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 의지함이 심히 기쁜 일일세
허락하심 받았으니 의심 아주 없도다
예수 예수 믿는 것은 받은 증거 많도다
예수 귀한 예수 믿음 더욱 줍소서
어떻게 답해야 할까요?
성경책 창세기 1장에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신 이야기가 나오는데
처음부터 헷갈려 믿음이 생기지 않아 질문한다는
질문자의 내용에 어떻게 대답해 주어야 할까요?
질문 1
첫째 날에 빛을 창조하시고 빛을 낮이라 칭하시고 어두움을 밤이라 칭하셨는데
그 ‘빛’과 넷째 날에 해와 달과 별을 만드셨을 때 생겨나는 ‘빛’은 어떻게 다른 것인가?
질문 2
해와 달과 별은 넷째 날에 만드셨는데,
어찌하여 해(태양)를 만드시기 전에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 이는 첫째날이니라’ 라는 표현을 할 수 있는가?
둘째 날, 셋째 날도 계속 그런말이 나오니 이해가 안 된다.
해가 먼저 만들어저야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될 수 있는 것 아닌가?
질문에 대한 답
먼저 성경은 과학책이거나 도덕 윤리책이 아니고
인간을 구원하는 인간구속사를 위한 책입니다.
그리고 도덕 윤리책이나 과학을 초월하는 책입니다.
창조에 관하여
<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天地)를 창조하시니라 >
‘태초에’ 즉 ‘레시트’는 ‘시간의 시작’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 말은 만물이 창조에 의해서 형태화된 그 시점이 바로 ‘시간의 시작’이라는 말입니다.
시간이라는 것은 물질이라는 것이 존재해야 성립이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시간이 없이 물질이 있을 수 없고
물질이 없이 시간이라는 것이 성립되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태초 전, 시간이 창조되기 전에는 하나님 이외의 존재가 있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성경은 시간이 창조되기 이전의 상태를 ‘영원’이라고 부릅니다.
그리고 그 영원은 지속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영원 속에서 천지 창조를 계획하셨고
그 영원 속에서 창조가 시작된 그 시점을
우리가 ‘시간의 시작’ ‘역사의 시작’ ‘레시트’ ‘태초’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그리고 어느 날 이 창조된 물질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 소멸되고 새 세상이 오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그 때를 ‘최후의 종말’ 다른 말로 ‘시간의 소멸’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그리고 시간이 소멸되고 나면 다시 영원 속으로 들어 가는 것입니다.
인간이라는 존재는 이 물질인 육체를 벗어나게 되는 그 죽음의 순간에 시간을 상실하게 되고
영원 속으로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인간은 죽음의 순간 물질이 아닌 영혼으로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천(天)은 우주 공간이고 지(地)는 지구입니다.
이때 지구는 자연법칙이 부여되지 않은 질서가 잡히지 않은 혼돈스럽고
아무 것도 채워지지 않은 공허한 곳이었으며
빛도 없이 어둠에 싸여 있었고 온통 물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신은 수면 위에 운행하고 있었습니다.
즉 창조를 위해 품으시고 있었습니다.
히브리어 빠라는 無에서 有의 창조를 말하며
아쏴는 有에서 有의 창조를 말합니다.
예를들면 우주공간과 지구와 물, 빛, 초목, 물속에 있는 움직이는 생물 등은
아무 것도 없는 상태에서 만든 無에서 有의 창조이고
새들이나 짐승, 사람은 만들어진 물질(흙)로 만든 것이니 有에서 有의 창조입니다.
첫째 날에
하나님은 빛을 만드셨습니다.
하나님이 가라사대 <빛이 있으라>하시매 빛이 있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신이시기에 입이 없으십니다.
그래서 말로 하지 않으십니다.
<빛이 있으라> 하신 것은 빛이 저절로 있게 된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개입하셔서 창조하셨다는 다른 표현입니다.
그 빛은 태양 빛이 아니고 빛의 근원, 즉 물리적인 빛입니다.
그 빛은 에너지의 근원, 모든 물질적인 생명의 근원입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시간과 공간과 물질의 근원을 창조하셨습니다.
