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일조에 대한 성경적 답변서』의 요약
김동진 저
〈저자는 십일조에 관해서 아래와 같이 그 성경적 답변을 하고 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고 있습니까?〉
1. 아브라함(창14), 야곱의 십일조(창28)
아브라함이 멜기세덱에게 준 십분의 일은
전리품의 십분의 일로 자발적이고 단회적인 사건이었고,
당시 고대 근동 지방의 관습에 따른 것이었다.
전리품은 이후 모세율법에서 오백분의 일을 바치도록 하였다.
(민31:25-28)
< 전리품 분배 >
25 주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셨다.
27 너는 전리품으로 가져 온 것들을 반으로 나누어서,
반은 전쟁에 나갔다 온 군인들에게 주고, 반은 모든 회중에게 주어라.
28 전쟁에 나갔다 온 사람들에게서는 주께 드릴 세금 몫을 떼어 내어라.
사람이든 소든 나귀든 양 떼든, 그 오백분의 일을,
29 그들에게 나누어 준 절반에서 떼어 내어,
주께 바치는 제물로 제사장 엘르아살에게 주어라.
30 이스라엘 자손에게 나누어 준 절반에서는,
사람이든지 소든지 나귀든지 양이든지,
그 어떤 가축이든지, 오십분의 일을 떼어 내어
주의 성막을 보살피는 레위 사람에게 주어라."
야곱의 십일조 역시 자발적인 일인데 조건부였다.
즉, 요즘처럼 잘 되든 못 되든 의무로 드려야 하는 십일조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자신을 잘 키켜주고 양식을 주시고 평안히 집에 돌아가게 해주시면
주신 모든 것에서 십일조를 드리겠다고 한 것입니다. (창28:20-22)
하지만 이후에 야곱이 약속한 십일조를 바쳤다든가
정기적으로 십일조를 바쳤다는 기록은 없다.
많은 사람들이 이 둘의 십일조를 모세율법 이전에 행하여졌다(초율법)고 해서
모세율법과는 상관없이 현재의 교인들도 드려야 한다고 주장하는데
그렇다면 모세율법 이전에 하나님께서 직접 명령하셨던
아브라함의 할례나 동물제사도 현재의 교인들이 해야 할 것으로
주장하지 않는 이유는 무엇인지 묻고 싶다.
이 둘의 십일조를 '영적으로' 해석해서 소득의 십일조 의무의 근거로 삼는 것이야
개인의 자유이지만 다른 성도에게 그 의무를 강요할 수는 없다.
성경말씀이 코에 걸면 코걸이 귀에 걸면 귀걸이가 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성경의 영적인 의미는 문자적 의미를 보충하는 것이 아니라
문자적 의미를 통해서 전달된다.
이른바 '영적인 해석(영해)'의 폐단은 요즘 이단들이 잘 보여주고 있다.
2. 모세율법의 십일조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바치라고 하신 십일조는
토지소산과 가축의 십일조였다.
돈으로 계산하여 내는 십일조가 아니라
땅의 열매와 기르는 가축의 십분의 일 이었다.
(레27:30-33, 신12:17, 신14:22-23, 신14:28, 삼상8:15, 대하31:16, 느12:44, 느13:5, 느13:12)
십일조를 모아 보관하는 금고나 통장이 아니라
양식을 모아두는 '창고'가 있었던 이유도 그 때문이다. (말3:10)
모세시대 후 1300여년이 지난 예수님 시대에도 이를 뒷받침하는 말씀이 있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는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 바 정의와 긍휼과 믿음은 버렸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 (마23:23)
요즘처럼 돈으로 내는 십일조가 아니었다는 것이다.
돈으로 계산해서 낼 수가 없었다는 것이다.
하나님께 바치라고 하신 곳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서 살면
열매와 가축의 십분의 일을 돈으로 바꾸어 그곳에 가서 다시 열매나 가축 등
즉, 먹을 것을 사야 했다. (신14:22-26)
만일 돈으로 내려면 십일조의 오분의 일에 해당하는 돈을 더 내야 했고
가축의 십일조는 돈으로 낼 수도 없었다.(레27:30-33)
옛날에는 화폐가 없거나 화폐경제가 발달하지 못해서
그런 것이 아니었냐는 반론이 있을 수 있는데
아브라함 시대에도 화폐가 있었다.
아브라함 시대만 해도 분명히 돈이 나온다.
아브라함이 아내 사래의 묘자리를
은 사백세겔에 사는 장면 (창23:16-19)이 있다.
모세율법 시대에도 가축에 의한 손해배상이나 (출21:32)
이른바 성전세 (출30:11-15)는 세겔이라는 돈으로 냈다.
예수님도 성전세를 내셨다. (마17:27)
예수님 시대에는
세겔, 렙돈, 데나리온, 앗사리온, 고드란트, 드라크마, 달란트 등
여러 나라, 여러 종의 화폐가 유통되던 사회였다.
예수님도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까지는 구약의 율법을 지키셨다.
성경의 배경이 되는 고대사회에서도 이미 오래전부터 화폐가 유통되고 있었다.
그런데 왜 하나님은 십일조를 굳이 먹을 것으로 바치게 하셨을까요?
