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리아 앞의 예수의 손과 발을 보라, 그리고 이종사촌 동생 요한을 보라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와 사도요한의 어머니 살로메는 자매인 것같음)
<1987년 유럽여행 중 '파리'시내에서 구입한 우편엽서 카드임>
‘고난과 순종의 여인’ 마리아
예수님의 십자가 곁에 선 어머니 마리아의 심정이 어떠했을까요?
4복음서 어디에도 그녀의 심정은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아들을 죽이지 말라고 울부짖었다거나
예수님께 다가가려다가 군인들에게 저지당했다는 묘사는 전혀 없습니다.
보통 어머니 같았으면 아들을 살리기 위해
빌라도 총독이나 분봉왕 헤롯, 혹은 대제사장을 찾아가
“내 아들이 그리스도니 유대인의 왕이니 운운한 것은 정신병자였기 때문”이라고
거짓 증언을 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는 그런 구명운동도 일체 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이 이스라엘의 구원자로 오신 것(마 1:21)을 알았기 때문에
성모 마리아답게 십자가를 지켰습니다.
극심한 슬픔 가운데에서 하염없이 눈물을 쏟으면서도
의연하게 서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녀의 당시 심경은 일찍이 시므온이 예언하였습니다.
" 34.시므온이 그들에게 축복하고 그의 어머니 마리아에게 말하여 이르되
보라 이는 이스라엘 중 많은 사람을 패하거나 흥하게 하며
비방을 받는 표적이 되기 위하여 세움을 받았고
35.또 칼이 네 마음을 찌르듯 하리니
이는 여러 사람의 마음의 생각을 드러내려 함이니라 하더라 (눅 2:34-35) "
예수의 부모가 마리아의 산후 정결예식과 맏아들 예수의 헌아식을 치르기 위해
예루살렘에 올라와 성전에 들어갔을 때
오직 메시아를 보는 사명 하나만으로 살고 있던 시므온이 마리아에게 한 말인데
장차 아들 예수로 인하여 “칼이 네 마음을 찌르듯 하리라" 는 것이었습니다.
지금 십자가 곁에 선 마리아의 심경은
바로 자기 심장이 날카로운 칼에 찔리는 것 같은 심경이었습니다.
십자가에 못박힌 두 손을 잡고 십자가에 못박힌 두 발로 걸음마를 시켰던
마리아의 심정이 어떠했겠습니까 ! ! ! ! ! ! ! ! ! ! !
마리아의 산후 정결예식은 예수님 생후 40일에 있었던 일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예수님의 부모가 율법을 준수하는 경건한 부모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요셉은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족보에 나오는 왕손, 즉 ‘다윗의 자손’입니다.
그뿐 아니라 요셉은 ‘주의 사자’에게서,
마리아는 ‘천사 가브리엘’에게서 마리아가 동정녀로 잉태한 아이가
장차 이스라엘의 구원자가 되리라는 놀라운 이야기를 각각 들었던 만큼(마 1:18-25; 눅 1:26-38),
두 사람은 예수님을 양육하면서 각별히 경건생활에 힘을 썼을 것입니다.
요셉과 마리아 두 사람 다 예수님의 효도를 받을 만한 분들이었습니다.
두 사람의 경건생활을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먼저 예수님이 태어난지 팔일 만에 할례를 행하고,
40일 만에 정결예식을 행하였으며,
유월절이면 예루살렘 성전으로 올라갔습니다.
성경에는 기록되지 않았지만
안식일에는 나사렛 근처 회당에도 나가 말씀을 듣고 하나님을 예배했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는 고난의 여인이요, 순종의 여인이었습니다.
그녀의 인생은 수난의 연속이었고,
예수님은 그 점을 너무나도 잘 아셨기 때문에
그녀가 남은 생애 동안 사도 요한의 돌봄을 받으며
지내도록 특별히 배려하셨을 것입니다.
