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이 가르쳐 주신 기도 해설 요약
----------- <예가기도> ---------------
1. 서언
예수께서 가르쳐주신 기도를 줄여서‘예가기도’라 부른다.
그 이유는‘주기도’는 주님이 하신 기도라는 의미도 갖고 있기 때문에 적합한 용어가 되지 못하며
예수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의 약어로 이렇게 부른다.
‘예가기도’는 십계명 및 사도신경과 더불어
기독교인의 생활을 지도하는 세 가지 지침 중의 하나이다.
이 기도는 내용이 요약적이며,
신적인 것과 인간적인 것이 모두 포함되어 있고,
또한 이것은 복음의 대요이며 신학의 본체이고 생활 전반의 열쇠이다.
‘예가기도’는 먼저 호칭에 해당되는‘하늘의 존재’와‘우리 아버지’의 개념이 정리되고
간구의 내용으로는 여섯 가지로 나누어 설명된다.
여섯 간구 중 전반 세 간구는 하나님에 관한 것이며 후반 세 간구는‘우리’에 관한 것이다.
전자는 하나님의 이름, 하나님 나라, 하나님의 뜻에 관한 간청이며
후자는 일용할 양식, 죄용서, 악에서 구원해 달라는 것이다.
이같이 신에 관한 것과 인간에 관한 청원이 끝나면
자연스럽게 하나님의 영원한 주권에 대한 찬양이 뒤따른다.
2. '예가기도'와 초대교회
초대교회의‘예가기도’사용에 관한 정보를 아는 것은
그 기도에 관한 우리의 태도를 더 신중하게 함으로 중요하다.
첫 번째 자료는
A.D. 1세기의 것으로 추정되는 디다케(Didache)이다.
이것은 12사도의 교훈으로 불리기도 하는데,
일종의 가장 오래된 교회의 규칙이라 할 수 있다.
‘예가기도’는 다다케 8장 2절에 문자대로 인용되어 있으며
인용 전 가벼운 경고를 적고 있다.
디다케 8장 2, 3절에서 알 수 있는 것은
‘예가기도’가 고대교회의 기도생활에 정규적으로 사용되었다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오전 9시,오후 3시,해진 후에 드린 정해진 기도에
‘예가기도’가 포함된 것으로 보여진다.
당시‘예가기도’를 드릴 수 있는 것은
세례 받은 신자에게 주어진 특권임과 동시에 교회의 소중한 보배로 취급되어야 함을 시사한다고 본다.
둘째로 중요한 자료는
A.D. 350년 사순절과 부활절 사이에 예루살렘 성묘교회에서 행해진 시릴(Cyril)의
“24편 교리문답강의”이다.
그 마지막 편(24편)은 성찬예배 때 드리는 기도문을 해석하고 있는데
‘예가기도’는 바로 여기에 속해 있다.
이것이 예레미아스에 의해서 예가기도가 예배 안에서 규칙적으로 사용되었던 가장 이른 증거라 한다.
‘예가기도’는
첫째, 제자들의 요구에 의해 주어진 모범기도가 초대교회 신자들의 기도생활에 규칙적으로 사용되었다.
둘째는 시릴이 살았던 시기에 이것이 성찬예배의 한 중요한 순서가 되었다.
셋째는, 적어도 초대교회 시대에 예가기도는 세례를 받은 자들만이 드릴 수 있었다.
그러나 나중에는 교회의 모든 회원들을 위한 기도가 되었다.
그리고 그들은 경건과 경외심으로 이 기도를 드리려고 했다.
3. 두 본문의 배경
마태는 유대인들을 상대로 복음서를 기술하면서,
예수님의 족장계와 왕계를 타고 오시는 메시야이시며 세계와 사람을 통치하시는 왕이심을 밝히고 있다.
왕으로 오신 예수님은 하늘나라를 전파하시며,
제자들에게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가져야 할 하나님 나라의 윤리를 사역 초기부터 말씀하셨다.
우리의 기도는 은밀한 것이 되어야 하며 중언부언하지 않는 진실하며 마음을 쏟는 기도가 되어야 한다.
이것은 곧 기도자의 기본 자세이며 기도의 본질적 요소라고 할 수 있다.
