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운 아버지
나는 아버지의 젊은 시절을 잘 모릅니다.
누가 말해 주는 사람도 없습니다.
초등학교 다닐 때
겨울철 냇물이 너무 차가울 때 나를 업어 건네주신 기억이 납니다.
해마다 여름이면 홍수가 나서 과수원에 물이 넘쳐흘러 속상해 하시고
과수원 밖 천변에 돌 쌓으시던 아버지가 생각납니다.
아버지와 함께 먼 산에 나무하러 갔습니다.
내가 잘못하여 손을 다첬습니다.
아버지께서는 런닝셔츠를 잘라 싸매주시고 먼저 집으로 가게 했습니다.
과수나무 사이에 참외와 수박을 제배하시고
험하고 상한 것 도려내시고 잡수시며
시커멓게 변색되도록 사용하시던 접는 칼이 생각납니다.
아버지는 윗 과수원 저 멀리서 나를 부르실 때는 “길아 --, ” 하고 고함쳐 불렀습니다.
내가 계성고등학교 입학 시험을 치를 때
학교 근처 여관에 같이 가셔서 주무시면서 격려해주시고
2일 째 체력검사 시에 힘을 내라고
여관집 주인에게 ‘소고기 볶음 특별식’을 주문해주시고 나만 먹으라 하셨습니다.
나에겐 어머니가 3명 있었는데
한 명은 얼굴도 모르는 누나의 어머니입니다.
두 누님의 어머니는 병사하시고 아버지는 재혼하셨는데 바로 우리 어머니이십니다.
어머니는 나를 낳고 또 여동생을 낳았는데, 여동생은 어려서 뇌염으로 일찍 죽었습니다.
내가 여섯 살 때 어머니는 출가하셨습니다.
이유는 잘 모릅니다. 그리고 알고 싶지도 않았습니다.
안다한들 어찌했겠습니까?
제가 고등학교 시절에 새 어머니가 오셨는데 학업 때문에 떨어져 살았고,
군에 입대하였고, 제대 후에 결혼함으로 같이 생활하지 못했습니다.
지금은 모두 이 세상 사람들이 아닙니다.
나는 한평생 ‘어머니’라는 말을 한 기억이 없습니다.
그래서 어머니 보다는 하나님을 찾았습니다.
어려서 아버지를 따라 새벽기도회에서 하나님을 불렀습니다.
아무리 불러도 대답을 하지 않으셨습니다.
아버지께서는 집에서 새벽마다 울면서 기도하시고
찬송가도 크게 부르셨습니다.
그리고 거의 매일 가정예배를 드렸습니다.
아버지께서는 63세에 신학교에 들어가셨습니다.
아버지가 설립하여 섬기던 교회를 나이 많으셔서 후배 목사에게 넘겨주고
경주 우리 집에 오셔서 함께 지냈습니다.
저는 팔공산 기슭에 있는 부계중학교에 근무하게 되어
토요일에 집에 와서 주일 지내고 월요일 아침 일찍 출근했습니다.
아버지가 치매끼가 있어 동네에 나가셨다가 집에 찾아오지 못한 적도 있었습니다.
온 식구가 찿아 헤매였는데
어느 골목에서 우리집 땡칠이가 아버지의 옷을 물고 짖어대었습니다.
어느 토요일에,
집 욕실에서 아버지의 몸을 씻겨 드렸습니다.
무좀 많은 발도 깨끗이 손질해드렸습니다.
음식을 잘 드시지 못하셨고 말씀도 겨우 하셨습니다.
그래서 사과를 반 잘라서 씨있는 부분을 도려내고
숟가락으로 긁어 입에 넣어 드렸습니다.
맛있게 받아 잡수셨습니다.
그 다음 날이 주일인데
아버지와 함께 예배드리고 싶어,
집에서 제가 예배를 인도했습니다.
녹음기도 설치했습니다.
"예수 앞에 나오면..."을 부르면서 목이 메였습니다.
"이몸에 소망 무엔가..."는 3번이나 불렀습니다.
아버지가 원하셨기 때문입니다.
"나 같은 죄인 살리신..."을 손을 잡고 불렀습니다.
그리고 그동안 아버지를 속상하게 한 죄를 용서받기도 했습니다.
