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살이/금식 논쟁

금식 논쟁

천국백성 2016. 4. 11. 10:05

 

 

 

 

 

 

 

 

 < 집에서 기른 '거제왕찔레' >

 

 

 

금식 논쟁 

 

마가 2:18-22
 18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은 금식을 하고 있었다.

사람들이 예수께 와서 물었다.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새파 사람의 제자들은 금식하는데, 왜 선생님의 제자들은 금식을 하지 않습니까? "
19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혼인 잔치에 온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에 금식할 수 있느냐?

신랑을 자기들 곁에 두고 있는 동안에는 금식할 수 없다.
20 그러나 신랑을 빼앗길 날이 올 터인데, 그 날에는 그들이 금식할 것이다."
21 생베 조각을 낡은 옷에다가 대고 깁는 사람은 없다.

그렇게 하면 새로 댄 조각이 낡은 데를 당겨서, 더욱더 심하게 찢어진다.
22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담는 사람은 없다.

그렇게 하면 포도주가 가죽 부대를 터뜨려서, 포도주도 가죽 부대도 다 버리게 된다.

새 포도주는 새 가죽 부대에 담아야 한다."

 

 

이 말씀의 배후에 등장하는 등장인물이 누구인가부터 살펴보겠습니다.

예수님의 제자인 세리 레위(마태)가 등장하고,

레위의 집에 들어가셔서 식사를 하시는 예수님과 제자들이 나옵니다.

그리고 예수님과 제자들을 비방하는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나옵니다.

 

그런데 같은 비유가 적혀있는 마태복음으로 가면

비방하는 무리가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아닌 세례요한의 제자들이라고 나옵니다.

     

그러니까 지금 예수님과 제자들을 비방하고 있는 이들은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 그리고 세례요한의 제자들이라 할 수 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그렇다 치고 세례요한은 예수님 편 아니었나요?

그런데 왜 세례요한의 제자들이

예수님과 제자들을 이토록 공개적으로 비방을 하고 나섰을까요?

하나님은 지금 묵은 것을 좋아하는 죄인들의 속성을 폭로하고 계신 것입니다.

거기에선 세례요한의 제자들일지라도

자유로울 수가 없다는 것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심지어 세례요한까지도 감옥에 갇혀있는 자신의 처지를 바라보며

오실 이가 당신이 맞습니까?’라고 물을 정도였지요?

구약의 마지막 선지자였던 세례요한은

구약적 세계관에서 자유롭지 못했던 것입니다.

   

지금 문제가 되고 있는 것이 금식이지요?

왜 우리는 금식일에 금식하는데 너희는 먹고 마시느냐? 그것도 세리의 집에서?’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율법에 목숨을 건 사람들이었습니다.

율법에는 일 년에 단 한번,

대 속죄일에 금식을 하라는 규례가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23:27,29,32)

    

금식이라는 것은 인간의 육신에 에너지 공급을 중단하는 것으로서,

육의 죽음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금식이라는 것은 인간이 자신들의 처음 자리,

즉 죽은 흙의 자리를 직시하고 수긍하는,

쉬운 말로 인간존재의 무력함과 불가능함을 스스로 인정하고

난 죽은 자입니다라는 고백을 하는 행위가 금식이었습니다.

 

대 속죄일의 금식은 그렇게 하나님의 죄 사함의 은혜 앞에서

인간은 죽은 자에 불과하다는 것을 인정하고

하나님의 대속의 은혜를 꼭 붙드는 순종과

자기부인의 행위로 요구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인간들이 기특하게도

일 년에 한 번만하면 되는 금식을 계속 늘려 갔습니다.

스가랴서에 보면 이스라엘이 성령으로 4월과 5, 7월과 10월에

각각 어떤 날을 정해서 금식을 해왔다는 사실이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시키신 것이 아니라

인간들이 스스로 늘려간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계속 늘어나다가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을 비롯한 유대인들,

심지어 구약의 마지막 선지자인 세례요한의 제자들까지도

매주 월요일과 목요일, 일주일에 두 번씩 금식을 했습니다.

