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죽부대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본문(눅5:17-26)은 예수님께서 레위라는 사람을 제자로 부르신 기사입니다.
레위의 직업은 세관 직원이었습니다.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어야 한다는 것이 많은 사람들에게 잘못 오해되어오곤 했습니다.
마치 새로운 세대와 옛 세대의 인물교체 정도나 새로운 제도 개혁의 뜻으로
오해를 해서 정치하는 이들도 사용하곤 했습니다.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라는 의미를 바로 알기 위해서는
우리가 주님께서 이 말씀을 주신 동기 곧 이 말씀의 문맥을 잘 살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세리 마태의 집에 가셔서 음식을 잡수실 때에
어찌하여 죄인들과 함께 먹고 마시는가 하고 비난을 했습니다.
그리고 연이어서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새인의 제자들도 자주 금식을 하는데
왜 예수님의 제자들은 금식하지 아니하고 먹고 마시느냐? 는 일련의 질문공세를 받게 됩니다.
이런 질문 공세에 대한 답변으로 오늘 이 비유가 주어졌습니다.
실제적으로 새 옷에서 옷 조각을 한 조각 찢어 내어 낡은 옷에 붙이면
새 옷 자체를 버리게 되는 것은 물론이고
그 낡은 옷을 빨 때 새 옷 조각이 줄어들면서 낡은 옷을 잡아 당겨서 뜯기게 되고 맙니다.
또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으라고 했는데
이것은 고대 사람들이 자주 액체를 이용하는 방법이기도 하였습니다.
동물을 잡은 후에 머리 부분과 다리 부분을 모두 잘라내고
그 가죽을 벗긴 다음 털이 나있는 부분을 바깥으로 하고
목 부분을 제외한 모든 구멍을 꿰맨 다음 가죽에서 기름기를 제거하고
일정기간 손질해서 사용을 하였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가죽 부대를 오랜 동안 사용하게 되면 주름이 잡히고
그 탄력성이 상실하게 된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발효성이 강한 새 포도주를 이미 탄력성이 사라진 가죽부대에 넣으면
새 포도주가 발효하면서 발생하는 가스로 인해 가죽 부대가 터지고 포도주도 버리고
가죽부대도 못쓰게 되는 결과를 초래합니다.
그래서 새 포도주는 탄력성이 강한 새 부대에 넣어야 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1. 먼저 이 새 포도주는 무엇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어떤 사람은 이 새 포도주를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천국 백성들에게 주어진 성령이라고 말하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예수님께서 오셔서 주시는 교훈이라고 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 무엇보다도 이 새 포도주는 예수님 자신입니다.
당시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자기들이 이미 가지고 있던 부대에다가 넣으려고 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새 포도주와 같습니다.
그 분이 가는 곳마다 엄청난 변화의 장이 열립니다.
마치 새 포도주가 계속 발효하면서 가죽부대를 팽창시키는 것처럼
예수님이 가는 곳곳마다 변화가 일어납니다.
병든 자가 일어났습니다.
죽은 자도 살아납니다.
고기를 잡던 어부들이 사람을 낚는 어부로 바뀌게 됩니다.
그러나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예수님이 가시는 곳에서는 근본적인 변화가 일어나는 것이었습니다.
죄에 매어 있던 인생들이었습니다.
영적으로 이미 죽어있던 자들이었습니다.
도무지 회생이 불가능한 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이 살아나는 역사가 일어 난 것입니다.
죽은 시체는 관속에 묶어둘 수 있지만 살아있는 사람을 관속에 넣어 둘 수 없는 것입니다.
살아 움직이는 것을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의 낡은 가죽 부대에 넣어 둘 수가 없는 법입니다.
예수님이 한 개인에게 들어갈 때 그곳에 생명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예수님께서 한 가정에 들어가면 그 가정을 변화시킵니다.
정말 예수님이 그 마음속에 계시는 자는 변화를 그 속에서부터 일으킵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의 삶의 틀(Life style)까지 바꾸어 버립니다.
낡은 가죽 부대를 터트려 버리는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의 비유를 근거로 생각해 볼 때,
과연 우리 안에 새 포도주가 있느냐는 것입니다.