제가 "천국이 보이느냐?" 고 물어보았습니다.
아직 보이지 않는다고 대답하셨습니다.
그리고 나를 따라 말씀하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요, 하나님요, 내 영혼을 부탁드립니다"
위의 낱말로 나누어서 따라하게 했습니다.
그리고 천국에서 다시 만나자고 했습니다.
찬송을 끝낼 때마다 "아멘"을 하고 따라하게 했습니다.
아버지가 주무시는지 확인하고 싶었고
또 제 혼자 부른 찬송에 아버지가 함께 불렀다는 유일한 표현이 "아멘"이기 때문이었습니다.
한번은 "아멘" 소리가 약하여 크게 하라고 아버지께 말씀드렸더니
있는 힘을 다하여 2번이나 크게 "아멘" 했습니다.
그것이 아버지의 이 세상에서의 마지막 큰 목소리였습니다.
그 녹음 자료는 귀하게 간직하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50번 이상 들었습니다.
주로 통근하면서 승용차에서 녹음 자료를 틀어 놓고
아버지를 그리워하며 눈물을 흘렀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감사드렸습니다.
한번은 겨울인데 차 안에 장미 향기로 가득했습니다.
정말 이상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천국을 냄새로 체험하게 하셨다고 생각합니다.
어쩌다가 저도 아내가 두 명인 신세가 되었습니다.
첫 아내는 3 아들과 추억을 남기고 먼저 갔습니다.
둘째 아내는 하나님 나라의 공동상속자로서 지는 노을을 바라보면서
누구든지 먼저 묻어 주려고 만났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니 아내의 죽음도 아버지의 죽음에 버금가는 큰 슬픔이었습니다.
어쩌면 더한 슬픔이었는지도 모릅니다.
나는 가장 슬픈 일이 또 한번 남아 있습니다.
지금 아내가 있기 때문입니다.
아마도 내가 먼저 슬픔을 주고 떠나갈 것 같습니다.
그래서 또 죄인이 됩니다.
이 세상에서의 삶이 기구하지만
하나님이 나의 목자 이시기에 나는 부족함이 없습니다.
실지로 부족함이 없습니다.
내가 살 곳은 영원한 천국입니다.
그곳에는 그리운 아버지도 계시고, 할아버지도 계시고, 아내 이권사도 있습니다.
아내 이권사의 동생이 나보다 한 살 위인데 이틀 전인 5월 26(목) 아침에 죽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잘 모르고 죽었습니다.
그러하니 어머니인 장모도, 여동생인 제 아내도, 다시는 만나지 못할 것입니다.
그것이 큰 비극입니다.
살아 있을 때 하나님 믿으라고 하긴 했지만 건성으로 했고
처형과 목사인 동서도 적극적이지 못한 것이 후회될 것입니다.
후회하니 뭐합니까 !
때는 이미 늦었고 엉뚱한 곳에 갔을 터인데...
처남이 죽기 전에,
며칠을 함께 잠 자면서 복음을 전했어야 했는데...
욕을 먹고, 미쳤다는 말을 들어가면서라도 전했어야 했는데...
엉뚱한 곳에서 바라 볼 처남을 생각하면, 이제야 눈물이 납니다.
다른 사람 전도하기 전에,
해외에 나가 낯선 사람 전도하기 전에,
자기 가족부터 살려야 합니다.
우리 처남은 영원히 만나지 못할 처지가 되었습니다.
이 세상에서의 죽음이 끝이 아니고, 영원한 삶이 있다는 것을 확신한다면,
목숨 걸고, 자기 가족부터 살려야 합니다. 정말 안타깝습니다.
나는 아버지가 63세에 신학교에 입학하신 것을 대단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나는 내가 목사의 아들인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합니다.
하마터면 큰 일 날 뻔 했습니다.
아버지, 고맙습니다.
하늘에 계신 하나님 아버지, 정말 고맙습니다.
그런데 요즘 아버지가 보고 싶습니다.
아내, 이권사도 보고 싶습니다.
아버지의 바지가랭이를 물고 짖어대던 땡칠이도 보고싶습니다.
2016.5.28(토) 15:45
이우길 집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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