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살이/청함을 받은 자는 많되 택함을 받은

청함을 받은 자는 많되 택함을 받은 자는 적으니라

천국백성 2016. 4. 9. 09:03

 

 

 

 

보디발의 아내와 요셉  ('귀도 레니'作)

 

 

'귀도 레니'

청함 받은 자는 많으나 택함 받은 자는 적으니라

마태복음 22:1-14

< 혼인잔치의 비유 > 

 

 

하나님께서는 미리 아신 사람들을 택하셔서, 

이미 정하신 사람들을 부르시고,

또한 부르신 사람들을 의롭게 하시고,

의롭게 하신 사람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실 것입니다.

 

택함이란 어디까지나 하나님의 권한이지

피조물에게는 아무 권한이 없는 것입니다.

청함은 내가 받았으나 택함을 하시는 분은 그 분이십니다.

그리고 인내하고 기다리시는 분도 그분이십니다.

 

 그들이 태어나기도 전에,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기도 전에,

택하심을 따라 세우신 하나님의 뜻이 지속되게 하시며,

 하나님의 이러한 일이 사람의 행위에 근거하는 것이 아니라

부르시는 분께 달려 있음을 나타내시려고,

리브가에게 "형이 동생을 섬길 것이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택함과 청함을 받은 우리는 이 은혜를 정말 감사해야 합니다.

은혜를 정말 감사해야 합니다.

은혜를 정말 감사해야 합니다.

은혜를 정말 감사해야 합니다.

 

우리에게 무슨 선한 것이라도 있었습니까?

장래에 무슨 선한 일을 하리라는 근거라도 있습니까?


복음으로 청함을 받았다고 해서

특별한 존재가 되어 구원을 거저 받는 것이 아닙니다.

복음을 받았다면 복음대로 살아야 하는 고난의 길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 길을 인내하며 참고 이겨낸 자가 '택함'을 입습니다.

 

'택함' 이란 어떤 정해진 사람에게 주어진 특권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복음을 따라 모든 소유를 버리고 십자가를 지는,

복음에 합당한 삶을 사는 자들에게 입혀주시는 '흰 옷이라고 성경은 말합니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고 하셨습니다.

 

교회를 다니지만 사업을 위하여 출석하고,

하나님을 믿지만 자신이 좋은 때는 감격의 눈물을 흘리기도 하고

주님 사랑한다 하면서 그렇지 않을 때는 믿지 않는 사람과 다를 바 없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목회자라고 하면서도 삯꾼도 있는 것이 이 시대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기에 청함을 받은 자는 교회밖에 있는 자가 아니라 교회 안에 있는 자 들입니다.

어차피 교회밖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의 복음을 모르지만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은 말씀을 들었지만 형식적인 종교생활만 하는 사람들,

 하나님을 믿되 인본주의로 믿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기에,

청함을 받은 자는 많되 택함을 받은 자가 적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되 바로 믿으라고 하시는 말씀입니다.

우리들의 삶의 우선순위이 되어서도 안 되며,

배우자나 자식이 되어서도 안 됩니다.

권력이나 명예가 되어서도 안 됩니다.

그럴 경우에 그것이 우상이 된다고 하셨습니다. 

이 시대에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깨어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복음은 많은 사람에게 주어지지만 정작 구원받는 이는 적다고 말씀하십니다.

이는 천국의 초청에 응했다 하더라도 하나님 뜻에 따르지 아니하고 자기 뜻대로 행한 자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는 것을 단적으로 말해 주고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초청을 거부한 자들

 

 예수님은 마지막 때에 온 세상 사람들을 심판하신 후에

하나님의 백성들과 함께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을

왕의 아들의 혼인잔치로 비유하셨습니다.

구약 시대에 하나님의 백성으로 초청된 자들은 유대인들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그 잔치에 참여하기를 거부했습니다.

유대인들이 예수께서 전하시는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거부한 것입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이 3년이나 유대의 온 지역을 돌아다니며

 병든 자도 고치시고,

귀신도 쫓아내시며,

오병이어로 많은 사람들을 먹이시고,

파도에도 명령하시고,

죽은 자도 살리시는 각종 기적도 일으키시며

하나님 나라의 원리와 특권과 책임에 대하여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그의 백성들이 그 어떤 것도 받아들이지 않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유대인들은 더 이상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며,

이제는 그들이 오히려 이방인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본문의 비유에서 제시하는 왕의 혼인잔치를 거절한 자들을 좀 더 자세히 분석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초청된 잔치에 무관심하고 자기의 일에만 몰두하는 자

 

 첫째로 거절한 자들은 왕의 혼인잔치에 관심이 없는 자들입니다.