시간이 있는 곳에 공간이 있고 공간이 있는 곳에 물질이 있습니다.
그리고 빛과 어둠을 분리하시고 그것을 낮과 밤으로 칭하셨습니다.
이때 시간이 생겨났으며 <하루>, <첫째날>의 표현을 하게 된 것입니다.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하루가 지났다> 하셨습니다.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가 되려면 해(태양)가 있어야 하는데
그 때는 아직 해가 만들어지기 전이므로
<하나님의 빛>으로 진행되었습니다.
이 빛은 어떤 빛이었을까요?
단지 어두운 곳만을 밝혀주는 전기불이나 촛불 같은 것이었을까요 ?
아닙니다. 이 빛은 태양의 역할을 할 수 있는 빛이었습니다.
이 빛은 3째 날에 가서 있게 될 모든 만물들에게 있어서 필수적 조건인 태양과 같은 빛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이 빛은 열을 포함한 물리적인 빛으로,
낮과 밤을 구분 짓게 할 뿐만 아니라,
식물이 자라고 열매 맺게 하기에 충분한 빛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이 빛을 두신 장소 즉, 빛의 출발점은 어디일까요?
이 빛의 출발점은 앞으로 있게 될 태양의 자리에서부터 지구 위에 비취도록 한 곳이었습니다.
비록 태양의 본체는 넷째 날에 가서야 창조되었다하더라도,
본체가 없는 이 빛은 태양의 역할을 하기에 충분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라는 표현이 있었으니
지구가 창조되었을 때부터 회전(자전)한 것은 틀림없습니다.
그리고 이 빛은 영적으로 말하면 <하나님의 영광>입니다.
그리고 예수그리스도는 세상의 빛이십니다.
빛이 어둠에 나타났으나 사람들이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예수그리스도는 말씀이시고 진리이십니다.
그리고 저녁을 먼저 언급한 것은 어둠이 먼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유대인은 하루가 저녁부터 시작되었다고 생각하며
저녁부터 다음 저녁까지를 하루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오늘 날은 밤 12시를 기점으로 날짜가 바뀝니다.
둘째 날에는
이미 만들어진 물 가운데 궁창을 나타나게 하셨는데
그 궁창이 물을 궁창 위의 물과 궁창 아래의 물로 나누었습니다.
이 궁창을 하나님께서 하늘(sky)이라고 칭하셨습니다.
광활한 우주는 첫째 날 만드셨으나
비의 근원이 되게 하는 이 지구의 대기권은 둘째 날 만드셨습니다.
이 궁창의 히브리어는 라키아로 "확장된 것, 펼쳐진 것"으로,
지구를 둘러싸고 있는 대기권의 넓은 공간을 말합니다.
대기권이란 지구를 둘러싸고 있는 공기층으로 휘장
즉, 땅위에 펼쳐진 하늘의 둥근 천장입니다.
궁창 아랫물은 지구 자체에 있는 물이며
궁창 위의 물은 구름들 속에 축적되어 있거나 공기 속에 포함 되어 있는 물입니다.
이런 대기층은 셋째 날의 푸른 풀, 채소, 과목 등이 자라게 하는데 필수적인 조건이며,
또한 인간의 호흡을 위해서나,
비의 근원이 되는데도 필수적인 것이었습니다.
이렇게 물을 나누어 땅의 물을 감소시킨 것은
셋째 날의 뭍(육지)이 쉽게 드러나게 하기 위한 준비작업이었습니다.
과학에 의하면 수증기층의 대기권은 200∼300마일까지 펼쳐있는데
이 수증기층을 바다 물처럼 압축해보면
5마일 두께(8 km= 20리)의 물의 양이 된다고 증명하고 있습니다.
둘째 날에 하늘을 만드시고
<하나님 보시기에 좋았더라>는 평가가 없는 것에 대한
첫째 견해는, 둘째 날 창조가 셋째 날에 가서야 완성을 보았기 때문에,
둘째 날에는 <하나님 보시기에 좋았더라>는 평가가 없다는 것이고,
셋째 날에는 <하나님 보시기에 좋았더라> 두 번 나왔다고 주장하는 학자들도 있습니다.