그 이유는 하나님 앞에서 십일조를 함께 먹게 하기 위해서였다. (신14: 22-29)
하나님께 드린 토지소산과 가축의 십일조를
하나님께서 이름을 두시려고 택한 곳에서
함께 먹고 하나님 경외하기를 배우고,
식구들과 함께 먹고 즐거워하며,
삼년마다의 십일조는 자신이 사는 지역의
레위인과 나그네와 고아와 과부들과 함께 먹고
그들을 배부르게 하라고 하신 것이다.
십일조가 먹을 양식이 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
따라서 지금처럼 돈으로 십일조를 드리는 것은
십일조를 내도록 하신 하나님 뜻과는 관계가 없다.
요즘 십일조가 어디에 사용되는지 살펴보면 더더욱 그렇다.
성도가 말라기 말씀처럼 '온전한 십일조'를 바치려면
먹을 것을 내야 할 것이고 함께 십일조를 먹어야 할 것이다.
3. 레위인과 제사장을 위한 십일조
먹을 양식이었던 십일조는 레위인과 제사장에게도 주어졌다.
그들은 성막과 제사에 관련된 일을 하였기에
다른 이스라엘 백성과는 달리 토지가 주어지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민18:20-29)
민수기에서 등장하는 십일조는 제사와 관련된 부분으로 강조되고 있다.
이후 왕조시대나 바벨론 포로 회복기의 십일조는
이러한 십일조가 주로 언급되는 것으로 보인다.
이스라엘에서 최초의 왕 사울을 세울 때 십일조가 잠깐 등장하는데 (삼상8:15-19)
십일조가 당시 이스라엘에서 지속되었다는 사실과
당시 주변 국가들에서 왕에게 바치는 십일조가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후 둘로 갈라진 이스라엘 백성들은 타락하여
모세 언약에서 주어진 모세율법에 극도로 불순종하면서 배역하게 되고
모세의 말대로 나라가 망하게 되었다.
그러다가 느헤미야 시대에 성전을 재건하고 다시 일어서게 되는데
이때 십일조가 등장한다.
느헤미야의 개혁에 반대하는 제사장과 도비야가 십일조를 빼돌리고
십일조 양식 창고를 텅텅 비게 하고 레위인들은 성전을 버리고 귀향해 버린다.
성전과 제사가 버림을 당한다.
그러자 느헤미야가 십일조 개혁을 한다. (느13장)
성전과 제사가 버림을 당한 시기의 이스라엘에 경고한 선지자가
말라기 선지자였다.
이 말라기 말씀이 유명한 십일조 도적질이 나오는 말씀이지만 (말3:7-10)
이 말씀은 십일조를 빼돌려 성전과 제사를 황폐케한 제사장들에게 한 경고일 뿐만 아니라,
고대 이스라엘민족에게 주어진 모세율법에 따른 경고의 말씀이지
현대 교회에 그대로 적용되는 말씀은 아니다.
모세언약, 모세율법은 이스라엘만 주어졌지 다른 민족에게 주어진 것이 아니다.
(출20:2, 출24:38, 시147:19-20, 롬3:1-2, 롬9:4 등)
그가 그의 말씀을 야곱에게 보이시며
그의 율례와 규례를 이스라엘에게 보이시는도다.
그는 어느 민족에게도 이와 같이 행하지 아니하셨나니,
그들은 그의 법도를 알지 못하였도다. 할렐루야 (시147:19-20)
이스라엘을 제외한 모든 민족들은 율법없는,모세율법을 모르는, 이방인이었다.
(애2:9, 행2:45, 롬2:14 등)
이스라엘과 이방인을 가르는 칼날은 바로 모세율법이었다.
많은 분들이 별다른 생각없이 이 모세율법을 그대로 현대교회에 적용해
십일조 도둑이니, 안식일을 지켜야 하느니, 돼지고기를 먹지 말아야 하느니,
피를 먹지 말아야 하느니 등은 이런 저런 혼란을 야기시킨다.
모세율법은 이스라엘에 주어진 옛언약의 내용이지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확증된 새언약 위에 세워진 교회에 주어진 법이 아니다.
이스라엘은 옛언약에 실패했고 옛언약의 경고대로 비참한 심판을 받았다.
그런데 대제사장이 되시고 동시에 완전한 희생제물이 되신
그리스도의 십자가 피로 세워진 새언약은
모세율법을 완성하고 동시에 폐기하였다. (엡2:15. 골2:14 ,히7:12-19 등)
그 십자가를 통해 담이 허물어져
이방인들도 유대인들과 함께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다.
즉, 이미 완성되고 폐하여진 모세율법은
이스라엘 족속도 제대로 메지 못하던 멍에인데 (행15장)
새언약의 백성들인 교회가 지켜야할 의무나 도리는 더더욱 아니다.
초대교회에서는 이 모세율법을 준수하던 바리새인등
유대인 신자들과 모세라는 이름도 몰랐던 이방인 신자들과의 갈등이 있었다.
이 문제를 다룬 회의가 초대교회인 예루살렘 교회 공동회의였다. (행15장)
수장이었던 야고보의 결의(권고안)는
모세율법이 초대교회에서 더 이상 유효하지 않게 되었던 것을 알 수 있다.