그들은 자기의 밭과 사업의 일에만 관심이 있었습니다.

이런 사람은 자기 개인의 일에만 열정을 가지고 있을 뿐,

하나님의 일에는 도무지 관심이 없는 자들입니다.

 

 누가복음 14:15~24에서는

이때 거절했던 사람들은 밭을 샀으니 가 보아야 하겠고,

소를 샀으니 시험하러 가 보아야 하겠으며,

장가들었으니 가보아야 하겠다면서 거절했습니다.

 

 밭을 살 때 이미 확인한 밭을 이 귀한 잔치를 앞두고

또 가보아야 할 이유가 무엇일까요?

소를 산 사람 역시 소를 살 때 확인하여 이제는 외양간에 잘 있을 텐데

왜 이 귀한 잔치를 앞두고 또 확인하려 한다는 말일까요?

결혼을 했으니 이제부터 아내를 평생 즐겁게 해 주면 될 일입니다.

그러므로 그것 역시 사망과 생명을 판가름할 잔치에 참여하지 못할 이유는 되지 못합니다.

 

모두 다 세상살이에 필요한 일들입니다.

이 세상에 사는 동안 필요한 일을 하느라 하나님 나라 잔치에 참여할 수 없다고 말한 것입니다.

 

 이들 중에는 겉으로 보기에는 신앙생활을 아주 잘하는 것처럼 보이는 자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들의 관심은 자기의 개인의 일입니다.

기도를 해도 자기 개인 일이 잘 되기를 바라는 기도를 할 뿐입니다.

 

 예수님은 이 비유를 통해

우리가 가장 중요한 일이라 여기고 관심을 갖는 것이 무엇인지를 물으시는 것입니다.

당신에게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왕이 보낸 종들을 능욕하고 죽이기까지 한 핍박자들

 

 앞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 나라의 일을 반대하지는 않았습니다.

그저 관심이 없을 뿐입니다.

그러나 일부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보내신 예언자들과 선지자들을 잡아 가두고 때리고 죽였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님까지 죽였습니다.

이들은 예수님의 복음에 관심을 보이지 않은 것에 지나서 그 복음을 따르는 자들을 핍박하는 악을 행하였습니다.

 

 내가 싫어하며 거부하는 일이 하나님의 일이라면 나 역시 이런 악을 범하는 자가 됩니다.

지금 당신이 거부한 것, 짜증 낸 것, 불평하고 원망한 것이 어떤 것인지를 다시 한 번 살펴보아야 합니다.

혹시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에 그렇게 하였다면 그 일로 당신은 하나님과 적대자가 되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다른 사람으로 내 잔치를 채우라

 

 (하나님)께서 천국 잔치를 마련하시고 사람들을 초청하였는데,

사람들이 이런 저런 다른 일에 분주하여 하나님의 초청을 거부했습니다.

이에 왕(하나님)은 거리로 나가서 아무나 다른 사람을 불러 이 찬치 자리를 채우라고 명합니다.

이것은 본래 초청되었던 자들은 이제 다시 오겠다고 해도 이 잔치에 참여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처음에는 그들이 거절했으나 이제는 왕(하나님)이 그들을 거절하리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을 대신하여 참여한 자들은

그동안 하나님 나라 백성에서 제외 되었던 세리와 창기들 같은 죄인들,

그리고 구약에서 개나 돼지로 여김 받던 이방인들입니다.

이것은 누구든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고자 하는 열망을 가진 자들은 다 참여하게 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를 원하되 내 생명처럼 가장 간절하고도 절실하게 원하고 사모하여야 합니다.

하나님 나라는 그렇게 원하고 사모하는 자들에게 지금도 활짝 열려져 있습니다.

 

그러나 마음 중심에는 다른 것이 있고,

적당히 신앙의 활동에 참여하는 것으로 만족하고 있다면 그 나라 입구에서 거절될 것입니다.

