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은 불고 싶은 데로 분다
여러분은 바람을 잡아 보셨습니까?
바람 잡는 말처럼 들릴지 모르겠지만,
한 번 생각해 볼만한 질문입니다.
바람을 잡을 방법이 없을까요?
왜 이 질문이 생각해 볼만한 가치가 있는가 하면,
예수님께서 성령을 바람에 비유하셨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 3장 8절을 보면,
니고데모와의 대화에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바람은 불고 싶은 대로 분다.
너는 그 소리는 듣지만,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는 모른다.
성령으로 태어난 사람은 다 이와 같다."
<표준 새번역 개정판>
헬라 말에서 ‘성령’을 의미하는 ‘프뉴마’는 ‘바람’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그러니까 이 말씀을 이렇게도 번역할 수 있습니다.
"성령은 불고 싶은 데로 분다.
너는 그 소리는 듣지만,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는 모른다.
성령으로 태어난 사람은 다 이와 같다.“
원문대로 번역하면, '불고 싶은 곳으로'이기 때문에
<표준 새번역 개정판>의 번역은 잘 못 되었고
<새번역 성경>의 번역이 원문대로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람을 잡는 법을 알면,
성령을 잡는 법도 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바람을 잡을 수 있을까요?
바람이 부는 언덕에 올라가서,
허공에 팔을 내밀고 손을 폈다가,
손바닥에 바람이 느껴지면,
재빠르게 손을 움켜쥡니다.
바람을 잡았습니까? 아닙니다.
손을 움켜쥠으로 인해 오히려 바람을 밀어내는 결과가 되었습니다.
주먹 안에는 아무 것도 없습니다.
손바닥을 스치던 바람은 조롱하듯 움켜쥔 주먹을 쓰다듬고 지나갑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면 될까요?
이 대목에서 러시아의 문호 톨스토이가 사용했던 비유가 생각납니다.
그는 인간의 이성으로 하나님을 이해하려는 노력을,
그물로 바닷물을 담는 노력에 비유했습니다.
그물을 바닷물에 던져 놓았다가,
그물 안에 담겨있는 바닷물을 잡으려고 끌어 올립니다.
하지만 그물이 끌어올려지는 순간,
바닷물은 다 빠져 나가고 맙니다.
그러면 어떻게 할까요?
톨스토이는 그물을 바닷물에 담가놓는 수밖에 없다고 답합니다.
바닷물을 잡으려 하지 말고,
그냥 바닷물 안에 담가 놓으면,
그물 안과 밖에 바닷물이 그득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 비유를 사용하면서 톨스토이는,
이성으로 하나님을 포착하려고 할 것이 아니라,
전(全) 존재로써 하나님의 임재에 자신을 노출 시킬 것을 권합니다.
그것만이 하나님을 경험하는 유일한 길이라는 것입니다.
성령을 잡는 것도 이와 같습니다.
바람처럼, 성령께서는 언제나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그러므로 성령을 잡을 방법도 없지만,
성령을 잡아 둘 이유도 없습니다.
그분은 언제나 우리 곁에, 우리 앞에, 우리 뒤에, 우리 위에 그리고 우리 안에 계십니다.
따라서 늘 성령과 동행하기 위해서, 우리는 성령을 잡아 두려 할 것이 아니라,
그분께 우리 자신을 항상 노출시키는 법을 배워야 한다는 결론입니다.
우리는 바람이 부는 것을 소리로 들어서 알지만,
또는 나무가 흔들리는 일 등을 통해서 바람이 분다는 것을 알지만
바람을 볼 수도 없고 바람이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도 모릅니다.
바람은 자기가 불고 싶은 곳으로 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성령의 작용이라는 초자연적인 일도 간접적으로 느낄 수도 있고 알 수도 있지만,
쉽게 설명할 수 없고 쉽게 이해되지도 않는 신비스러운 일입니다.
바람으로 인해 생기는 결과들을 모든 사람이 명백하게 보기는 하지만,
바람의 정체에 관한 모든 것을 알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또한 바람은 언제든지 그것이 원하는 곳으로 붑니다.
사람의 요청에 의해 세기를 조절하거나 방향을 바꾸는 법은 없습니다.
사람은 아무도 바람을 다스리지 못합니다.
성령 하나님께서는 당신이 하시고 싶은 대로 하시는 것이지
사람에 의해 좌지우지 될 수 있는 분이 아니십니다.
앉으면 눕고 싶고 누우면 자고 싶은, 불완전하고 나약한 인간 본성으로는
자력 구원이 불가능하고 하나님께로 도무지 갈 수 없기에,
이러한 인간 본성을 초월하는 초성(超性) 생활을 하려면,
성령 하나님의 은총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입니다.
바람이라는 이 땅의 것을 예로 들어 가시적인 것을 설명하는데도 못 알아 듣는 너희가
거듭남이라는 것이 어디서부터 기원된 것이며, 언제 계획된 것이며,
어떠한 능력으로 주어지게 되는 것인지에 관한 하늘의 것을 설명해 준들
너희가 알아듣겠는가? 라고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우리의 삶은 바람과 같습니다.
바람은 불고 싶은 데로 붑니다.
바람을 조절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사람이 아닐 것입니다.
바람은 성령입니다.
우리가 성령의 몸이라고 한다면
우리도 바람의 몸으로 하나님의 손길 속에서 불고 싶은 대로 사는 것이
참 생명을 얻는 것입니다.
바람(성령)은 하나님의 손길로써 피조물에 생명을 줍니다.
바람은 우리 눈에 보이지 않지만
소리를 통해 그리고 그 결과에 의해 그 참된 모습을 보여줍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성령의 존재
또한 거듭난 사람의 구체적 행실에서 드러나는
여러 가지 변화들을 통해 인식되어질 수 있습니다.
바람이 성령이라는 말은 바로 결실에서 알게 됩니다.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들의 행위에 대해서
평범한 이성으로써 이해할 수 없고
다만 성령의 역사에 의한 결과만을 알 수 있을 뿐인 것입니다.
실제로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변화된 사람은
이전의 죄악된 습성들을 자연히 버리게 되며
갈라 5,22-23에 기록된 바와 같은 소위 '성령의 열매'를 맺게 됩니다.
현대의 과학을 총동원해도
바람이 어디서 생겨나 어디로 향하는지를 정확히 규정하지 못합니다.
아무리 기상대에서 태풍의 방향을 예측한다 하더라도
바람은 결국 불고 싶은 데로 자유롭게 붑니다.
이와 같이 영으로 새로 태어난 사람의 삶은
더 이상 육신의 틀에 박힌 삶이 아닙니다.
그는 성령 안에서 진정한 자유와 구원을 누리게 됩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성령의 역사 또한 인간의 능력으로는 그 기원을 헤아릴 수 없으며
다만 우리는 믿음으로 성령께서 곧 하나님과 동등한 분이며
우리의 구원을 위해 역사하시는 분임을 알 따름이다.
바람이 위에서 아래로 불어오듯
우리의 생명도 우리의 믿음도 우리의 삶도 눈에 보이는 것에 한계를 벗어나야 합니다.
“너희는 위로부터 태어나야 한다”라는 말씀처럼 우리의 삶은 하늘에서 시작되었고,
주님의 손길에 있다면 어려움도, 불행도, 지금의 지침도 용기와 희망
그리고 기쁨을 갖고 살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손길인 바람처럼
성령의 움직임으로 살아간다는 것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2014.9.13.(토) 오후4시
이우길 집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