4. 사역자와 십일조
십일조가 레위인과 제사장의 먹을 양식으로 주어졌다며
현대교회의 목사 등 사역자들을 위해
소득의 십일조를 내야한다는 주장도 있는데
현대의 목사등 사역자들은 구약의 레위인이나 제사장이 아니다.
옛언약에서는 짐승이 죄를 지은 사람대신 죽음으로 죄가 용서되었는데
이를 행하는 사람이 제사장이었고
제사가 행해지는 성막이나 성전의 일을 하는 사람이 레위인들이었다.
그런데 이 제사는 대제사장되신 예수님께서
자신을 십자가에서 대속죄물로 바치심으로 인해 단번에 성취가 되었고
그 예수님을 믿는 자마다 죄 용서를 받고
예수님의 의를 입어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되었다.
모세율법의 제사와 희생은 성취되었고
사람 제사장과 레위인, 성전은 사라지게 된 것이다. (히9:9-12, 롬3:23-26등)
따라서 그들을 먹여 살려야 하는 십일조도 필요가 없게 된 것이다.
오늘날 성도는 모두 제사장이며 (벧전2:5-9, 계1:6등)
성전 (고전3:16-17, 고후6:16, 엡2:20-22)이다.
물론 사역에 전념하는 사람의 생활을 성도들이 책임져야 하는 것은
주님의 말씀이고 (고전9:13-14등) 당연합니만
그것이 소득의 십일조(돈) 의무를 통해 되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초대교회에서도 십일조는 전혀 등장하지 않고 있다.
사역자의 보수(고전9장등)와 성도를 돕는 연보를 말하고 있을 뿐이다.(고후9장등)
혹자는 초대교회에서 당연히 십일조를 했기 때문에
성경에 언급이 없다고 하나 오히려 바울은 사역자들이 보수를 받아야
마땅한 것이라 설명하고 있고
자신은 오해를 받지 않기 위해 값없이 복음을 전한다고 하고 있다.
즉, 바울의 말은 초대교회 당시 사역자에게 십일조를 주는 십일조제도가
당연한 것이 아니었다는 반증이 되는 것이다.
초대교회가 십일조를 걷어 사역자들의 생활을 도왔다면
바울이 이런 이야기를 꺼내 자세히 설명하고 강조할 이유가 없다.
5. 예수님과 십일조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는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 바 정의와 긍휼과 믿음은 버렸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
(마23:23, 병행 눅11:42)
이 말씀이 소득의 십일조 의무의 근거로 흔히들 주장합니다만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바리새인들이 행하던 그 십일조도
행하려면 먹을 것으로 해야 한다고 앞에서 설명했다.
또, 먹을 것을 모았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걷어갈 레위인도 없고,
십일조 창고도 없고 성전도 없다.
또, 예수님께서도 모세율법의 십일조를 행하라고 하셨으므로
우리도 그 십일조를 해야한다면
예수님께서 하신 할례도 해야하고 (눅2:21-22),
성전의 제물과 예물도 있어야 하고(마5:23,24),
제사드리는 제사장도 있어야 하고
성전도 있어야 할 것이며
예수님처럼 성전세도 내야 할 것이고,
최후의 만찬으로 알려진 유월절도 지켜야 할 것이다.
무교절의 첫날에 제자들이 예수께 나아와서 이르되
유월절 음식 잡수실 것을 우리가 어디서 준비하기를 원하시나이까
이르시되 성안 아무에게 가서 이르되 선생님 말씀이 내 때가 가까이 왔으니
내 제자들과 함께 유월절을 네 집에서 지키겠다 하시더라 하라 하시니(마26:17-18)
모세율법이 그것만 있습니까?
그 수많은 모세율법의 금지규정,
이를테면 삼겹살, 선지해장국, 장어구이 등등도 먹지 말아야 할 것이다.
수혈도 금지하는 이단도 있다.
정말 그렇게 해야 하는가?
아니면 가능한 일부만 지키면 되는 것인가?
많은 혼란과 문제점이 발생한다.
예수님은 왜 모세율법을 말씀하셨는가?
예수님이 할례, 십일조, 유월절, 성전세, 정결법 등
모세율법을 지키시거나 말씀하신 것은
예수님께서 유대인으로 나셨기 때문이기도 하지만(요4:22)
하나님 뜻에 따라 율법의 지배아래 있는 자기백성을 속량하시고
하나님 자녀삼으시기 위해서 였다.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에(율법의 지배아래) 나게 하신 것은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너희가 아들이므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빠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 (갈4:4-6)
새언약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이후에 효력이 있게 되기에
예수님께서는 생전에 모세율법을 말씀하시고 순종하셨다.
즉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르심을 입을 자로 하여금
영원한 기업의 약속(상속)을 얻게 하신 것이다.
또, 이 율법에 온전히 순종한 사람은 예수님밖에 없고
십자가에서 율법을 완성하셨고 동시에 폐하셨다.(엡2:45)
이로 말미암아 그는 새 언약의 중보자시니
이는 첫 언약 때에 범한 죄에서 속량하려고 죽으사
부르심을 입은 자로 하여금 영원한 기업의 약속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유언은 유언한 자가 죽어야 되나니
유언은 그 사람이 죽은 후에야 유효한즉
유언한 자가 살아 있는 동안에는 효력이 없느니라(히9:15-17)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려
새언약을 이루시기 전까지 모세율법을 언급하시고
또, 본문에서 바리새인에게 뱀, 독사의 새끼들 등 심판을 내리시면서(마23)
십일조를 언급하셨던 것이다.