예수님은 바로 이런 것에 부응하는 하나의 샘플로 이 기도를 가르치신 것이다.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마6:9).
이 구절은 앞,뒤 문맥을 잘 연결시켜 주는 고리 역할을 하며
어떤 형식과 내용의 기도가 하나님께서 열납하시는 기도인가를 보여주는 문구이기도 하다.
누가의 ‘예가기도’는 마태의 것과 문맥 및 그 내용에 있어서 차이가 있다.
마태와는 달리 누가는‘예가기도’(눅 11:2-4) 앞 부분 즉 눅 10장의 내용이 기도에 관한 것이 아니며,
또한 자연스러운 상태에서 예수님이 그의 제자들에게 가르친 기도가 아닌,
제자들의 요청에 의해 주어진 것임을 시사한다.
눅 11:1절은 마태복음의 것과 현저한 차이를 보인다.
“예수께서 한 곳에서 기도하시고 마치시매 제자 중 하나가 여짜오되
주여, 요한이 자기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친 것과 같이 우리에게도 가르쳐 주옵소서”
마태는 제자들의 요청없이 예수님이 스스로 그 기도를 가르치셨다고 기록하나
누가는 제자들의 요청에 따라 그 기도를 가르쳤다는 기록을 남김으로
‘예가기도’의 유래와 동기를 서로 달리한다.
두 본문의 문맥(그리고 내용)이 서로 다르다 할지라도
‘예가기도’가 서로 다른 장소에서 두 번씩 말해진 것으로 볼 수 없고, 다만 편집의 문제로 여겨진다.
두 본문에 있어서 누가의 것은 마태의 것보다 더 짧으며
반대로 그 뒤에 이어지는 관련 기사는 마태의 것보다 훨씬 길다.
누가복음에서 ‘예가기도’에 이어지는 내용 중에서 눅 11:5-8절은 끈질기게 기도할 것을,
9-10절에서는 기도할 것을 명령함과 더불어 응답을 보장하고,
마지막 11-13절은 예를 들어 말함으로 그 약속을 확신하게 한다.
*두 본문(마6:9-13, 눅11:2-4)의 차이점
본문 | 마태복음 6장 9-13절 | 누가복음 11장 2-4절 |
동기 | 예수님이 스스로 가르치심 | 제자들의 요청에 따라 가르치심 |
내용 | -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 - 아버지여 |
-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 -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 |
- 나라이 임하옵시며 | - 나라이 임하옵시며 | |
-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
||
-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
-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
|
-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
-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모든 사람을 용서하오니 우리 죄도 사하여 주옵시고 |
|
-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 |
-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소서 |
|
-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
||
- 아멘 | ||
길이 | 전 본문이 길다(7절) | 전 본문이 짧다(3절) |
문맥 | - 예가기도 전 기도에 관한 교훈이 나오고 후에는 없다. |
- 예가기도 전 기도에 관한 교훈이 없으나 예가기도 후 그 교훈이 있다 (하지만 마태복음 6장 5-8절의 것과는 그 내용이 다르다). |
4. '예가기도'의 내용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에서
‘아버지’는 헬라어이고 이것의 아람어 형태인‘아바'는
아이들이 아버지를 부르는 소리같은 일반화된 호칭이다.
신을 아버지로 즉 모든 존재의 창조자로 부른 것은
옛날 근동에서 이미 기원전 20-30세기 경에 나타난 것이다.
아버지를 거룩하신 하나님께 당당히 적용될 수 있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용서와 은혜 때문이다.
인간이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 부를 수 있는 것은
성령에 의해서 또는 성령 안에서 되는 일이다.
“하나님은 무한히 위대하시며,
하나님의 본질은 우리의 인식을 초월해 있고,
하나님의 능력은 끝이 없으며,
하나님은 영원히 썩지 않으시는 분”이라는 뜻이다.
우리의 주의를 환기시키는 또 다른 한 가지는 “우리 아버지”이다.
내가 하나님의 자녀로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를 수 있을 때,
그때는 이미‘내’가 아닌‘우리’가 된다.