 

예복을 입지 않은 손님

 

 

 

 혼인잔치 자리에 손님이 채워지자 왕은 손님들을 돌아봅니다.

여기에서 왕이 손님들을 돌아보는 것은

마지막 때에 온 세상 만민을 심판하시는 것을 비유하신 것입니다.

왕은 그 때 예복을 입지 않은 한 사람을 발견합니다.

왕이 그에게 왜 예복을 입지 않았는지를 물으나 그는 한 마디도 대답하지 못합니다.

그가 대답하지 못한 것은 예복을 입을 기회가 있었으나

그가 고의로 입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옛 옷을 벗고 새 옷을 입은 것은 회개를 의미합니다.

천국을 간절히 원하고 사모하는 자는 반드시 회개하고 주님을 바르게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너무 늦지 않게 회개해야 합니다.

 

아주 특별한 사람 이외에는 죽음을 앞두고 미리 회개할 시간을 갖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불행히도 대부분의 사람들이 삶의 분주함 때문에 회개할 기회를 놓치고 삶을 마감합니다.

인생의 앞날은 준비하였으나

죽음 후의 삶에 대하여는 준비를 하지 못하고 사는 사람들이 대부분입니다.

 그래서 사도들은 기회가 있을 때마다 믿음의 때가 바로 지금이라고 강조한 것입니다.

특히 하나님을 섬기는 일은 더욱 뒤로 미루어서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오늘이 당신의 마지막 날일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청함을 받은 자는 많으나 택함을 받은 자는 적다

 

이 말씀은 예수께서 하나님의 나라 혼인잔치 때에 청함 받은 자들이

혼인 잔치에 참석하지 못 할 것을 미리 예언하신 무서운 말씀입니다

즉 혼인잔치에 참석치 못함은 바로 천국에 못 들어간다는 비유적인 말씀임과 동시에 비극적인 내용입니다.

 

  혼인 잔치는 세상 끝에 있는 어린양의 혼인잔치를 말합니다.

새 하늘 새 땅 천국의 시작은 어린양의 혼인잔치에서부터 시작합니다

 어린양의 혼인잔치에 참석하려면, 어린양의 아내가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를 입어야 합니다.

이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는 진짜 옷이 아닌 성도들의 옳은 행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세상 모든 만민을 하나님 나라의 혼인잔치에 초청하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를 자신의 가장 중요하고 절실한 것으로 여기고 사모하는 자는 참으로 적습니다.

하나님 나라를 원하기는 하지만,

회개하고 늘 하나님과 신실한 교제를 나누면서

그 날을 준비하며 사는 자들은 참으로 적습니다.

그래서 청함을 받은 자는 많으나 택함을 입은 자는 적다고 하신 것입니다.

 

 삶이 분주하고, 교회에서의 활동도 분주하여

무엇인가 잘 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사람들 중에도

천국을 간절히 사모하고, 회개하는 이 두 가지를 잘 하지 못하고 있는 자들이 참으로 많습니다.

당신은 어떤 사람입니까?

 

 이에 고린도전서 9장에서

바울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셨을 때

그 때의 처지를 유지하면서 살아가라고 말합니다.

종으로 태어난 자는 종의 상태 그대로,

자유인으로 태어난 자는 자유인으로,

예수님을 처음 만났을 때 그 때의 상태를 유지하면서 살라는 것입니다.

종에서 자유인으로의 신분 상승을 위한 노력을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이 세상에서 좀 더 나은 삶을 살기 위해

노력하면 안 된다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에서 더 나은 삶을 살려 하는 것이 인생의 목표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이 땅의 사회적 신분을 높이기 위해 온 힘을 기울이기에는 우리의 인생이 너무나도 짧다는 것입니다.

그것보다는 이제 곧 다시 오실 주님을 맞이할 준비를 하며 사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사회적 신분 상승이나 더 나은 삶을 사는 것이

인생의 목표가 되는 사람은 죽을 때까지 이 마음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학교 다닐 때에는 성적을 높이기 위해 애쓰다가

직장에 들어가면 이제 동료들과 승진을 위한 경쟁을 하게 됩니다.

노년에 은퇴하고 난 후에는 자녀들의 신분 상승을 위해 애씁니다.