바리새인이 새언약을 알 턱이 없었고
그들은 구언약, 모세율법에 따라 심판을 받게 되었던 것이다.
따라서 전후맥락이나 배경, 십자가 복음에 비추지 않고
단순히 일부 구절만 떼어와 예수님께서 십일조를 행하라고 하셨다는 것은
설득력이 없는 주장인 것이다.
6. 하나님께 드리는 것
새 언약의 성도들이 하나님께 드리는 것은
성도를 돕는 연보, 사역자들의 생활을 돕는 것이다.
십일조 주장자들은 바울이 연보에 대해 언급하면서
매주 첫날에 소득에 따라 모아두라는 구절(고전16:1-2)을 십일조라고 주장하나
이 구절은 처음부터 바울은 성도를 돕는 연보에 대해서라고 말하고 있고
보관과 이동이 가능한 돈을 말하고 있으며,
미리 미리 준비하고 급하게 모금함으로
억지와 혼란을 일으키지 말라는 것이 주된 취지이다.
또, 이 연보 언급을 통해서 십일조가
초대교회에서 더 이상 의무로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성도가 다른 성도를 돕는 가장 중요한 원칙은
'자원함'이고 하나님께서 없는 것을 받으시지 않으신다고 말씀하신다.
다른 성도를 각자의 형편대로 자원함으로 아낌없이 돕는 것이
하나님께 드리는 것인데
그것을 이미 시효가 지난 십일조 운운하며
모든 소득의 십분의 일로 못박는 것은
예수께서 피로 사신 그리스도인의 자유를 함부로 제한하는 것이 아닐 수 없다.
믿음이 온 후로는 우리가 초등교사 아래에 있지 아니하도다(갈4:25)
7. 히브리서의 십일조(히7장)
히브리서의 십일조는
예수님께서 영원불멸의 대제사장이심을 논증하는데 인용된 것이지
현대 교회의 교인들이 십일조를 해야 할 것을 논증하거나 명령하는 것이 아니다.
히브리서의 저자는 히브리서의 수신자였던
유대인 성도 공동체의 복음에 대한 무관심(히2:1~4)과,
노골적인 불신앙(3:7~4:13)에 대해 경고하면서
아들 속에서의 하나님 계시의 최종성을 설명하는 가운데 (히1:1~2)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영혼들을 섬기는 천사보다 우월하며(히1:1~14),
모세보다도 우월하며(히3:1~6), 믿는 자들의 조상인 아브라함보다 우월하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창세기에 기록된 것과 같이
아브라함이 축복을 받고 전리품의 십분의 일을 준
영원한 멜기세덱 제사장의 반차(서열)를 따르는 영원하신 대제사장이시기 때문이다.
제사장 지파였던 레위인도 아브라함을 통해 멜기세덱에게 십일조를 주었다.
낮은 자가 높은 자에게서 축복을 받는 것은 논란의 여지가 없다.
이 멜기세덱이 얼마나 높은 사람인가 보아라!
그러므로, 멜기세덱의 서열을 따르는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아브라함보다 높은 분이시다.
이렇게 높은 분으로 제사직분이 바뀌었으니
율법도 바뀌고 무익하여 폐하여졌다!
예수님을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갈 더 좋은 소망이 생겼다!
이것이 히브리서 7장의 말씀이다.
제사 직분이 바꾸어졌은즉 율법도 반드시 바꾸어지리니
이것은 한 사람도 제단 일을 받들지 않는 다른 지파에 속한 자를 가리켜 말한 것이라
우리 주께서는 유다로부터 나신 것이 분명하도다.
이 지파에는 모세가 제사장들에 관하여 말한 것이 하나도 없고
멜기세덱과 같은 별다른 한 제사장이 일어난 것을 보니 더욱 분명하도다.
그는 육신에 속한 한 계명의 법을 따르지 아니하고
오직 불멸의 생명의 능력을 따라 되었으니 증언하기를
네가 영원히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르는 제사장이라 하였도다.
전에 있던 계명은 연약하고 무익하므로 폐하고(율법은 아무 것도 온전하게 못할지라)
이에 더 좋은 소망이 생기니 이것으로 우리가 하나님께 가까이 가느니라(히7:12-19)
즉, 십일조가 영원히 효력이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아브라함의 십일조 사건과 모세율법의 십일조 법을 잘 아는 독자인
유대인 그리스도인 공동체에게 한시적인 모세율법에 따른 것이 아닌,
시작도 끝도 없는 영원한 멜기세덱의 제사장직을 승계한
영원불멸의 대세사장 예수 그리스도 외에 사람 제사장이
끼어들 여지가 없다는 점을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서 사람 제사장이 제사하는 모세율법은
무익하여 폐하여졌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히브리서 저자가 예수님께 십일조를 바친다든가,
성도가 바쳐야 한다는 말도 한 사실이 없다.
하늘에 계신 예수님께서 먹을 양식이 필요하시겠습니까?