다시 말해 하나님을 가리켜 “우리 아버지여”라고 부를 때
우리가 서로의 형제, 자매임을 상기시켜 주는 것이다.
나의 아버지만이 아닌 우리의 아버지를 부르는 것이며,
나의 간구만이 아닌 형제, 자매의 필요를 간구하는 것이다.
또한 교회 밖의 사람들도‘우리’안에 포함되도록 열망하는 기도이다.
그리고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에서 기도는 오직 하나님께만 드려야 함을 가르친다.
기도의 대상에 있어서 주기도는 성부 하나님만 제시하는데 그렇다면 성자와 성령께도 기도할 수 있는가?
비록 ‘예가기도’에서는 아버지만 언급 되었지만 다른 두 위께도 제외된 것은 아니다.
성경은 성자께 기도할 수 있다고 가르친다.(마 11:28, 요 14:14, 행 7:59) 등.
기도는 성부뿐 아니라 성자에게도 드려질 수 있음을 가르친다.
성자는 기도의 대상일 뿐 아니라 우리 기도의 응답자이시며 우리를 위한 중보자이시다(롬 8:34).
성령이 기도의 대상이라는 직접적인 성경 구절은 없다.
2) 간구(Petitions)
'예가기도‘의 기본 골격인 부름, 간구, 송영에서 그 중심 부분(내용)을 차지한 것이 간구인데
여기에는 하나님에 관한 간구와 우리에 관한 간구가 있다.
* 하나님에 관한 기원
①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hallowed be thy name)
- 이것은 하나님 스스로가 거룩하게 하시라는 것이 아니라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도록 인간이 하나님의 이름에 합당한 영광을 돌리며, 거룩하도록 해야 한다.
비록 그 이름이 세상에서는 무참히 짓밟히고 있으나
신자들의 생활 중 특히, 기도 중에라도 그 이름이 높여지며 숭경될 것을
‘예가기도’는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하나님의 그 이름을 거룩하게 하는 주체가 인간이지만
인간 스스로의 힘과 능력으로 그렇게 하겠다는 의지의 표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그렇게 할 수 있도록 해 달라는 하나님께 대한 기원이다.
② 나라이 임하옵시며(by Kingdom come)
- 마태가 유대인을 상대로 사용하는‘하늘나라’와
기타 복음서 기자들이 이방인을 대상으로 쓴‘하나님(의) 나라’는 동일한 뜻의 다른 표현이다.
이외에도‘천국’이나‘당신의 나라’그리고‘아버지의 나라’도 마찬가지로 동의어로 볼 수 있다.
구약에 유사한 표현인'여호와의 나라’가 1회 나타난다(대상 28:5)
‘예가기도’의 두 번째 청원은 하나님의 통치가 이 땅에 지금,
현재적으로 실현되게 해 달라는 기도임과 동시에
미래에 궁극적으로 완성되게 해 달라는 기원이다.
기도자는 이미 임한, 존재하는 하나님의 통치를 받기 위해 기도하는 것이다.
죄, 불법, 사단의 쇠사슬에 묶여있는 자들이 그리스도를 통해 참 자유를 얻고 하나님의 나라의 백성이 되어, 그들을 통하여 온 누리에 하나님의 주권이 미치며 하나님과의 온전한 교통이 있고
하나님의 다스림이 이루어지기를 비는 선교적 청원이다.
기도를 하는 곳은 어디나 천국인 것이다.
③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Thy will be on earth, as in heaven)
- 하나님에 관한 세 번째 기원인 이것은 누가복음에는 없는 내용이다.
마태복음에만 나타난다는 사실은
앞의 두 간구와 근본적으로 의미가 같거나 종속된 것임을 암시한다.
“뜻이... 이루어지이다’라는 기도는
하나님께서 무엇을 허락하시든지, 허락하여 주시지 않든지
불평 없이 그것을 받아들이는 온유한 자세를 의미하고
후자는 우리가 하나님께 우리의 해야 할 바가 무엇인지를 가르쳐 주시기를 간구하고
우리로 하여금 그 일을 원하고 또 할 수 있는 능력을 갖게 해 달라 것”이라는 것이다(Packer).