 

 많은 경우에 인생의 마지막까지

이렇게 이 세상 것을 채우기 위해 온 힘과 정열을 쏟으며 사느라

하나님 섬길 시간을 갖지 못하게 됩니다만,

그래도 노년이 되면 젊을 때보다는 하나님을 더 생각하게 됩니다.

삶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 주님 앞에 심판 받을 일이 걱정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인생의 마지막에 자신의 삶을 돌아보며

이제는 좀 하나님을 섬기는 삶을 살아야겠다고 생각하지만

그때는 주님을 섬길만한 이 없습니다.

 

 이처럼 신분 상승을 위한 노력은 인생 전반에 끝없이 계속됩니다.

그렇게 신기루 같은 이생의 성공을 향한 꿈을 잡기 위해 달려가다가 인생이 끝이 납니다.

결국 어느 한 순간에도 오직 하나님만을 섬기는 때를 만나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내가 소망했던 꿈이 이루어지는 순간 나는 곧 새로운 꿈을 갖게 되기 때문입니다.

 

 마귀는 이것만 이루고 주님을 찾겠다며 자기 자신과 타협하게 합니다.

그러나 그것을 이루고 나면 마귀는 또 다시 새로운 꿈을 갖게 합니다.

그렇게 마귀는 우리에게 계속해서 새로운 꿈을 미끼처럼 우리 눈앞에 아른거리게 합니다.

내 욕망을 자극하여 그것을 이루기 위해 돈과 시간과 육신의 모든 것을 그것에 집중하게 합니다.

결국 하나님을 만나는 시간을 갖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진짜 인생을 위하여

 

 왜 이렇게 해야 합니까?

진짜 인생의 행복을 위해서입니다.

이 세상에 신분 차이가 있습니까?

천국과 지옥은 더 엄청난 차이가 있습니다.

 

 주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복은 정말 어마어마한 것입니다.

사도들이 그것을 이 세상의 언어로는 제대로 표현하지 못해 '주님과 함께 왕 노릇 한다고 했습니다.

이 땅에서 가장 높은 신분이 왕이므로, 왕 노릇 한다고 표현한 것입니다.

 

  주께서 주시는 복이 이 세상 것보다 더 크고 좋은 것이라 믿는다면,

그것을 얻기 위해 이 세상 것은 조금 손해 보더라도 아쉬워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지금 현재의 신앙을 지키라

 

 사회적 신분을 변화시키기에 힘쓰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지금 내 삶의 처지에서 주님을 어떻게 섬기고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각자 현재 삶의 현장에서 주님과 동행하며 사는 것이 제일 중요합니다.

 사회적 변화를 가져올 기회가 있다면 굳이 마다할 이유는 없습니다.

그러나 이 일에 우리 인생 전체를 걸만큼 중요한 문제는 아닙니다.

 

 각자 무엇을 가졌든, 어떤 가문의 사람이든,

부자이든 가난한 자이든 주님 앞에서는 모두 다 똑같은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지금 이 상황에서 내가 주님을 어떻게 섬기고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만일 요셉이 노예가 된 자신의 처지를 괴로워하였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만일 요셉이 오직 자신을 노예로 팔아넘긴 형들을 증오하며

내가 어떻게 해서든 신분 상승을 하여

형들에게 복수하리라는 마음을 품었다면

그는 결코 보디발의 아내의 유혹을 물리칠 수 없었을 것입니다.

보디발의 아내는 요셉을 자유인으로 만들어 줄 수 있는 능력이 있는 여자였기 때문입니다.

만일 그랬다면 우리는 창세기에서 요셉의 이름을 볼 수 없었을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요셉은 자신의 처지를 괴로워하며

자기 연민에 빠지지도 않았고,

열등감에 사로잡히지도 않았고,

형들을 증오하지도 않았습니다.

그의 현실에서 오직 하나님을 섬기려 힘썼을 뿐입니다.

그런 요셉을 하나님께서 그 시대를 위한 중요한 인물로 사용하셨습니다.

 

 세상 것을 얻으려는 열망에 가득 찬 사람은,

보디발의 아내와 같은 유혹을 이기지 못합니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기뻐하는 자와 함께 기뻐하고 우는 자와 함께 울라 하셨는데

당신은 기꺼이 그렇게 했습니까?!

 

 

 

2016.4.9(토) 09:00

이우길 집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