둘째 견해는, 하나님께서는 둘째 날 하늘을 만들어 놓으면
타락한 천사들이 자기들의 거처로 사용할 것이기 때문에
<좋았더라>는 평가가 없었다고 하는 학자들의 견해도 있습니다.
둘째 날의 궁창 창조는
마귀의 거처인 Permanent (2천층)을 만든 것이 아니라,
자연 만물과 인간을 위해 대기권(공기층-1천층)을 만드셨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2천층은 우주공간으로 첫째 날 창조되었다는 사실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마귀는 초자연적인 능력을 가진 영적 존재로서,
하나님께서 특별히 제공해 주었다고 하는 2천층에서만 활동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천국과 인간 세계까지 왕래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욥1장과 2장.슥3:1.계12:7-12).
타락한 천사들은 초자연적인 능력을 소유한 존재이기 때문에 아니 간 곳이 없으며
그들의 거처는 2천층 뿐만 아니라 사람 몸속에까지 들어와 거처를 삼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2천층이 꼭 사탄의 거처라고만 볼 수 없는 것입니다.
셋째 날에
하나님께서는 새로운 자연 법칙을 부여하시사 물을 한 곳으로 모이게 하시고 뭍이 드러나게 하셨습니다.
뭍을 땅이라 칭하시고 물을 바다라고 칭하셨습니다.
물이 한 곳에 모이고, 육지가 드러나게 하신 것은 융기현상과 침강현상의 원리를 이용한 것입니다.
융기현상이란, 땅이 높이 솟아오르는 것이며,
침강현상이란, 땅이 꺼져 내려앉는 것을 말합니다.
이러한 융기현상과 침강현상은, 높고 낮은 산들을 수없이 만들어냈으며,
바다와 육지를 드러나게 했으며, 땅에 움이 돋아나게 하시고
씨맺는 식물과 씨있는 열매맺는 나무가 그 종류대로 돋아나게 하셨습니다.
풀은 무종자 식물로서 하등식물을 말합니다.
그렇다고 번식할 수 있는 씨가 없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무종자 식물에도 씨로 번식하는 것도 있고, 뿌리로 번식하는 것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풀들은,
인간이 먹고 살아야 하는 식용성이 아니기 때문에 파종할 필요가 없는 것들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의 노력이나 수고를 필요로 하지 않는 식물들인 것입니다.
이러한 풀을 만드신 목적은, 인간을 위한 것이 아니고, 짐승들의 먹이와 약초를 위한 것입니다.
"씨 맺는 채소" 란, 히브리어로 에셉입니다.
이 말은 모든 야채와 곡식류를 총망라한 들초목을 말합니다.
이것은, 고등식물로서 인간을 위한 것으로, 식용성과 파종성이 있는 식물입니다.
들초목은 논을 통해서 얻어질 수 있는 것으로 벼 등을 말하고 있으며
밭채소는 무, 시금치, 상추, 배추 등 밭을 통해서 얻을 수 있는 모든 식물을 총망라합니다.
이러한 고등식물을 인간의 식물로 축복해 주셨을지라도,
인간의 노동력을 필요로 하기 때문에
인간 타락 전에는 생기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인간의 노동력은 타락 후 저주로부터 왔기 때문입니다.
이 때에도 아직 해가 만들어지기 전이므로 <하나님의 빛>이 작용한 것입니다.
이때까지 땅 위에 비를 내리지 않으시고
땅에서 물이 솟아 온 땅을 적셨습니다.
식물을 그 종류대로 창조하셨기에 진화론이 거짓임을 증명하고 있습니다.
넷째 날,
이때 부터는 셋째 날까지 이미 만들어진 틀에다가 채워가시는 창조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큰 두 빛을 만드시고 또 별들을 만드셨습니다.
첫째 날에 이미 만든 빛 즉 에너지와 모든 물질적인 생명의 근원으로
해, 달, 별들을 있게 하셨으며 빛을 내는 발광체로 만드셨습니다.
태양은 빛 자체가 아니고 광원 즉 발광체입니다.
첫째 날에 근원적인 빛이 창조되지 않았다면 태양은 빛을 발산하지 못할 것입니다.