‘예가기도’에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어떤 기도를 요구하는 것인가?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이것은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을 우리의 역사(歷史)안에서 구체적으로 이루어 가시라는 기도이다.
이것은 하늘의 존재들처럼 우리를 성화시켜 가시라는 기도이다.
이것은 하늘의 천사들이 하늘에서 100%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듯 우리를 그렇게 만들어 가시라는 기도이다.
이것은 하늘의 영적존재들이 하나님을 찬양하며 승경하듯 우리를 그렇게 다듬어 가시라는 기도이다.
이 기도는 하나님으로 하여금 나의 뜻을 이루게 하려는 것이 아니라
나의 뜻을 하나님의 뜻에 일치시키려는 것이다.(Packer)
2) 우리에 관한 기원
‘예가기도’의 앞부분 세 청원이 하나님에 관한 것인 반면 후반부의 세 청원은 인간의 필요에 관한 것들이다.
①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give us this day our daily bread)
- 이 구절의 의미를 충분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두 단어
즉,‘양식’(arton)과 ‘일용할’(evpiousion)을 적절히 해석해야 한다.
먼저 본문의“톤 알톤 휘몬”(our daily bread; 우리의 빵을)이 무엇을 뜻하는지를 알아 본다.
‘알톤’또는‘알토스’(arton or artos)를 영어에서는‘빵’(bread)으로,
한글성경에서는‘양식’으로 번역했다.
본문과 관련하여 좀 더 구체적인 해석을 몇 주석가들이 밝히고 있다.
J. Reiling and J. L. Swellengrebel은
본문의 ‘알토스’는 “우리가 오늘을 위해 필요한 양식”이라고 했고,
겔든휘스는
“이 지상에 존재하는 동안 인간이 실제로 필요로 하는 모든 것을 가리킨다.”라고 주석했으며,
헨드릭센도
“이 양식은 육체적인 삶을 영위하는데 필요한 모든 것을 가리킨다.”고 함으로
켈든휘스와 같은 생각을 피력했다.
이 같은 사실에서 알 수 있는 것은
본문의“양식”은 단순한“빵”이나“떡”,“쌀” 기타 음식을 말함이 아니라
“육체적 생활을 유지하기 위해 필요한 모든 것”을 의미한다.
이때의 양식을 단순히 육적 양식으로 보는 학자들도 있으나‘영적양식’으로 이해하며
종합적으로 ‘영육 간에 필요한 모든 것’을 말할 수 있다.
또한 이것은 내일(미래)을 위한 간구가 아니라 오늘을 위한 간청이며,
풍족하게 먹고 마실 것을 요청함이 아닌 하루하루의 생활에 필요한 최소한의 양식을 구하는 것이다.
이 같은 간구로 인해 우리는 매일 매일을 하나님의 은혜와 공급하심 속에 산다고 할 수 있으며
또한 하나님 나라 건설과 확장에 더욱 매진하기 위한 은혜의 배려를 간구함으로
하나님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는 사실을 확증한다.
②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For give us our debts, as we also have forgiven our debtors)
- 죄 용서에 관한 이 청원은 마태와 누가복음 사이에 그 내용상 차이를 보인다.
특별한 차이를 보이는 내용 중 하나는,‘죄’에 해당하는 헬라어 원문을 각각 다른 단어로 쓴 것이다.
마태는 죄를‘오페이레마타’(opeilemata)로,
누가는 죄에 대한 일반적인 용어인 ‘하마르티아’(hamartia)로 표기한다.
‘오페이레마타’는‘빚’을, 광의적으로‘의무’를 의미한다.
‘로우’와‘나이다,는
‘오패이레마토스’에 세 가지 뜻
즉‘빚’(debt),‘의무’(obligation),‘죄’(sin) 의 의미가 있다고 지적했다.
‘하마르티아’는
‘죄’를 나타내는 보편적인 헬라어로‘과녁에서 빗나갔다’
또는‘기준에 어긋나는 것’을 뜻하는 법적, 신학적 용어이다.
마태와 누가가 비록 다른 단어를 사용하여‘죄’를 나타내나 그 의미에는 차이가 없다.
다만 성경기자가 왜 다른 단어를 사용했느냐는 것이다.