그것은 율법도 아니었고 그저 장로들의 유전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일 년에 한번만 하라고 요구하신 금식을

매 주 두 번으로 늘려서 하나님을 감동시키려 했던 것입니다.

문제는 그들이 금식을 통해 자신들의 불가능함과 무력함을 인정하고

하나님의 은혜의 필연성을 깨달은 것이 아니라,

그것으로 자신들의 경건함을 자랑했고,

이방인들과의 구별됨과 차이성을 드러내려 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밥은 굶기는 굶는데,

하나님이 의도하신 것과는 완전히 반대되는 모양으로 율법을 지킨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은 나의 속죄의 은혜 앞에서 너희들의 처음자리를 확인하고,

너희들의 불가능함과 무력함을 인정하여

자기를 부인하라는 의도로 금식을 명하셨는데,

유대인들은 우리는 이렇게 도에 지나는 금식까지 함으로 해서

하나님도 감동하시는 기특한 일을 하는 유일한 민족이라는

자기 영광 챙기기와 자기 가치 챙기기의 일환으로 금식을 했던 것입니다.

   

물론 세례요한의 제자들

바리새인들이나 서기관들과는 좀 다른 의미로 금식을 했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세례요한으로부터

오실 메시아에 관해 들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그들은 메시아를 맞기 위해서는

금식이라는 자신들의 기특하고 경건한 행위가

반드시 전제되어야 한다고 생각을 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세례 요한의 제자들도 일주일에 두 번씩 꼬박꼬박 금식을 했습니다.

그들은 바리새인들처럼 금식이라는 행위를 자랑으로 여기지는 않았지만

그러한 율법의 행위가 메시아를 맞이하는 자들의 최소한의 예의이며

갖추어야 할 덕목이라는 생각을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 역시 율법주의입니다.

     

아무튼 그렇게 자신들이 힘들게 금식을 하고 있는 바로 그날,

예수라는 분이 제자들과 함께 세리 마태의 집에 들어가

죄인들과 함께 먹고 마신 것입니다.

그때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

그리고 세례요한의 제자들이 합세하여 예수님을 비방하고 나선 것입니다.

그 상황에서 예수님이 당신을 비방하는 자들에게 주신 말씀이

오늘의 비유 말씀인 것입니다.

     

본문 말씀을 잘 보시면

예수님은 당신을 혼인잔치의 신랑으로 표현을 하십니다.

혼인잔치의 신랑과 함께 있는 이들이 어떻게 금식을 하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구약의 금식이라는 것은

혼인잔치에서의 신랑과의 잔치 누림까지로 가는 과정에 필요한 것이었지

신랑이 함께 있을 때에는 전혀 무용한 것이라는 말씀인 것입니다.

 

좀 더 쉽게 말하면 금식을 포함한 모든 율법은

신랑이신 예수님을 만나는 데에 필요한 몽학선생인 것이지,

그것 자체에 어떤 효능이나 효과가 있었던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오히려 금식을 포함한 모든 율법은,

신랑이신 예수가 그 모든 것을 완전케 하심으로 말미암아  

신약에 와서는 먹고 마시는 것,

즉 금식이나 정결한 음식과 부정한 음식의 구분 같은 율법이

아무런 의미가 없어진 것입니다.

그것은 단지 예수가 오실 때까지만 어떤 교훈을 위해 주어졌던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성경이

우리 성도의 인생 전체를 금식의 삶이라고 이야기를 합니다.

    

 

 

오늘 본문의 시작은 사람들이 예수님께 와서 뭐라고 말을 합니까?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새인들이 금식을 하고 있다고 말하며

왜 당신의 제자들은 왜 금식을 하지 않느냐 고 말합니다.

여기서 요한은 누구를 말합니까?

 

 

여기서 말하는 요한은 세례 요한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들은 왜 금식을 하고 있었을까요?