첫째 날에 만드신 근원적인 빛 즉 시간, 공간, 근원적인 물질 속에 해와 달과 별들을 있게 하셨습니다.
즉 채우셨습니다.
<큰 두 빛> 이라고 표현한 것은
창세기의 수신자인 이스라엘 민족이 애굽에 있을 때, 달을 염두에 두고 한 우회적 표현입니다.
다섯째 날에는
둘째 날에 만든 궁창 즉 하늘에다가 날개 달린 모든 새를 그 종류대로 채우시고,
궁창 아래에 있는 물에다가
물에 번성하여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그 종류대로 채우셨습니다.
사람들은 말합니다.
계란이 먼저냐? 닭이 먼저냐?
성경은 닭이 먼저라고 대답합니다.
하나님께서 각 종 새들을 만드실 때 어린 새끼를 만드신 것이 아니라.
완전히 성장한 새들을 만드셨습니다.
그 증거는 "하늘의 궁창에는 새가 날으라"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완벽한 어른 새로 만들지 아니하셨다면 <날으라!>는 말씀을 하지 아니하셨을 것입니다.
알부터 창조하셨거나 새끼들을 만드셨다면
알을 향해, 갓깐 새끼들을 향해서 <날으라!>고 명령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각종 새들은 무엇으로 어떤 재료를 사용해서 만드셨을까요?
창1:20에는 '하늘의 궁창에는 새가 날으라'고 기록한 것을 보면
각종 새들도 하나님의 말씀으로 각종 새들이 생겨나서 날아 다니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창 2:19의 보충 설명에서는
새들을 창조하실 때에 무엇으로 만들었는지 그 재료를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흙"이었습니다
만약에 2장의 보충설명이 없이 1장만 기록되었더라면,
각종 <새들>과 <들짐승들>과 <육축>과 <인간>창조의 재료는 알 길이 없었을 것입니다.
이 흙은, 황토흙이나 진흙 등을 말함이 아니라,
흙 속에 들어있는 인체구성요소인 원소들과 D.N.A 로 만들었음을 말합니다.
D.N.A라 해서 다 같은 것은 아닙니다.
인간을 만드신 D.N.A가 다르며,
들짐승이나 각종 새들이나, 육축들의 D.N.A는 각 종류마다 다릅니다.
흙에는, D.N.A(인체의 구성요소)뿐 아니라
수분, 열기, 영양, 박테리아 등이 포함돼 있어
식물들에 있어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각종 물고기들을 만드실때에는
어떤 재료를 사용했는가에 대해서는 설명을 하지 않고 있는 것으로 보아
각종 물고기들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생겨나게 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재료 설명이 필요없었던 같습니다.
물에서 번성하여 움직이는 모든 생물들은
보편적으로 사람이 먹을 수 있는 것들을 말하고 있으며
큰 물고기 종류들은, 고래. 공룡, 해룡, 등은 보편적으로 먹을 수 없는 것들을 말합니다.
척추동물의 한 강(綱)을 이루는 동물군,
어릴 때는 아가미로 수중호흡을 하면서 물에서 살고,
성장하면 폐와 피부를 통하여 호흡을 하면서 육상에서 살아서,
두 곳에서 산다는 의미로 양서류라고 합니다.
어류와 파충류 중간에 위치한 생물로,
물과 육지에서도 서식할 수 있는 생물입니다.
여기에 속한 것으로는,
개구리. 청개구리. 황소개구리. 무당개구리. 맹꽁이. 옴개구리. 도룡용 같은 것들입니다.
우리가 물고기라고 부르는 어류는
물에서 사는 아가미가 있는 척추동물입니다.
대부분의 경우 냉혈동물이지만 참치나 상어와 같은 몇 종은 온혈이기도 합니다.
지구상에는 2만 9천 종의 어류가 있으며
척추동물 중에서 가장 많은 종을 보유하고 있습니다.
워낙 다양한 종의 어류가 존재하다 보니
폐어와 같은 일부 어종의 경우
물에서 나와서도 며칠을 살 수 있는 경우도 있으나
바다나 강, 호수 등 물에서 사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예를들면 홍어-대구-쉬리-송사리-고등어-산천어-돗돔-빙어-가시고기-연어
-피라미-버들치-금강모치-모래무지-꺽지-여름치-감돌고기-각시붕어 등등
바다과 강과 호수와 계곡물에 살고 있는 모든 물고기를 총망라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암컷과 수컷에게 생육과 번식의 축복을 해주셨습니다.