그리스도의 단번의 영원한 제사, 피의 구속사역을 부인하지 않는 한,
오늘날 예수 그리스도 외에는 성전과 제사와 제사장이 없는데
그 누구에게, 무엇을 위해 십일조를 바치겠습니까.
하나님 우편에서 성도를 위해 중보하시는 예수 그리스도 이외에
이 땅위에 적법한 대제사장은 아무도 없다.
8. 결론
이상과 같이 한국교회들이 주장하는 돈으로 내는 모든 소득의 십일조 의무는
성경적 근거나 설득력이 없다.
청교도주의에 영향을 받은 초기 한국선교사들이
교회 재정자립을 위해 도입한 십일조 제도는
어디까지나 사람의 전통이나 유전일 뿐이다.
물론 성도가 십일조의 예에 따라 자원해서 소득의 십분의 일로
물질의 헌신을 한다면 얼마든지 가능합니다만
그것이 하나님의 명령이다, 성도의 의무라 주장한다면 커다란 문제가 있다.
또한 십일조가 교인의 자격조건이 된다는 말은
물론 십일조가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이라는 고백이라는 말도
성경적 근거가 없는 사람의 사상이다.
교회는 사람의 말은 물론 돈으로 세워지거나 돈으로 확장되지 않는다.
한국교회는 교회가 돈에 의지해 세워지고 유지된다는 통념을 버려야 한다.
바울처럼 직업을 가지고도 사역을 할 수 있어야 하며
예배당 건물에 대한 집착을 버려야 한다.
교회는 조직이나 건물이 아닌 성도들의 자발적인 '모임(에클레시아)'이다.
이제 평신도들도 목사들이 떠먹여주는
출처불명의 말들을 무분별하게 먹을 것이 아니라
초대 베뢰아 교회 성도들처럼 과연 십일조가 '그러한가'
스스로 성경을 들춰보고 스스로 바르게 판단해야 할 것이다.
2017.12.19.(화) 16:05에 발췌함
이우길 집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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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일조와 헌금에 대하여」
여러 교회가 십일조와 헌금을 율법적으로 강조하여
성경의 일부만을 인용하여 가르치는 경우가 허다하여
주님이 원하시는 정직한 가르침이 필요합니다.
성도들로부터 더 많은 헌금을 유도하기 위해,
성경의 일부만을 떼어서 가르치는 것은 조작행위(manipulation)입니다.
심지어 헌금을 많이 할수록 더 부자가 될 것이라고 가르치는
사이비 가르침도 횡행하고 있는 것이 슬픈 현실입니다.
성도가 십일조의 예에 따라 자원해서 소득의 십분의 일로
물질의 헌신을 한다면 얼마든지 가능합니다만
그것이 하나님의 명령이다, 성도의 의무이다.
하나님의 것을 도둑질하는 것이다 라고 강요한다면
커다란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헌금은 얼마를 해야하는가는
구약의 십일조에 준하여 드리는 것을 참고 할 수 있으며
자유함과 자원함의 원리에 따라
즉 형편에 따라 많이 할 수도 있고 적게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김윤희 교수)
https://www.youtube.com/watch?v=FfdvTLoemkk
은혜스러운 말씀을 듣고 감격하면 십일조나 헌금을 강요하지 않아도
스스로 자원하여 주님께 바칠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그것을 원하실 것입니다.
그리고
미국에 있는 유대의 랍비에게 십일조를 받느냐는 물음에 대한 그들의 대답은
내가 있는 회당(synagogue)에서는 어느 누구도 십일조를 하는 사람이 없으며
‘만약 십일조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하나님의 법을 어기는 것이며
하나님께 범죄하는 것이다’라고 대답을 했다고 합니다.
그의 설명에 의하면 십일조는 레위인들만 받게 되어 있으므로
레위인 아닌 사람에게 주는 것은 잘못된 것이며
또한 오늘날 더 이상 레위인들에 의한 제사장제도는 존재하지 않으므로
십일조는 잘못된 것이라고 했다고 합니다.
그는 이렇게 부연설명을 했다고 합니다.
“우리가 율법을 지켜야 한다면
십일조는 당연히 하나님께서 허락한 자에게 주어야 하며
그렇지 않으면 주는 자나 받는 자 모두 말씀을 어기는 죄를 짓는 것이라 했고,
그 랍비는 자신이 수석랍비 (chief rabbi of his synagogue)이기는 하지만
레위파가 아닌 유다지파이므로 십일조를 받을 수가 없으며
이것은 예수님(유다지파)도 마찬가지 이었고
베드로(유다지파)도 사도 바울(벤자민지파)을 포함한 어느 제자도
십일조를 받지 않았다고 합니다..
유럽이나 미주의 대부분의 교회당에서는 십일조를 하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그들을 정죄하거나 비성경적이라 여겨 구원이 없다고 해서는 안 됩니다.
이런 왜곡된 가르침 속에서, 지금도 어떤 사람들은 더 부자가 되기 위하여,
교회에 맹목적으로 헌금을 하고 있습니다.
이런 맹목적 헌금태도가 교회의 타락을 부추기게 합니다.
십일조와 헌금에 관한 정직한 성경의 가르침을 살펴보아야 할 것입니다.