결혼도 하기 전에 성령으로 메시아를 잉태하여 너무나도 놀랐을 뿐 아니라
그로 인하여 약혼자의 의심을 받았고,
그 메시아를 여행 중에 마굿간에서 출산하였으며,
헤롯의 살해 위협을 피해 애굽으로 피난가야 했던 난민이었고
그 기간 베들레헴에 있는 두 살 아래 아기들이 다 살해당했다는 소식을 듣고
또 한 번 크나큰 충격에 빠졌으며,
나사렛이라는 가난한 동네에서 과부로 지냈으며,
예수님의 공생애 사역 기간에도 예수님을 둘러싼 숱한 오해와 비난으로 마음 편할 날이 없었고,
마침내는 장남인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혀 죽는 것까지 지켜봐야 했습니다.
한 마디로 인고(忍苦)의 세월이었습니다.
그랬기에 하나님은 그녀에게 보통 사람 이상의 특별한 은혜를 부어주셨습니다(눅1:28, 30).
그런 어머니를 예수님은 긍휼히 여기시고 자신을 대신하여 돌보아 줄 것을
제자 요한에게 마지막으로 당부하였던 것입니다.
요한을 선택하여 어머니를 맡기신 이유
26절을 보면 예수님이 자신의 어머니와 그 곁에 서 있는 사랑하시는 제자를 보시고,
어머니에게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이어서 27절을 보면 예수님은 그 제자에게 “보라 네 어머니라.”고 말씀하셨고,
그 시각부터 그 제자가 주님의 어머니를 자기 집에 모셨다고 되어 있습니다.
제자의 이름은 요한복음에 나와 있지 않지만
우리는 그가 요한복음의 저자인 ‘사랑의 사도’ 요한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사도요한은 요한복음에서 자신을 가리킬 때 ‘그(예수님)가 사랑하시는 자’라는 표현을 사용하였습니다.
예수의 제자 중 하나 곧 그가 사랑하시는 자가 예수의 품에 의지하여 누웠는지라 (요 13:23)
사도 요한을 제외하면
남자 제자들은 아무도 십자가 곁에 없었는데 그들은 다 어디로 간 것일까요?
마태복음 26장 56절을 보면 예수님이 잡히시던 날 밤 제자들은 그 체포 현장에서 다 도망갔으니
성경은 “이에 제자들이 다 예수를 버리고 도망하니라”고 기록합니다.
요한복음 16장 32절을 보면 예수님은 진작 제자들에게
“보라 너희가 다 각각 제 곳으로 흩어지고 나를 혼자 둘 때가 오나니……”라고 예언하셨는데
그 예언의 말씀대로 실망감과 두려움에 다 도망 가버린 것입니다.
남자들이 여자만 못했습니다.
다만 모든 제자가 도망갔는데 그 중 ‘사랑의 사도’ 요한만은
다시 나타나 십자가 곁에서 주님의 임종을 지켜보았습니다.
요한이 그나마 남자의 체면을 세워주었습니다.
제자도의 관점에서 볼 때 예수님의 제자들의 성장과정은 더뎠습니다.
마가복음 16장 10절과 11절을 보면 막달라 마리아가 부활 예수님을 만나고 나서
제자들에게 그것을 알렸지만 “그들은 예수께서 살아나셨다는 것과
마리아에게 보이셨다는 것을 듣고도 믿지 않았다"고 합니다.
오순절 성령강림 후에야 그들은 비로소 주님의 살아있는 제자로 회복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참 제자로 성장하고 성숙하는 것은
인간의 노력으로 되는 것이 아니고 성령의 일하심으로만 가능한 것임을 우리는 여기서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멈추자 제자들도 주님을 배신하였지만 하나님의 은혜가 재가동되자
그렇게 배신했던 제자들이 용사가 되어 돌아왔고,
그 후에는 끝까지 배신하지 않고 순교하며 박해를 견딘 것입니다.
예수님이 어머니 마리아의 노후를 책임질 사람으로 요한을 선택한 것은
그야말로 탁월한 선택이었습니다.