창1:20에서 그들에게 복을 주어 가라사대
생육하고 번성하여 여러 바다 물에 충만하라.
새들도 땅에 번성하라 하셨습니다.
여섯째 날에
집짐승, 들짐승, 기어다니는 길짐승을 만드셨습니다.
동물들을 분류하는 기준은
보는 관점에 따라 여러 가지로 나눌 수 있는데
일반적으로 동물은 크게 등뼈(척추)가 있는 동물과 없는 동물로 구분합니다.
개나 고양이 등의 등뼈가 있는 동물을 척추동물이라 하고
오징어, 문어 등의 등뼈가 없는 동물을 무척추동물이라고 합니다.
척추동물은 다시 환경이 변해도 체온이 일정하게 유지되는
정온 동물(定溫動物)과
체온이 환경에 따라 변하는 변온 동물(變溫動物)로 나눌 수 있습니다.
정온 동물은 다시 알을 낳는 조류와 새끼를 낳는 포유류로 분류됩니다.
변온 동물은 아기미로 호흡하는 어류, 폐와 피부로 호흡하는 양서류,
폐로 호흡하는 파충류로 나누어집니다.
무척추동물은 다시 절지동물, 편형동물, 환형동물,
연체동물, 극피동물, 강장동물 등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척추동물 중 포유류에 속하는 동물들은
현재 지구상에 약 4,000여 종이 알려져 있으며
형태, 습성, 분포 등이 매우 다양합니다.
남극 대륙, 뉴질랜드, 떨어져 있는 작은 섬을 제외한 넓은 지역에 살고 있으며,
사막, 삼림 지역, 북극, 고산 지대 등의
지상, 지하, 수중, 공중 등 모든 환경에 적응되어 왔습니다.
몸은 머리, 목, 몸통, 꼬리의 4부분으로 구분되며
털로 덮여 있고 피부에는 땀샘, 지방샘, 젖샘이 있습니다.
네 다리는 운동 양식에 따라 여러 방향으로 적응되었으며
박쥐의 날개나 고래의 지느러미처럼 여러 형태로 변형된 것도 있습니다.
턱에는 이빨이 있는데 앞니, 송곳니, 앞어금니, 뒷어금니로 분화되어 있으며
각 종류에 따른 특유의 치식(齒式)이 있습니다.
귓바퀴를 가지고 있으며,
심장의 구조는 2심방 2심실이고, 정온 동물입니다.
호흡 기관으로 폐를 가지고 있으며,
가슴과 배 사이에 근육성의 횡격막이 있습니다.
암수 딴몸으로 체내 수정을 하며,
알을 낳는 단공류(單孔類)를 제외하고는 새끼를 낳는 태생(胎生)을 합니다.
뇌는 고도로 발달되었고, 12쌍의 뇌신경이 있으며,
대뇌가 잘 발달하여 동물 중에서 가장 고등하며
새끼를 낳아 젖을 먹여 기르는 젖먹이 동물입니다.
蔽一言(폐일언)하고 땅의 모든 짐승들은
산과 들에 사는 모든 야생동물들로 포유동물을 총망라하며
육축은 인간이 집에서 기를 수 있는 성질이 온순한 모든 동물들을 말합니다
기는 것들이란, 파충류 과에 속한 모든 것들과 모든 곤충들까지를 총망라합니다.
창1:24절을 보면,
야생동물들과 육축들과 땅에 기는 모든 것들을 다 말씀으로 창조된 것같이 기록되어 있으나
창2:19절에서는, 곤충류와 파충류를 생략하고는
땅의 짐승들과 육축들은 모두 다 흙(DNA)으로 만들었다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창세기 2장은 창세기 1장의 보충설명으로
1장에서 기록하지 않았던 <재료>를 설명해주고 있습니다.