1. 예수님의 가르침
마태 23:23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를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 바 의(justice) 와 인(mercy)과 신(faith)은 버렸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
예수님은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십일조 헌납 그 자체만은 좋게 여기셨습니다.
그가 이 말씀을 하신 때는 아직 그의 구속사업이 완성되지 않은 것인 만큼(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시기 전이므로)
구약적인 제도가 그대로 적용되던 때였습니다.
십일조를 정확히 바친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에게 예수님은 화를 선포하셨습니다
아니 십일조를 정확히 드리고도 화를 얻게 된다는 말입니까?
그것도 예수님으로부터 !
그렇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십일조와 헌금을 많이 한다고 하더라도
올바르지 않으면. 예수님은 우리를 책망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십일조보다 훨씬 더 중요한 것이,
의와 인과 신을 강하게 선포하셨습니다.
정의와 긍휼과 믿음이 빠진, 형식상의 십일조 헌금은 의미가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교회에 십일조를 하고,
그 십일조에 대해 목사님이 아무리 경건한 듯한 태도와 말로 축복을 해도
예수님은 그 기도에 제한 받지 않으실 것입니다.
십일조 이전에, 우리의 의(justice)와 인(mercy)과 신(faith)을 보시는 것입니다.
거짓 선지자와 같은 목사들이 헌금을 많이 하면 할수록
더 부자가 될 것이라는 말에 속아서,
더욱 부자가 되기 위하여 우리가 십일조와 헌금을 한다면,
과연 예수님은 우리를 칭찬하시겠습니까?
의와 인과 신이 없는 헌금과 십일조를 한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을 저주하심으로써.
예수님은 분명한 메시지를 전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의와 인과 신이 있으면 헌금과 십일조를 하지 않아도 되는가?
이것은 우문에 불과합니다.
정의와 자비와(mercy, 긍휼히 여기는 마음), 믿음(faith)이 있는 사람은
당연히 십일조와 헌금을 하게 됩니다.
예수님도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즉 십일조와 헌금은 의와 인과 신에서 자연스럽게 나온 결과물인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십일조가 세금 전 십일조인가
세금 후 십일조인가를 놓고 많이 고민합니다.
이 사람에게는 의와 신과 인이 약하다는 증거입니다.
2. 사도 베드로의 가르침 (아나니아와 삽비라)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자신의 전 재산의 반을 바쳤음에도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습니다.
전 재산의 반을 바친 아나니아와 삽비라에게 사도 베드로는
결코 굽신거리거나 칭찬하지 않았습니다.
전 재산의 반은 십일조의 다섯 배입니다.
아니 다섯 배 이상일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들의 잘못된 태도로 인해 비참한 최후를 맞았습니다.
십일조와 헌금은 드리는 태도가 더 중요한 것이라는 것을 명심해야 할 것입니다.
3. 사도 바울의 가르침
고후 8장과 9장에서 아주 자세한 가르침이 제시되어 있습니다.
1) 십일조 헌금의 본질
십일조 헌금의 본질은 성도를 섬기는 일입니다.
즉 교회 안에 가난한 성도와 복음전파자들에게 물질을 공급하는 것입니다.
결코 화려한 교회당 건물을 짓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또한 교회안의 성도가 아닌 사회 자선사업을 하기 위한 것도 아닙니다.
그리고 십일조와 헌금은 단순히 자신들의 개교회 만을 위한 것이 아니고,
어려움에 처한 다른 교회들에게 도움을 주기 위한 것이기도 합니다.
예루살렘교회의 어려운 성도들을 위해,
고린도교회와 마게도니아교회가 도운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2) 십일조 헌금의 태도
십일조 헌금은 결코 강제 명령이 아닙니다.
그러나 반드시 사랑의 마음에서 출발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사랑으로 즐겨내는 자를 사랑하십니다.
억지로나 인색함으로 하는 것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3) 얼마를 내야 하는가?
현재 가지고 있는 범위 내에서 해야 합니다.
결코 빚을 지면서 하는 것은 성경적이지 않습니다.
4) 누가 십일조를 많이 하는 것인가?
(누가복음21장 1-4)
결코 절대적인 금액이 많다고 해서 많이 한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칭찬한 과부를 상기해야 합니다.
5) 십일조 헌금한 자들의 결과는?
고후9:8
“하나님이 능히 모든 은혜를 너희에게 넘치게 하시나니
이는 너희로 모든 일에 항상 모든 것이 넉넉하여
모든 착한 일을 넘치게 하려 하심이라”
올바른 태도로, 사랑의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십일조와 헌금을 한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은혜가 있어, 결코 굶주리거나 하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필요를 채우실 것입니다.
또한 모든 것에 넉넉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나 자신의 유익을 위한 것이 아니라,
모든 착한 일을 넘치게 하려 하심이 목적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나 십일조와 헌금을 했다고 해서,
그 몇 만 배, 몇 십만 배를 되돌려 받아
더 부자가 될 것이라는 헛된 믿음,
미신적 믿음에서 탈피해야 할 것입니다.
6) 십일조와 헌금의 사용
십일조와 헌금은 성도를 섬기기 위한 것입니다.
가난한 성도들을 돕고, 고아와 과부를 돕고, 사역자들을 후원하는 것입니다.