      

그들이 금식한 이유는 본문에는 나와 있지 않지만

아마도 구약 시대의 전통과 이스라엘의 역사 속에서

구체화된 관습에 따라 금식을 한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러나 요한의 제자들은 그들의 선생이 감옥에 갇혀 있는 것을 애통해 하면서

하나님의 도움을 얻기 위해서 금식한 것으로 생각됩니다.

18절 중반 절을 보면 바리새인의 제자들이라는 말이 나오는데

바리새인들에게 제자가 있었나?

    

일반적으로 바리새인들은 교사가 아니므로 제자를 두지 않았다.

여기서 말하는 제자는 서기관 계열에 소속되어 있는 서기관들

바리새인 제자라고 말하고 있다.

그런데 사람들이 예수님에게 와서 뭐라고 말을 했나?

      

요한의 제자와 바리새인들은 금식을 하는데

당신의 제자들은 금식을 하지 않느냐고 질문을 하였다.

이에 수님께서는 어떻게 대답을 하였나?

      

이에 예수님께서는

혼인 집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을 때에 금식할 수 있느냐

신랑과 함께 있을 동안에는 금식할 수 없느니라.

그러나 신랑을 빼앗길 날이 이르리니 그 날에는 금식할 것이니라고 말했다.

 여기서 예수님께서 금식을 하지 않는 이유는 구체적으로 뭐라고 말했나?

      

예수님께서는 금식을 하지 않는 이유를

혼인 잔치를 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예수님은 금식을 하지 않는 이유를 들면서 혼인 잔치의 비유를 들었다.

여기서 혼인 잔치의 기간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혼인 잔치의 기간은 예수님의 공생애 기간을 의미한다.

 신랑은 누구를 의미하는가?

     

여기서 신랑은 예수님을 말한다.

그런데 예수님은 20절에서 언제 어떤 상황에서 금식을 한다고 말하는가?

     

신랑을 빼앗길 날이 이르리니 그 날에는 금식할 것이니라고 말했다.

여기서 보면 신랑을 빼앗길 날 이라는 말이 나오는데

그 날은 언제를 말하는가?

     

그 날은 예수님께서 원수들에게 잡히셔서

고난 받고 십자가에서 죽게 되는 날을 의미한다.

그러면 제자들이 금식하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

      

제자들이 금식하지 않는 이유는

예수님이 금식을 부정하거나 가르치지 않은 것이 아니라

아직 때가 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는 것을 보여 준다.

21절을 보면 생베 조각 이라는 말이 나오는데 생베 조각은 어떤 천인가?

      

생베 조각은 아직 표백되지 않은 새로 짠 천으로

대단히 질기고 신축력이 있는 옷감이다.

그럼 생베 조각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인가?

      

상징적으로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의미한다.

그러면 낡은 옷은 어떤 옷을 말하는가?

     

낡은 옷이란 약간의 힘만 가하여도 찢어질 수밖에 없는 옷을 말한다.

이것은 무엇을 상징하는가?

     

유대교의 전통과 의식에 입각한 바리새인들과 세례 요한의 교훈을 의미한다.

 그러면 유대교의 전통과 의식에 입각한 바리새인들과 세례 요한의 교훈은 무엇을 말하나?

      

유대교의 낡고 생명력이 결여된 전통에 입각한 교훈과

예수님의 왕성한 생명력을 지닌 새로운 복음이 조화를 이루지 못할 것임을 가르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다시 왜 반복하신 것일까?

      

예수님께서 반복하신 것은

혼인 잔치와 금식에 대한 예수님의 앞선 가르침을

바리새인의 제자들과 요한의 제자들이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또 예수님께서 22절에서 다른 비유를 들어 설명을 하고 있는데 어떤 비유를 들었는가?

    

예수님께서 22절에서 새 포도주와 가죽 부대의 예를 들고 있다.

예수님께서 새 포도주와 가죽 부대의 비유를 어떻게 들고 계신가?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넣는 자가 없나니

만일 그렇게 하면 새 포도주가 부대를 터뜨려 포도주와 부대를 버리게 되리라.

 오직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으라고 말씀하신다.

