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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의 뜻이 이 땅에서 이루어지는 세상

천국백성 2015. 12. 22. 02:13

 

 

 

 

 

 

하늘의 뜻이 이 땅에서 이루어지는 세상

 

 

영생은 어떻게,

 

한 율법사가 예수님께 찾아와 질문합니다.

그 당시 율법학자최고의 석학입니다.

당시 예루살렘에 있는 바리새인들의 수는 6천여 명 정도였다고 합니다.

그런데 바리새인들 중에 더 특별히 율법을 연구하는 자들이 서기관들이요, 율법학자들이었습니다.

그런 율법학자가 어느 날 많은 사람들 앞에서 질문을 합니다.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보통 질문이 아닙니다.

이 정도의 질문이라면 예수님이 결코 쉽게 답할 수 없을 것이라고 예상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되물으십니다.

율법에 무엇이라고 기록되었으며 어떻게 읽느냐?고 합니다.

<What do the Scriptures say? How do you interpret them?>

  성경 속에서 답을 찾아보라고 역제안하신 것입니다.

그러자 그가 대답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했습니다.

그는 최고 수준의 지식인답게 613가지나 되는 많은 율법을 요약하면서

결국 이것이라고 명쾌하게 답을 합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네 대답이 옳다하시며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라고 말씀하십니다.

 

 

누가 이웃인가,

 

그런데 율법학자가 다시 한 번 더 묻습니다.

그렇다면 내 이웃이 누구입니까?’

아니, 그렇게 똑똑한 사람이 이웃이 누군지도 모른다는 말입니까?

잘 이해가 가지 않는 질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 활동 당시, 율법학자를 비롯해서 서기관들, 바리새인들의 생각 속에는

이웃의 개념이 명확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잘못된 신학 사상 때문입니다.

그 잘못된 신학에 갇히면 이웃이 보이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

 

우리는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말을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실 때, 나 아닌 타자를 존중하라는 뜻으로

눈에는 눈, 이에는 이를 말씀하셨습니다.

만약 네 것만 소중히 여기고 상대의 것을 소중히 여기지 않으면 네 것도 동형으로 처벌할 것이다.

그러므로 상대의 모든 것을 소중히 여기고 지키도록 하라는 '예방법'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 예방법을 '보복법'으로 바꾸어 버렸습니다.

율법의 근본 취지를 바꾸어서 오히려 동형으로 보복하라는 뜻으로 오해한 것입니다.

한마디로 율법 정신을 왜곡한 것입니다.

 

 

이 잘못된 해석이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도 적용되었습니다.

서기관, 바리새인 등 특권층들은 자신들의 부유한 삶을 너무나 정당하게 받아들이고,

그렇지 못한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거나 동정하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는 간단합니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법칙을 적용해 보면,

자신들이 부자로 사는 이유는 하나님 앞에 이롭기 때문에 하나님이 복 주셨기 때문이고

다른 사람들은 하나님 앞에 제대로 행실을 하지 못했기 때문에 벌을 받아서

가난하게 사는 것이라는 결론이 나오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가난한 자들에 대해 연민이나 동정을 가질 필요가 전혀 없는 것입니다.

당시 바리새인, 서기관, 율법학자들은 이 편견을 가지고

자기들의 생각과 삶을 정당화시키고 교만해 있었습니다.

하나님을 이방인들의 하나님이 아니라 유대민족만의 하나님이라고 제한시키고

더 나아가 가진 자들의 하나님, 바로 자기들만의 하나님으로 좁혀 오해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정말 그렇습니까?

율법에는 원래 이웃개념이 살아 있습니다.

가을에 추수할 때, 추수하는 이들이 밭의 곡식을 다 베지 않고

밭모퉁이의 일부를 고아와 객과 과부를 위하여 남겨두는 것은

모든 백성들이 지켜야 할 율법의 조문이었습니다.

예언자들은 이런 율법을 소중히 여기라고 끊임없이 강조했습니다.

그런데 이웃을 돌보는 삶의 방식을 외면한 채, 자기의 편리대로 율법을 왜곡하고,

책임을 회피하는 삶을 살면서 내 이웃은 누구입니까?”라고 질문했던 것입니다.

 

 

이에 대해 예수님께서는 강도 만난 자의 비유를 통하여 이웃이 누구인지를 알려 주십니다.

강도를 만나 상처 입고 쓰러져 있는 사람을 보고도 못 본 척 지나가는 제사장과 레위인,

그리고 그의 상처를 싸매주고, 여관에서 하룻밤을 같이 지내며 돌보아 준 사마리아 사람 중,

강도 만난 사람의 이웃은 누구인가?

이 질문은 지식 있는 율법학자가 아니라 어린아이라도 대답할 수 있는 질문이었습니다.

 

누가복음 10:34-35에 

 가까이 가서 그 상처에 올리브 기름과 포도주를 붓고 싸맨 다음에<응급처치>,

자기 짐승에 태워서 ,여관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었다.

다음 날<하룻 밤을 같이 지내며 돌봄>

그는 두 데나리온<하루 품삯이 5만원이면 10만원>을 꺼내어서 여관 주인에게 주고, 말하기를

'이 사람을 돌보아 주십시오, 비용이 더 들면<추가 비용>, 내가 돌아 오는 길에  갚겠습니다' 하였다.

 

여기 그들이 묵었던 여관이 이스라엘에 있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Eh5WyUtNvTE&index=11&list=PLQar9fCXfe9q35--xfFfMN0Nlgy2Ja-m0

11 여리고에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길의 지형  (시청 적극 추천함)

 

 

당시 사마리아 사람은 유대인들로부터 사람 취급을 받지 못했던 사람입니다.

하지만 아무런 대가를 바라지 않고 정성을 다 해 강도 만난 자를 도와준 사마리아 사람,

그가 진정한 이웃임에 틀림없습니다.

 

 

율법학자는 내 이웃은 누구입니까?”라고 물었습니다.

자기의 이웃이 누구냐고 묻고 있는 것입니다.

이 질문에 담긴 이웃자기중심적인 이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누구인가?라고 물으십니다.

이웃의 개념을 바꾸어 놓은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나 중심의 이웃을 찾으면 안 됩니다.

나의 친구, 나의 이웃, 나에게 도움을 줄 사람, 나를 돌봐줄 자만을 찾아서는 안 됩니다.

나 중심의 계산된 관계 속에서 이웃을 설정할 것이 아니라

섬김의 자리에서 나는 누구의 이웃이 되고 있는가?’를 물어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질문에 대해 자비를 베푼 자니이다라고 대답한 율법학자에게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너도 가서 그와 같이 하라

알았으니 실천하라는 것입니다.

 

만약, 우리가 우리보다 못한 사람을 도우면서 살면 이 세상은 어떻게 될까요?

그것이 바로 하나님이 원하는 세상이고, 하늘의 뜻이 이 땅에서 이루어지는 세상입니다.

 

 

이웃을 생각하는 삶,

그것 자체가 이미 복된 삶입니다.

인생을 어떻게 살 것인가?’ 라는 근본적인 물음 앞에

예수님께서는 이미 오래 전에 당신의 삶으로 그 해답을 보여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중심이 아니라 이웃중심으로 사는 삶이 얼마나 귀한 것인지,

또 어떻게 섬기고 사랑해야 하는지를 몸소 실천해 보여주셨습니다.

 

2015.12.22(화) 02:05

이우길 집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