요한은 열두 제자 중에서 예수님이 특별히 사랑하시던 제자였고,
요한 역시 예수님을 다른 어떤 제자보다도 마음 깊숙한 곳에서 우러나오는 사랑으로 사랑하였던 제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이 돌아가신지 30년 후에
예수님의 영광스러운 계시를 받아 요한계시록을 기록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에게도 요한은 동생인 살로메의 아들이기 때문에
친아들처럼 친숙한 존재였습니다.
요한과 마리아는 ‘주님’으로서의 예수님에 대한 진정한 존경과 사랑을 공통분모로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리하여 마리아에게는 요한이 친아들보다도 더 편한 존재로 여겨졌던 것입니다.
부모 공경이 왜 그토록 중요한가?
예수님이 어머니의 노후를 제자에게 부탁한 것은 부모를 공경하라는 구약성경의 말씀을 지킨 것입니다.
출애굽기 20장 12절과 신명기 5장 16절을 봅시다.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네 생명이 길리라 (출 20:12)
너는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명령한 대로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네 생명이 길고 복을 누리리라 (신 5:16)
출애굽기 20장 12절 말씀은
우리가 너무나도 잘 아는 십계명 중 제5계명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반드시 지키라고 명령한 10가지 말씀 중 5번째가 효도하라는 것입니다.
자식으로서의 도리를 다하라는 것입니다.
신명기(申命記)는 계명을 다시 기록한 책이므로
신명기 5장 16절의 말씀도 출애굽기의 제5계명을 반복하면서 약간 보완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 내용은 대동소이(大同小異)합니다.
부모를 공경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면 장수하고 복도 받는다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받는 복은 물질적인 복이 아니라
하나님을 가까이 함으로써 영원한 생명을 획득하는 것입니다(시 73:28; 133:3).
부모 공경에 대한 강조는 신약성경에서도 계속됩니다.
에베소서 6장 1절부터 3절까지를 보면
“자녀들아 주 안에서 너희 부모에게 순종하라. 이것이 옳으니라 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
이것은 약속이 있는 첫 계명이니 이로써 네가 잘 되고 땅에서 장수하리라.”고 말합니다.
디모데전서 5장 8절에서도 “누구든지 자기 친족 특히 자기 가족을 돌보지 아니하면 믿음을 배반한 자요.
불신자보다 더 악한 자니라.”고 불효에 대해 경고합니다.
신구약 성경이 공히 부모를 잘 공경하면 장수한다고 했습니다.
주님의 어머니를 주님 대신 봉양한 사도 요한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초대교회 교부들의 증언에 의하면 사도 요한은 백수(白壽)를 누렸다고 합니다.
요한은 주님이 부탁한 대로 마리아를 어머니로 모셨는데
요한이 말년에 사역하였던 에베소에 가면 마리아가 기거하였던 ‘성모 마리아의 집’이 있습니다.
교황청은 1961년 그것을 공인하였습니다.
요한은 자신이 밧모섬에 유배되었던 때를 제외하고는 항상 마리아를 어머니로 모셨다고 합니다.
누군가의 돌봄이 절실하였던 성모 마리아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릴 당시 어머니 마리아는 과부였던 것이 거의 확실합니다.
아버지 요셉은 예수님이 열두 살 때 유월절을 지내기 위해 예루살렘에 갔다가 돌아오면서
예수님이 없어진 사실을 뒤늦게 알고 찾아 나섰던 사건 이후 성경에 등장하지 않습니다.
요한복음에 나오는 예수님의 7가지 기적 중 첫 번째 기적인
‘물이 포도주로 바뀌는 기적’의 가나 혼인 잔치에도 마리아만 있었습니다(요 2:1).
거기에 요셉이 같이 있었다는 기록은 없습니다.
4복음서 어디에도 요셉의 죽음은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예수님이 공생애를 시작하기 전 어느 시점에 요셉이 사망하였던 것은 틀림없습니다.
그 때문에 예수님이 사실상의 소년 가장으로서
공생애를 시작하기 전까지 어머니와 동생들을 돌본 것으로 추정합니다.