불필요한 행사비용으로 지출하거나,
과도한 건물에 투자하는 것은 결코 잘못된 것입니다.
또한 과시하기 위한 사회 자선사업에 사용되는 것도 옳지 않습니다.
7) 십일조 헌금의 영적 의미
십일조와 헌금은, 그것이 만일 복음 전파에 사용된다면,
복음전파에 동참하는 것이고,
복음을 직접 전파하는 사람의 동역자가 되는 것입니다.
또한 그것이 가난한 성도들을 돕는데 사용된다면
십일조와 헌금을 한 사람은 가난한 성도들을 도운 것이고 이는 하늘에 보물을 쌓은 것입니다.
그러나 십일조와 헌금이, 필요 이상의 교회당 건축에 사용된다면,
그는 교회당 건물의 건축에 동참한 것입니다.
만일 타락한 목사에게 헌금하여 그가 횡령하거나 악한 목적에 사용된다면,
헌금한 사람도 그 타락한 목사의 행동에
자신도 모르게 동참하게 된 것과 같습니다.
비록 선의로 헌금했을지라도,
그의 헌금은 전혀 유용하게 사용되지 않게 된 것입니다.
십일조와 헌금은 단지 교회에 드리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그것이 어떻게 사용되는 지가 중요합니다.
십일조와 헌금은 받는 사람의 사역에 적극 동참한다는 뜻입니다.
8) 헌금을 반드시 자신이 속한 지역교회에 해야 하는가?
성경 어디에도 헌금을 반드시 자신이 속한 교회에만 해야 한다고
되어 있는 구절이 없습니다.
십일조와 헌금은, 그곳이 자신이 속한 교회이건,
아니면 다른 선교 단체이건, 다른 지역의 교회이건 간에.
자신이 판단해서 가장 유용하게 사용될 수 있는 곳에
드려지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백부장 고넬료가 교회를 통하지 않고,
직접 가난한 자들을 구제한 것도 하나님께서 기쁘게 받으셨습니다(행 10:1~4).
그런데 만일 자신이 속한 교회의 어려움에 처한 형제를 보고도 도와 줄 마음이 없다면,
그는 자신을 다시 점검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더구나 자신의 가족이나 부모 등을 돌보지 않고,
더 부자가 되기 위해 교회에만 헌금하는 것은, 탐욕의 표현일 뿐입니다.
가장 현실적인 문제는, 자신이 속한 교회에 헌금을 함에 있어서
헌금이 성경적으로 가난한 자와, 사역자를 위해 사용되지 않고
엉뚱하게 사용되는 경우입니다.
이 경우는, 자신이 직접 다른 가난한 성도를 돕는다거나
참다운 사역자에게 직접 헌금해도 좋을 것입니다.
이것이 하늘에 보화를 쌓는 것입니다.
한국 교회에 이단세력과 타락한 목사들이
발호하기 쉬운 원인 중에 하나가 바로,
성도들의 무분별한 헌금입니다.
좀 더 부자가 되겠다는 욕심으로
무분별하게 헌금을 하는 행태가 만연되어 있기에,
이단들이 이점을 이용해서 세력을 키울 수 있고,
타락한 목회자가 발호할 수 있는 것입니다.
9) 고후9장 6절의 해석
“이것이 곧 적게 심는 자는 적게 거두고
많이 심는 자는 많이 거둔다 하는 말이로다”
이 구절은, 헌금을 많이 내도록 유도하기 위해서
이용하기 가장 쉬운 성경구절입니다.
이 구절의 진정한 의미를 모르고,
단지 헌금을 많이 하면 더 부자가 될 것이라는
착각을 갖도록 가르치는 데 문제가 있습니다.
이 구절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다음 절을 살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각각 그 마음에 정한 대로 할 것이요
인색함으로나 억지로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즐겨 내는 자를 사랑하느니라.”(고후9:7)
고후6:7절의 한글 성경에는 없지만,
KJV 에는 “그러므로 (so),“라는 단어가 있습니다.
즉 6절을 단순히 해석하지 말고, 7절이 더 중요한 내용이라는 뜻입니다.
7절의 중점은 “즐겨내는 것”입니다.
헌금을 즐거운 마음으로 내라는 뜻입니다.
어떻게 즐거운 마음으로 내는가?
헌금을 하여 그 헌금으로 가난한 자들이 어려움에서 벗어나며,
사역자들이 복음을 전파하여 하나님의 복음이 널리 전파되는 것을 생각하고,
이러한 사역에 자신이 동참자가 된다고 생각하면 즐겁지 않을 수 가 없습니다.
그리고 6절에 “거둔다”는 단어를
단지 이 땅에서 나에게 더 많은 물질이
안겨질 것이라고 해석한다면 너무나 허무한 해석입니다.
이 땅에서 나에게 더 많은 물질을 갖고 살아가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여기서 ‘거둔다’는 의미는 장래 하늘에서의 보상을 의미하는 것이
더 크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좀 더 부자가 되기 위한 욕심으로
맹목적으로 헌금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사랑과 긍휼과 헌신의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분별있는 헌금을 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목사님들이 십일조나 헌금을 강요하게 되면
성도들의 자발성을 훼손시켜
마지못해 드리는 결과를 초래하는 것이 되고 맙니다.