아니면 시고 냄새 나는 묵은 포도주!
오늘 39절에서 말씀하시는 것처럼
그저 묵은 포도주가 좋다고 하는 그 시대에 어리석은 사람들과 같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싱싱한 포도에서 생기는 새 포도주!
계속해서 발효하여 마시는 자에게 새로운 생기를 돋궈주는 새 포도주가 우리 안에 있어야 합니다.
어떤 사람은 예수님을 과거부터 자기 집을 지켜주던 조상신과
자리바꿈만 하는 정도로 모시고 사는 사람이 있습니다.
결국 예수님은 묵은 포도주로 끝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진정으로 모신 사람들은 놀라운 변화의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진정한 기쁨을 놓쳐버린 자들에게 참 기쁨, 샘솟는 기쁨, 영원한 기쁨을 가져 다 줍니다.
모든 삶이 예수님의 지배를 받습니다.
주님의 교훈을 따라 살아갑니다.
성령의 인도를 따라 살아갑니다.
그 분의 뒤를 따라 살아갑니다.
곧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고 가는 길입니다.
우리 주님은 결코 변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변함이 없으신 분”이십니다.
그러나 그 주님은 변화를 초래합니다.
복음은 불변하지만 그 복음은 가는 곳곳마다 그 사람을 변화시키고
그 지역을 변화시키고 그 사람의 스타일을 변화시킵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새 포도주보다는 낡은 포도주,
인간들이 만들어 놓은 전통이나 잘못된 사상으로 가죽부대에 채웁니다.
그러므로 전혀 발효가 일어나지 않습니다.
이제 새 포도주인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우리 속에서부터 놀랍게 변화의 역사가 일어나도록 해야 합니다.
2. 새 부대는 무엇입니까?
예수님께서 당시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에게 낡은 부대를 말하는 것은
바로 그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의 계율, 틀을 의미했습니다.
이미 가지고 있던 낡고 굳은 관념을 가지고 주님의 뜻을 거부합니다.
그들은 날짜를 정해 놓고 금식을 했습니다.
자기들 나름대로 규율을 정해놓고 그 틀 안에 들어오지 않을 때 정죄를 쉽게 했습니다.
어떤 사람은 지난 날에 잘 믿었다고 하는 그 옛날 시절의 체험담을 가지고
다른 사람들을 판단하는 일에만 급급합니다.
영적인 향수병에 걸려서,
여전히 헌 낡은 가죽부대를 가지고 있으면서
새 포도주가 들어오는 것을 거절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형식적인 종교생활, 금욕주의, 외식주의, 체면주의, 신비주의, 의식주의 등의
모든 낡은 가죽부대를 벗어버려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자유로운 영의 지배보다는 율법주의 고정관념에 매어 사는 사람들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성경에서 한 면만을 잡고서 다른 부분을 공격하는 자세를 가지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하나님을 좀 더 바르게 섬기기 위해 만들어 놓는 틀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인간이 만들어 놓은 틀을 어긴다고 정죄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주님이 만들어 놓은 틀이 있습니다.
그것은 결코 변경되어서는 안 됩니다.
사람들은 주님께서 만드신 틀은 바꾸기를 좋아하면서 자기들이 만들어 놓은 틀을 바꾸려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경이 가는 곳까지 가고 성경이 멈추는 데서 멈추어야 합니다.
우리 주님을 자기들의 틀에다가 가두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 주님이 오히려 우리의 틀을 바꾸어 나가셔야 합니다.
주님을 모시고 사는 성도는 자기가 가지고 있는 고정관념이나,
사람이 만들어 놓은 법칙에 매어 있는 것이 아니라,
항상 주님의 시점에서 무엇을 원하시는가를 살펴야 합니다.
그리스도를 모시는 가죽부대!
새 포도주가 발효되어도 담아둘 수 있는 새 부대를 가져야 합니다.
오늘 우리는 이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어야 한다는 예수님의 비유를 살펴보면서
과거에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에게 주신 그 교훈
그리고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주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2014.9.11
이우길 집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