마태는 유대인들에게 친숙한 단어의 개념(아람어 호바-빚, 죄)을 인용하여 빚을 말하고
누가는 비유대인들을 상대로 기록한 복음서임으로
그들에게 익숙한 ‘하마르티아’(죄)를 선택하여 사용했다는 것이다.
이 청원에서 오해의 소지가 있는 부분은
우리가 우리에게 잘 못한 사람의 죄를 용서해 줘야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죄를 용서 받을 수 있는 것처럼 생각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다른 사람에 대한 우리의 용서가 하나님 앞에서의 용서의 조건이 된다는 것이다.
결론부터 말한다면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용서 하는 것’보다 ‘하나님의 용서’가 우선한다.
언제나 하나님의 용서가 우리가 타인을 용서하는 용서의 근거가 된다.
‘적게 용서받은 자가 적게 용서하며 많이 용서 받은 자가 많이 용서하는’법이다.
‘우리가 먼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먼저 사랑하셨다’는
말씀을 여기에 적용시킬 수 있다.
하나님의 용서와 사랑이 먼저 나에게 임하셨으므로 그것을 근거로 이웃의 과실을 용서한다.
그리고 이 부분에 관한 가장 좋은 해석은
주님이 마태복음 18장 23-35절에서‘악한 종의 비유’로 말씀해 주셨다.
이 비유는
자기 힘으로 결코 청산할 수 없는 거대한 빚을 지고 있는 우리가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은혜로 용서 받았건만
이웃이 우리에게 잘못한 작은 허물을 용서하지 못하는 현실을 폭로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으로부터 큰 죄를 용서 받은 우리가 이웃의 죄를 당연히 용서해야 하며
그럴 때 또한 하나님께 용서를 빌 수 있는 것이다.
또한 본문은 보상적이며 조건적 기도를 제시하고 있지 않고
다만 원죄로부터 해방 받은 인간이 하나님 앞에 나올 때에 어떤 자세로 서야하는가를 강조한다.
마태의‘예가기도’본문에 ‘예가기도’의 일부 구절에 대한 유일한 해석이 덧붙여진 것이
“용서”에 관한 것이다.
“너희가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면 너희 천부께서도 너희 과실을 용서하시려니와
너희가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지 아니하면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과실을 용서하지 아니하시리라.
”(마 6:14-15)
③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
(lead us not into temptation but deliver us from evil)
- 이 기도는‘우리를 위한 기도’의 세 번째 청원이자 ‘예가기도’의 마지막 기원이다.
‘다만’(alla, but)이라는 접속사를 전후로
이 기도가 한가지이냐 아니면 두 가지이냐가 논란중의 하나이다.
12절과 13절은‘그리고’(kai)라는 접속사로 연결되어 있지만,
13절의 전후반은 ‘그러나’(but, 다만)로 연결된다.
본문에 있어서 중요한 단어는‘시험’과‘악’이다.
이 두 단어의 뜻을 밝히는 게 그리 쉽지 않지만 본문의 뜻을 찾기 위해 두 어휘를 고찰해 보지 않으면 안 된다. 시험에 해당하는 헬라어‘페이라스모스’의 뜻은 다양하다.
기본적으로 이 단어에는‘시험’(testing)과‘유혹’(temptation)의 뜻이 있다.
‘마귀는 우리를 내려가게 하기 위해서 시험하나 하나님은 우리를 오르게 하기 위해서 시험한다.’는
‘메이어’(F.B. Meyer)의 말은 시험의 성격과 그 목적을 잘 지적한 것이다.
그리고 어떤 상황에서든지 신자는 전 미래적인 시련에 빠지지 않게 해 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해야 한다.
‘예가기도’의 여섯 번째 청원은
예수님, 그의 제자들 그리고 현대를 사는 우리에게 단순히 형식적인 것이 아닌 진지하며 시급한 간청이다.
예수님은 육체를 입고 세상에 오신 그때부터 사단으로부터 오는 많은 시험과 위협을 받으셨다.
유대인들을 통해서, 심지어 베드로와 가룟 유다를 통해서도 그분은 시험을 받으셨다.