마태복음 13장 55절에 의하면 예수님에게는 남동생만 넷(야고보, 요셉, 시몬, 유다)이 있었습니다.
여동생도 숫자는 알 수 없지만 있었을 것입니다.
나사렛은 가난한 동네였고,
당시 서민들의 삶은 자녀들이 먹을 게 없어 어느 정도 나이가 들면
집을 나가 열심당 같은 조직에 가담할 정도로 극히 곤란하였기 때문에
예수님은 가족의 생계를 위해 열심히 일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예수님은 아버지께 순종하여 아버지의 직업인 목수를 물려받았습니다.
바로 위에 인용한 마태복음 13장 55절에서 예수님의 고향 사람들이 “그 목수의 아들이 아니냐”고
힐난조로 말하는 것으로 미루어 목수도 당시 존경받는 직업은 아니었던 것 같고,
예수님의 아버지 요셉도 지역유지는 못되었던 게 확실해 보입니다.
예수님의 부모님이 가난하였다는 것은
예수님 생후 40일 만에 행한 마리아의 산후 정결예식 당시 성전에 바치는 제물로
성경에 기록된 것이 가장 가난한 계층을 위한 규정이었다는 데서 증명됩니다.
" 21.할례할 팔 일이 되매 그 이름을 예수라 하니
곧 잉태하기 전에 천사가 일컬은 바러라
22.모세의 법대로 정결예식의 날이 차매
아기를 데리고 예루살렘에 올라가니
23.이는 주의 율법에 쓴 바 첫 태에 처음 난 남자마다
주의 거룩한 자라 하리라 한 대로 아기를 주께 드리고
24.또 주의 율법에 말씀하신 대로 산비둘기 한 쌍이나
혹은 어린 집비둘기 둘로 제사하려 함이더라. (눅 2:21-24)"
24절에 나오는 ‘산비둘기 한 쌍이나 혹은 어린 집비둘기 둘’은
가장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제물 규정입니다.
레위기 12장 8절을 보겠습니다.
그 여인이 어린 양을 바치기에 힘이 미치지 못하면
산비둘기 두 마리나 집비둘기 새끼 두 마리를 가져다가 하나는 번제물로,
하나는 속죄제물로 삼을 것이요 제사장은 그를 위하여 속죄할지니 그가 정결하리라.
원래는 일 년 된 어린 양 한 마리를 번제물로,
그리고 집비둘기나 산비둘기 한 마리를 속죄제물로 드려야 하지만,
예수님의 부모는 그만한 경제력을 갖추지 못하였던 것으로 보입니다.
십자가 사건 당시 마리아는 40대 후반 혹은 50대 초반이었습니다.
마리아의 개인적 소득은 거의 없거나 전무했습니다.
예수님의 동생들은 십자가 사건 당시 골고다 언덕에 모습을 보이지 않았습니다.
아마도 예수님의 동생들은 어머니 마리아를 봉양할 능력도 갖추지 못했을 것입니다.
십자가상의 주님이 어머니의 노후를 동생들이 아닌 제자 요한에게 부탁한 한 가지 이유가
거기에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어머니 마리아를 부르면서 ‘여자여(Woman)’라고 호칭하였습니다.
요한복음 2장 1절부터 5절까지에도 어머니 마리아가 등장하고,
거기서도 예수님이 어머니를 ‘여자여’라고 부르는 것이 나옵니다.
즉, 가나 혼인 잔치에는 예수님의 어머니도 계셨고, 예수님과 제자들도 초청받았는데,
포도주가 떨어지자 어머니 마리아가 예수님에게 “저들에게 포도주가 없다”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자여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내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나이다. (요 2:4)
호크마 주석을 보면
예수님이 어머니한테 “여자여(귀나이)”라고 부른 것은 하대하는 말이 아닙니다.
한국의 풍속으로는 이런 호칭을 이해하기 어렵지만
신약성경을 기록한 언어인 헬라어의 표현법에서는 그 호칭이 무례한 말이 아닙니다.