그럼 여기서 새 포도주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새 포도주는 예수님의 새로운 가르침을 의미한다.

그러면 낡은 가죽 부대는 무엇을 의미 하는 것일까?

    

유대교의 낡은 전통을 의미한다.

예수님께서는 새 포도주와 낡은 가죽 부대를 통해

무엇을 말씀하시려고 하는 것일까 ?

    

예수님은 유대교의 낡은 전통과 의식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수용할 수 없다는 것을 비유를 통해 가르치고 있다.

그러면 새 포도주는 어디에 넣으라는 것일까?

     

22절 하반 절을 보면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으라고 말씀하신다.

왜 새 부대에 넣으라고 말씀하신 것일까?

    

그것은 지금까지 있었던 것과 구별되는 질적으로 새로운 것을 가리킨다.

이 말의 의미는 무엇인가?

    

이 말의 의미는 예수님께서 주신 새로운 교훈은

이전 것과는 질적으로 구분되는 새로운 체계를 지님을 보여준다.

그러면 왜 새 포도주를 새 부대에 담으라고 하시는 걸까?

    

이는 율법과 복음이 하나 될 수 없음을 인식시키며

율법의 정신을 버리고 형식만 지키는 태도를 버리지 않으면

진리의 복음을 받아들일 수 없다는 뜻이다.

여기서 말하는 율법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율법은 옛 습관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면 나는 율법적인 정신을 가지고 있지 않은가?

    

나 자신을 돌아보면 나쁜 것인데도

옛 습관을 버리지 못하고 계속적으로 반복하며 살아가고 있다.

그러면 오늘 본문 앞부분에서 금식에 대해서 논쟁을 벌리는데

과연 나는 이제 까지 금식을 하면서 어떤 목적으로 했을까?

     

나는 금식을 하는 경우는

어려운 일이 당해 나의 힘으로 해결되지 않고 긴박한 상황에서 금식을 선택한 것 같다.

나의 어려운 일을 해결하는 도구로 사용했던 것 같다.

그러면 금식을 행한 행위가 잘못된 것이 아닌가?

     

잘못 되었음을 인정한다.

진정한 금식은 내 즐거움과 욕구를 채워주는 것이 아니라

매인 자를 풀어주고 약한 자를 배려하고 필요한 자를 채워주는 것이

진정한 금식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면 이러한 금식을 통해 어떤 삶을 살아가길 원하나?

     

매일의 삶이 나의 즐거움과 욕구를 채우는 삶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 안에서 기뻐하며 하나님이 즐거워하시는 을 살기 원한다.

그러면 그러한 삶을 살아가지 못해 결국 형식적인 신앙생활로 연결이 되지 않는가?

     

이러한 나쁜 구습들이 나의 신앙생활에 악영향을 끼치며

그것이 결국 형식적인 신앙생활로 나타나게 된다.

그러면 신앙생활이 형식적인 틀에 갇히지 않기 위해 어떻게 해야 될까?

     

일반적으로 매주 예배를 드리다 보니 진정으로 예배의 참 의미를 모르고

매주 드린다는 생각 속에서 드리는 경우가 많다.

거룩한 가운데 드려질 예배가 외식하는 모습으로

즉 당연히 드려야 하니까 라는 생각으로 드려져 형식적인 경우가 많다.

다시 한번 모든 일에 있어 매 순간마다 정성을 드려

하나님께 올려 드려야 한다고 생각한다.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

말을 마음 판에 새기며 예배를 드려야겠다.

그러면 형식적인 틀에서 벗어나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

     

먼저 나의 신앙생활을 다시금 점검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나의 잘못된 신앙생활들은 과감하게 버리고

형식이 아닌 살아있는 신앙을 유지할 수 있도록 늘 깨어 기도해야 한다.

진정으로 매일 주님 앞에 나아갈 때에

살아 계신 주님을 체험하며 늘 깨어 주님을 찬양하며 경배할 것을 결단한다.

 

2016.4.11(월)10:05

이우길 집사  

 

 

 

 

< 집에서 기른 '메발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