10) 율법이전의 십일조
율법이전, 즉 아브라함으로부터 모세의 율법 전까지, 십일조가 있었습니다.
이 십일조는 하나님이 명령하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즉 자발적인 감사와, 권위에 대한 순종의 의미였습니다.
아브라함이 멜기세덱에게 자발적으로 가장 좋은 것의 십일조를 드린 것이지
멜기세덱(창15:18-20)이 십일조를 강요하거나 명령한 것이 아닙니다.
십일조를 멜기세덱에게 드린다는 의미는 무엇일까요?
왜 아브라함은 십분의 일을 드렸을까요?
물질의 주권자가 내가 아니고, 하나님이라는 선포입니다.
또한 하나님의 제사장에 대한 예우로서,
멜기세덱이 하나님의 제사장이라는 선포입니다.
11) 율법시대의 십일조
율법시대에는 십일조는 법이었습니다.
이것은 좋든 싫든 드려야 했습니다.
마치 국가에 세금을 바치는 것과 같습니다.
이 십일조는 제사장들에게 드려졌고,
제사장들은 생업에 종사하지 않고,
십일조에 의해 살며 제자장의 업무를 수행할 수 있었습니다.
12) 신약시대의 십일조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셔서 승천하신 후에는
성전과 제사장의 규례들이 신약계시로 말미암아 폐지되었습니다.( 히브리서 9:10)
십일조도 마찬가지로 구약적 제도로서의 헌납은
신약교회에서 시행되지 않아야 합니다.
교회의 지도자들이 신자들에게 십일조 헌금(십일조는 최소한도의 헌금임)을 장려하면서,
그것을 신약시대 성도의 헌금의 표준인 듯이 가르치는 일이 있다면, 시정되어야 합니다.
(박윤선 목사-대한예수교장로회 헌법주석 107-110p 십일조 헌금 문제 )
특히 교회 직분자 선출에 있어 십일조나 감사헌금을 결부시켜 따지는 것은 성경적이 아닙니다.
율법은 폐하여 졌으나, 성령의 법이 지배하는 시대이므로
우리는 성령의 법에 따라야 할 것입니다.
비록 십일조의 율법적 의무는 없어졌지만,
내주하시는 성령의 음성에 따라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헌금은 어느정도로 해야 할것인가는
십일조의 범위를 참고하여 하면 될 것입니다.
외식적으로 의무적으로 행하는 십일조가 아니고,
즐겁고 기쁜 마음으로 분별있게 헌금생활을 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십일조와 헌금을 했다고 해서
나의 할 일을 다 했다는 환상에서 벗어나야 할 것입니다.
13) 말라기 3장 8절-9절의 해석
“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의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
나의 집에 양식이 있게 하고 그것으로 나를 시험하여 …”
많은 사람들이 이 구절을 오해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이 구절을 십일조를 교회당에 해야한다는 것으로 오해합니다.
그러나 말라기에서 분명히 말한 것은 온전한 십일조를 나의 집 즉 여호와의 집에 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호와의 집이 어디입니까? 교회당입니까?
교회당 즉 교회 건물은 결코 여호와의 집이 아닙니다.
교회의 예금 구좌일까요?
이것도 여호와의 집이 아닙니다.
여호와의 집은 바로 성도입니다.
가난한 성도와 참된 사역자를 말합니다.
온전한 십일조는 성도들과 참된 사역자에게 드려져야 합니다.
여호와의 집은 교회당 건물을 필요이상으로 화려하게 장식하거나,
최신의 음악 악기를 구입하거나 하는 것을 말하지 않습니다.
이웃의 불쌍한 영혼을 버려둔 채
필요 이상의 화려한 교회당을 짓는 일에 몰두하는 것은 비성경적입니다.
가토릭이 중세 바디칸의 성당을 짓기 위해 면죄부를 파는 것과
크게 다른 점이 무엇인가 묻고 싶습니다.
그 방법이 다르기는 하지만
둘 다 목적하는 바가 크고 화려한 성당이나 교회당을 짓는 것입니다.
만약 주님이라면,
의식주의 해결이 어려운 농어촌 교회의 교역자나,
먼 이국 땅에서 어렵게 선교를 하는 선교사나,
우리 사회에 추워 떨고 있는 노숙인이나,
못 먹어 죽어 가는 아프리카의 아이들을 살릴 것입니다.
새벽기도, 수요예배, 금요철야 예배 등은
유럽이나 미주 등의 교회에는 없는 신앙심 깊은 한국 교회에만 있는 한국 특유의 예배의 형식입니다.
그렇다고 이들 예배가 없는 교회당을 비성경적이고
구원받지 못할 교회라고 단정해서는 안 됩니다.
십일조나 헌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님께서는 20세기를 살아가는 저희들에게 말할지 모릅니다.
“화 있도다, 부자되기를 원하는 자들이여 !
너희가 십일조와 헌금을 드리고는 있으나
그것보다 더 중요한 의(justice)와 인(mercy)과 신(faith)은 왜 버리는가?
십일조와 헌금도 하고 정의(justice)와 긍휼(mercy)과 믿음(faith)도 행해야 하느니라”
2017.12.21. (목) 새벽 2시
이우길 집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