핸드릭슨에 의하면 오히려 친절한 표현이라고 합니다.
성모 마리아를 과대평가하는 가톨릭의 성경을 보면 “여인이시여”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부활 후 막달라 마리아에게도 “여자여”(요 20: 15)라는 호칭을 사용하였습니다.
예수님이 어머니에게도 “여자여”라는 호칭을 쓴 것은
자신을 ‘아들’로서가 아니라 ‘주님’으로 생각하도록 하기 위해서였다고 합니다.
예수님의 공생애 사역 기간 중에는 예수님과 마리아 사이에 어머니와 아들로서의 관계보다는
하나님과 인간으로서의 관계가 더 우선하여 적용되었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예수님이 어머니 마리아에게 “여자여”라는 호칭을 두 번 사용한 것이
다 예수님의 신성을 강조하는 요한복음에 기록되었다는 사실에서도 그 점을 미뤄 짐작할 수 있습니다.
효자였던 청년 예수의 삶
‘부모는 죽으면 산에 묵고 자식은 죽으면 가슴에 묻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불효 중의 불효는 부모보다 먼저 죽는 것입니다.
특히 사람의 수명이 오늘날처럼 길지 않았던 때는 더욱 더 그러했습니다.
그런 점에서 세상의 관점에서만 보면 예수님은 불효자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인류 구원의 사명을 띠고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이므로 그런 기준에서 평가할 수 없습니다.
공생애 이전과 이후로 구분하여 봐야 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은 공생애에 속하므로 하나님의 관점에서 평가해야 합니다.
그것은 오히려 가장 큰 효도였습니다.
왜냐하면 자기 목숨을 버려 어머니와 다른 믿는 사람들을 구원했기 때문입니다.
공생애 이전의 예수님은 인간의 차원에서도 진정한 효자였습니다.
누가복음 2장 51절이 그 점을 간명하게 잘 설명합니다.
예수께서 함께 내려 가사 나사렛에 이르러 순종하여 받드시더라.
열두 살 때 부모님과 함께 유월절을 지키려고 예루살렘에 올라왔다가
홀로 ‘왕의 도시’ 예루살렘의 성전에 남아 있었던 예수님은
뒤늦게 자신을 찾으러온 부모님과 함께 나사렛으로 돌아간 뒤
부모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부모님을 잘 봉양하였다는 것입니다.
아더 핑크(Arthur W. Pink)의 해석에 의하면
예수님이 나이가 들고 공생애를 시작하면서 ‘순종’의 시기는 끝났지만
예수님의 어머니 ‘공경’은 계속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인간 어버이에게도 효자였지만 성부 하나님에게도 효자였습니다.
예수님의 이 땅에서의 삶은 한 마디로 아버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한 삶이었습니다.
오직 성부 하나님이 성자 예수님에게 맡긴 사명을 완수한 삶이었습니다.
그 뜻과 사명을 하나도 빠짐없이 다 성취하였다는 고백이
바로 “다 이루었다”(요 19:30)는 십자가상의 외침이 아니겠습니까?
이 고백이야말로 최고의 효도 고백이 아니겠습니까?
예수님의 ‘사랑의 말씀’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
부모 공경은 성경이 기록하고 있는 거룩한 의무입니다:
너를 낳은 아비에게 청종하고 네 늙은 어미를 경히 여기지 말지니라. (잠 23:22)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부모를 잘 공경할 수 있을까요?
첫째, 부모님의 영혼을 구원해야 합니다.
다른 모든 것을 잘 하더라도 부모님의 영혼이 지옥의 나락에 떨어진다면 아무 소용이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는 십자가 곁을 지킴으로써 구원 받았습니다.
즉, 예수님은 가장 위대한 자기희생으로 어머니의 영혼을 구원하셨습니다.
부모님의 영혼 구원이 효도 중에서 제일 큰 효도입니다.
사람은 나이가 들수록 완고해지기 때문에 부모님의 영혼 구원은 이를수록 좋습니다.