그러나 그분은 사단의 도전에 단 한 번도 양보하거나 타협하지 않으셨다.
시험에 승리하셨고 친히 모든 시험을 감당하셨다.
교회의 원수인 사단으로부터 시작되는 이 같은 시련과 시험은
예수님, 제자들, 그리고 초대교회에 이어 우리에게도 있다.
특히 세상과 타협 없이 주를 위해 헌신하는 자들에게
마귀는 다양하며 교묘한 방법으로 시험한다는 사실은 결코 위증이 아니다.
그러므로‘우리에게 시험이 없을 때 우리를 시험에 들지 말게 하옵시고’라고 기도하고
시험이 왔을 때는 악한 자에게서 구해 달라고 기도해야 한다.’(Packer)
3) 송영
① 대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For Thine is the Kingdom, and the power, and the glory, forever Amen)
-‘예가기도’를 연구하며 어려움을 겪는 한 부분이 마태복음의 송영이다.
마태복음 본문에서 송영이 있는 사본과 없는 것으로 나뉜다.
여기에서 알 수 있는 것은 시내산, 바티칸, 베자, 사본 등 권위가 있는 사본에는 송영이 없고
훨씬 후대의 것이며 소문자 사본들에는 송영이 있다는 것이다.
하너(Harner), 반스트라(Bandstra), 예레미아스(Jeremias) 그리고 군드리(Gundry)는
마태복음의 송영에 관하여 다음과 같은 공통된 의견을 가진다.
“영광송 없는 본문이 영광송 있는 본문보다 더 본래적인 형태이며
그리고 후대에 영광 송이 추가된 것은 교회 공동예배의 예전적 필요 때문이다.”
송영은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있다는 선언이며 승리의 찬송이다.
이것은 하나님과 관계된 기도와 인간에 관계된 기도의 모든 성취는 오직 하나님 아버지께 있다는 의미이다.
달리 말해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영원히 아버지의 것이므로
앞의 기도 내용이 분명히 이루어 질 줄 믿는다는 뜻이다.
디다케의 송영은 오늘날 우리가 흔히 쓰는 송영과 같지 않은,
“대개 권세와 영광이 영원히 아버지의 것이옵니다”로‘나라’가 빠져 있다.
혹자는 영광송이 예수님의 직접적인 가르침이 아님으로
‘예가기도’에서 삭제하고 마태의 원래 부분만으로 기도해야 한다고 주장하나,
초기 기독교인들이 송영 없이‘예가기도’를 하지 않은 것과
기도가 어떤 고정된 영광송으로 끝나야 하는 유대인들의 기도형태와 습관에 근거해 볼 때
제거할 필요는 없겠다.
이것은 찬양에서 찬양으로, 영광에서 영광으로 끝나는 기도가 된다.
이어 우리말 ‘대개’와 ‘있사옵나이다’의 바른 의미를 찾아본다.
‘대개’는 영어의 ‘for'에 해당하는 단어이다.
헬라어 ’호티‘는 이유를 설명하는 문장을 이끄는 접속사로서
영어의 'because'에 해당되나 영어성경은 ’for'로 번역했다.
'for'는 ‘because' 보다 조금 약한 이유를 나타내는 전치사,
본문에서 “이는..”의 의미로 사용되기 때문이다.(나채운)
‘있사옵나이다’는 헬라어‘에스틴’을 번역한 것으로‘...의 것입니다’라는 뜻이 있다.
이것을 ‘For'와 그리고 ’Thin Your'을 연결시켜 해석하면‘이는 ...당신의 것입니다’
또는 ‘이는 당신의 것이기 때문입니다’의 의미가 된다.
‘예가기도’는 찬양에서 찬양으로, 영광에서 영광으로 끝난다.
하나님은 세세 무궁토록 그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셔야 하며
그의 높고 위대하심이 찬양 받으셔야 한다.
성숙한 신자는 다음과 같이 외치기를 좋아한다.
“하나님께 영광을! 오직 하나님만이 이 영광을 받으시기에 합당하옵니다.”
② 아멘(Amen)
- ‘예가기도’는 아멘으로 끝난다.
