만 아니라,
고대 이스라엘민족에게 주어진 모세율법에 따른 경고의 말씀이지
현대 교회에 그대로 적용되는 말씀은 아닙니다.
그리고
말라기의 이 구절은 십일조 내면 복 준다는 얘기가 아니고 신앙고백의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돈 내면 복준다는 말로 하나님을 폄하하는 말로 이해하면 안 됩니다.
돈 문제가 아니고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사랑이 절절히 녹아있는 신앙고백에 포커스를 맞춘 구절입니다.
tithe를 통해 예수 그리스도는 구별된, 거룩한 분이시며, 가장 중요한 것이며,
모든 것의 대표라는 신앙적 고백을 하라는 것입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rS4XRSO2W7g
모세언약, 모세율법은 이스라엘만 주어졌지 다른 민족에게 주어진 것이 아닙니다.
(출20:2, 출24:38, 시147:19-20, 롬3:1-2, 롬9:4 등)
마태 23:23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를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 바 의(justice) 와 인(mercy)과 신(faith)은 버렸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
예수님은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십일조 헌납 그 자체만은 좋게 여기셨습니다.
그가 이 말씀을 하신 때는 아직 그의 구속사업이 완성되지 않은 것인 만큼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시기 전이므로)
구약적인 제도가 그대로 적용되던 때였습니다.
그런데 만일 자신이 속한 교회의 어려움에 처한 형제를 보고도 도와 줄 마음이 없다면,
그는 자신을 다시 점검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더구나 자신의 가족이나 부모 등을 돌보지 않고,
더 부자가 되기 위해 교회에만 헌금하는 것은, 탐욕의 표현일 뿐입니다.
그리고
목사님들이 십일조나 헌금을 강요하게 되면
성도들의 자발성을 훼손시켜 마지못해 드리는 결과를 초래하는 것이 되고 맙니다.
그리고
새벽기도, 수요예배, 금요철야 예배 등은
유럽이나 미주 등의 교회에는 없는 신앙심 깊은 한국 교회에만 있는
한국 특유의 예배의 형식입니다.
그렇다고 이들 예배가 없는 교회당을 비성경적이고
구원받지 못할 교회라고 단정해서는 안 됩니다.
십일조나 헌금도 마찬가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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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아 세례는 필요한가?
일부 그리스도인들은 유아 세례가 필요하다고 말하고,
또 다른 사람들은 유아 세례가 무의미하다고 말합니다.
특히 침례교회의 경우 자기 의지로 신앙을 고백하고 세례를 받는 것만을 인정하고,
부모의 의지로 받는 유아 세례를 인정하지 않고 있습니다.
유아 세례의 필요성을 주장하는 사람은
대부분 그 근거를 하나님과의 언약과 할례에서 찾고 있습니다.
구약을 보면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선민의 표시로 남자 아이를 난 지 8일만에
할례를 행하라고 지시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이 예식을 행하지 않으면,
그가 선민 중에서 끊어질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이 경우 할례는 선민의 표시로 행해진 것입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할례 형식이 아니라,
아브라함이 하나님과의 명령에 순종했다는 점입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선민의 표시로 옷에 별 표시를 달라고 했다면
아브라함은 그렇게 했을 것입니다.
할례의 경우 난 지 8일 만에 행했기 때문에
이것은 아이의 의지와는 전혀 상관이 없었습니다.
이것은 전적으로 부모의 의지에 달려 있습니다.
그러므로 부모가 하나님의 언약을 믿고 순종했다면,
그 아이는 일단 언약의 백성이 되었습니다.
유아 세례의 필요성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신약의 유아 세례를 이러한 구약적 할례 예식과 동일 선상에서 보고 있습니다.
그들은 아브라함은 구약의 성도 뿐 아니라,
신약의 모든 성도들의 조상이 된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어린 아이는 스스로 예수를 믿을 수 없으며,
따라서 그가 자라서 스스로 그리스도를 영접하기 전까지는
부모가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신앙을 고백하는 일이 필요하다고 말합니다.
물론 그가 성장한 후에는 부모의 의지를 벗어나서
스스로 신앙을 고백하고 세례를 받아야만 합니다.