둘째, 하나님 아버지께 효도하여야 합니다.
육신의 부모님을 사랑하는 것은 이웃사랑의 일환인데
성경에서는 이웃사랑을 하나님 사랑과 함께 해야 할 것으로 규정합니다(마 22:37-39).
부모님에게만 잘 하고 다른 모든 이웃에게는 냉담하다면 그것은 하나님을 모독하는 것이며,
따라서 결코 진정한 효도가 될 수 없습니다.
내 부모 외의 가난한 할아버지와 할머니들의 복지에도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셋째, 에베소서 6장 1절 말씀처럼 주 안에서 부모에게 순종해야 합니다.
하나님에 대해서도 순종이 제사보다 낫듯이 부모님에게도 순종이 물질적 봉양보다 중요합니다.
부모님을 물질적으로 잘 봉양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부모님이 평소에 강조하시고 유언으로도 남기신 말씀에 순종하여 사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부모님한테 물질적으로 잘 해드리지만 정작 부모의 세계관이나 강조사항과는 어긋난 삶을 산다면
그것은 부모님을 행복하게 해 드리는 길이 아닙니다.
부모님께 자주 연락드리고 안부를 여쭙는 것도 중요합니다.
무시로 문안인사를 하는 것이 어쩌면 물질을 드리는 것보다 더 중요할지도 모릅니다.
우리가 전화로 부모님에게 감사와 위로의 말을 전할 때 우리 부모님의 노년은 한결 덜 외롭고 덜 춥게 됩니다.
넷째,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다보면 자칫 부모에게 소홀해지기 쉬운데
그러할 때에 교회 사역과 부모 봉양 사이에서 현명하게 균형을 잡을 필요가 있습니다.
교회에서 아무리 열심히 봉사해도 부모를 잘 모시지 않으면
지역사회에서 덕이 되지 않습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교회에 헌금하는 것과
부모님을 위해 물질을 사용하는 것 사이에서도 균형을 잡아야 합니다.
노년의 부모님께는 정기적으로 용돈을 드리는 게 매우 중요합니다.
부모님에게 드리는 용돈과 관련하여
만일 어떤 사람이 교회에 헌금하느라 부모님께 용돈을 드리지 못했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어불성설(語不成說)입니다.
" 10.모세는 네 부모를 공경하라 하고
또 아버지나 어머니를 모욕하는 자는 죽임을 당하리라 하였거늘
11.너희는 이르되 사람이 아버지에게나 어머니에게나 말하기를
내가 드려 유익하게 할 것이 고르반 곧 하나님께 드림이 되었다고 하기만 하면 그만이라 하고
12.자기 아버지나 어머니에게 다시 아무 것도 하여 드리기를 허락하지 아니하여
13.너희가 전한 전통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폐하며 또 이같은 일을 많이 행하느니라 하시고 (막 7:10-13)
여기서 우리는 예수님이 십자가상에서
세 번째로 하신 말씀이 주는 또 한 가지 중대한 교훈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교회 사역이나 선교 사역 때문에 가족을 소홀히 해서는 절대 안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심으로써 하나님의 놀랍고도 위대한 뜻과 계획을 성취하셨지만
그와 동시에 어머니 마리아의 노후대비책도 강구하셨습니다.
교회 일이 바쁘다고 해서 부모를 제대로 돌보지 않거나,
아내와 자녀들을 방치하여서는 결코 안 되겠습니다.
그런 행위는 예수님의 이름에 먹칠을 하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예수님의 부모를 닮아 경건한 부모로서
자녀들을 신앙 안에서 잘 양육해야 합니다.
우리의 믿음은 대를 이어 지속되어야 합니다.
위로 부모님을 잘 모시면서 동시에 아래로는 우리의 자녀들을 그리스도인으로 잘 키워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서 돈과 권력과 세상 명예의 차원에서는 명가(名家)를 이루지 못하더라도
신앙의 차원에서만큼은 믿음의 명문가정을 이루어야 하겠습니다.
2014.9.11
이우길 집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