히브리어에서 온 이 단어가 칠십인역(LXX)에서는 주로 ‘게노이토’로 번역되며
‘그렇게 되기를’,‘진실로’의 의미가 있다.
이것은 우리가 말한 모든 것이 진심이며 그대로 되기를 바란다는 사실을 최종적으로 고백하는 것이다.
* 아멘은 기독교 예배 안에서 예전적 환호이다.(대상 16:36, 고전 14:16, 계 5:14, 느 5:13,8:6)
* 기독교인의 기도와 송영(doxology)은 대부분 아멘으로 끝난다.
* 예수님이 공관복음서 안에서 그의 말씀 앞에 아멘을 두었다.(마태복음 30회, 마가 13회, 누가 6회)
5. '예가기도'가 주는 교훈
첫째, 예가기도는 간결하다.
이 기도는 말을 많이 하여야 들으실 줄 알았던 이교도들의 기도와 큰 차이가 난다.
중언부언하지 않았다. 원문에는 57 단어로 구성되었고
영어는 66 단어로(KJV) 한글로는 48 단어로 된 지극히 간단한 기도이다.
둘째, 예가기도는 내용이 포괄적이다.
짧은 문장이지만 그 기도 속에는 방대한 의미를 담고 있고, 심오하며 종합적이다.
여기에는 하나님의 모든 약속과 우리의 갖가지 소원이 몇 줄 안에 요약되어 있다.
‘주기도의 내용이 훌륭한 것은
그것의 포괄성, 명확성, 그리고 완전성 때문이다’
셋째, 예가기도는 하나님 중심의 기도이다.
모든 신자는 이방인과 같지 않게,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해야 한다(마6:33).
이 원리를 주님은 ‘예가기도’에서 보여 주셨는데,
즉 하나님의 이름, 나라, 뜻을 먼저 구할 것을 말씀하셨다.
먹고 마시는 인간의 필요를 구하기 전에 하나님을 위한 청원(Thou-petitions)이 우선 필요한 것은
기도가 하나님의 목적을 성취하며 그의 주권을 이 세상에 온전히 실현하는데 이바지해야 하기 때문이다.
분명 기도가 하나님의 구속사에 있어 필수불가결한 기능을 행사하기 때문에
먼저 그의 나라가 임하기를, 뜻이 이루어지기를 기도해야 한다.
또한 ‘예가기도’의 말미에도 ‘나라와 권능과 영광이 하나님의 것입니다’
라는 찬송으로 영광 돌림으로 이 기도가 하나님 중심의 기도임을 나타낸다.
예가기도는 ‘하나님으로부터 시작해서 하나님의 백성인 교회 공동체(We)에 이어
다시 하나님께로 드려지는 기도이다.’
다시 말해 하늘에서 땅으로, 땅에서 다시 하늘로 이어지는 범 우주적인 기도이다.
우리가 드리는 기도,
그것이 공적이든 사적이든 간에 중심과 목적은 하나님이어야 하며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는 것이 되어야 함을 ‘예가기도’는 교훈한다.
그래서 ‘예가기도’는 주님의 삶과 사역을 반사하는 것으로 이해해야 하며 고백해야 한다.
이 포괄적인 내용으로 기도함으로 주님의 사역을 회상하며,
또한 그것을 세상에 선포해야 할 것이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주님이 다시 오실 때까지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뜻을 간청해야 할 명령을 받고 있음을 알아, ‘예가기도’를 따라 하나님 중심의 기도를 올려야 한다.
넷째,‘나’의 기도가 아닌‘우리’의 기도이다.
‘예가기도’에 1인칭 단수가 쓰이지 않고 1인칭 복수‘우리’가 사용된 것은
이 기도가 자기중심적이거나 이기적인 기도가 아니라
나를 포함한 신앙 공동체(교회)의 기도가 되어야 함을 가르친다고 본다.
일용할 양식, 죄, 그리고 시험의 문제는 인류가 종말 때까지 세상에서 당면하게 되는 문제들이다.
그래서 이런 문제들을 위해 크리스천들은 끊임없이 기도해야 하는데,
우리의 문제로 자각하고 기도해야 한다.
2015.4.20
이우길집사 요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