그러나 어린 아이 시절에는 아이들은 스스로 이러한 일을 할 수 없습니다.
세례는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믿고 구원받은 자들이
하나님과 교회 앞에서 자신이 그리스도인이 되었음을 공개적으로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성과 분별력을 가지고 자기 자신의 의지로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고 고백할 수 없는 어린아이에게
물을 뿌리는 유아세례는 아무런 의미가 없는 종교의식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어린아이에게 일방적으로 물을 뿌려주고,
유아세례를 주는 자들이 "이 아이가 하나님의 택함받은 자가 되었음을 선포합니다.
어릴 때부터 유아세례를 줘서 하나님의 것으로 인을 쳐 두어야 마귀가 손을 못 댄다.,
오늘 이 아이의 이름을 하늘나라 생명책에 기록하소서. 라고 하는 것은
모두 잘못된 교리에서 나온 것입니다.
성경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만이 세례를 받을 수 있다고 합니다(행8:37).
그러나 로마카톨릭에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자들에게도 세례를 주고,
로마카톨릭 교회가 그들의 구원을 보장해준다고 가르치기 위해
이 중요한 구절을 삭제해 버렸습니다.
개신교의 개역개정에도 덩달아 없앴습니다.
그래서 개역이나 개역개정에 37절이 없습니다.
사도행전 8장
36 그들(빌립과 내시)이 길을 가다가 물이 있는 곳에 이르니
내시가 말하였다. “보십시오, 여기에 물이 있습니다. 내가 세례를 받는 데에
무슨 거리낌이 되는 것이라도 있습니까?
37 (개역개정에 없어 흠정역 KJV에서 가져 온 것임) 빌립이 이르되,
만일 그대가 마음을 다 하여 믿으면 받을 수 있느니라.
내시가 응답하여 이르되,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내가 믿노라, 하니라.
38 빌립은 마차를 세우게 하고, 내시와 함께 물로 내려가서 그에게 세례를 주었다.
이스라엘의 사내아이가 할례를 받아서 하나님의 백성이 된 것처럼
"유아 세례를 받으면 하나님의 백성이 된다"고 주장하거나,
"유아 세례를 받으면 그 이름이 하늘나라 생명책에 기록된다"고 하는 주장은
모두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믿지 않아도
세례를 받으면 구원을 받는 것이다."라는 잘못된 교리에서 나온 것입니다.
이 세례를 통한 중생 교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라는
복음의 핵심 메시지를 정면으로 부인하는 가르침입니다.
교회는 교회이고 이스라엘은 이스라엘입니다.
둘은 서로 같지 않으며 서로를 대체할 수 없습니다.
할례는 하나님과 이스라엘 사이의 언약의 증표이고,
세례는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고 구원받은 자들이
공개적으로 자기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 동참하여
그리스도의 몸이 되었음을 고백하는 의식입니다.
그러므로 할례는 할례고 세례는 세례입니다.
둘은 서로 다른 것이며 서로 아무런 관련이 없습니다.
유아세례의 성경적 근거를 구약시대의 할례에서 찾으려고 하는
어리석은 자들의 가르침에 현혹되지 말아야 합니다.
단지 유아세례는 하나님의 뜻대로 아이를 키우겠다는 부모의 서약일 뿐이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구원은 부모의 의지에 의해서 받는 것이 아니라
본인의 신앙에 의해서 받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구원이 부모의 신앙이 아니라,
본인 스스로의 신앙 고백에 의해 결정된다는 점을 분명히 할 필요가 있습니다.
부모는 하나님이 주신 아이를 신앙으로 키울 책임이 있으며,
따라서 부모는 아이가 스스로 신앙을 선택할 수 있게 될 때까지
그를 신앙안에서 키울 책임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 아이의 부모가 자녀가 어린 시기에 그가 하나님의 백성이 되기를 기도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의 뜻대로 아이를 키우겠다는 부모의 서약으로 바뀌어야 합니다.
목사님께서 어린 아이에게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노라”하십니다.
왜 주십니까? 그 의미가 무엇일까요?
2018.1.30.(화) 오후 1:34
이우길 집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