만약 창2장이 없었다면 이러한 자료들은 얻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생육하고 번식하여 땅에 충만하라는 복을 주셨으며
또한 하나님께서 만드신 푸른 풀을 그들의 먹이로 허락해 주셨습니다.
맨 마지막으로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사람(남자,여자)을 만드셨습니다.
창1:27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실 때
오직 말씀 한 마디로 지으신 것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창2:7절의 보충설명에서는
아담을 만들 때 흙이란 재료를 써서 만들었다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흙이란 아팔로, 인체를 성립시킬 수 있는 D.N.A를 말합니다.
즉, 인체구성요소인 D.N.A를 흙에서 취하여, 아담을 만드신 것입니다.
계획대로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아담을 먼저 만드셨습니다.
형상이란 아담의 속사람을 말합니다.
즉, 아담의 영혼(속 사람)을 만드실 때에도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창조하셨다는 말입니다.
형상이란, 하나님의 성품인 공의와 사랑과 거룩과 지혜와 능력과
도덕적인 인격을 그대로 닮은 것을 말합니다.
아담의 코에 불어넣으신 생기를 단순한 호흡으로 해석하여,
이 호흡 기능을 통해서 아담의 심장은 박동하기 시작하여
살아 숨쉬는 생물이 되었다고만 하면 안 됩니다.
물론 인간은 심장의 기능과 함께 호흡이 있어야 살 수 있는 존재라는 사실을
절대로 부인하지 않습니다.
또한 생명의 출처가 생명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에 있기 때문에
인간은 신적 기원을 갖고 있다는 사실 역시 부인하지 않습니다.
여기서 생기란 히브리어 <르아흐>로 <성령>을 말합니다.
생령(生靈)이란, 성령이 임하시고 난 후 나타난 결과를 말합니다.
그 결과는, 영혼까지 하나님과 교제를 나눌 수 있는
영광스런 신분으로 바뀌게 되었음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생령을 코로 숨쉬는 육체의 생명으로 보면 안 됩니다. (창2:7)
만약 아담이 육체 생명만 공급받았다면,
아담의 존재가치나 삶의 의미는 어디에서 찾겠습니까?
하나님과 관계가 끊어진 사람은 영적으로 사망한 사람입니다. (요한3:5-7참조).
원래 인간 창조 목적은 살아있는 아담의 영혼과
하나님과의 사랑의 교제를 나누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관심도는 인간 육체 생명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가 바로 되어 있는 생령(살아있는 영혼)에게 관심이 있는 것입니다.
지금도 하나님께서는 인간육신에 관해서는 아무 관심이 없습니다.
인간이 잘 생겼냐 못생겼냐! 미우냐 예쁘냐!
모양새에도 관심이 없고 인간이 잘 사느냐 ! 못사느냐 !
병이 들었느냐 ! 건강하냐 !
사람이 죽었느냐 ! 살았느냐 ! 기타 등등에도 아무 관심이 없으십니다.
진정한 하나님의 관심은,
누가 철저하게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오느냐 에만 있습니다. (마6:25-33).
무엇을 말하고 있습니까?
인간창조 목적은 '모든 영광을 오직 하나님께만'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길은, 성령의 사역 없이는 절대로 불가능합니다.
아담이란 말은 땅에서 유래된 이름입니다.
땅은 히브리어로 아다마입니다.
아다마에서 아담이란 이름이 파생했습니다.
그러므로 아담의 모체(어근)은 땅입니다.
아담(땅)아 ! 아담(땅)아 ! 부르신 것은,
땅의 흙(D.N.A)으로부터 취한 아담의 모든 후손들을 부르는 소리와도 같은 것입니다.
(사1:2 참조).
그리고 사람에게 복을 주시사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하셨습니다.
또 땅을 정복하라 하셨습니다.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채소와 열매를 먹거리로 주셨고
땅의 짐승과 공중의 새와 땅 위에 사는 모든 것에게 푸른 풀을 먹거리로 주셨습니다.
동물은 노아 홍수 후에 먹게 하셨습니다.
먹거리가 부족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람은 땅의 소산을 먹고 살다가 죽으면 육신은 흙으로 돌아가고
영혼은 죽지 않고 주신이에게로 돌아갑니다.
우리는 나중에 새 하늘과 새 땅인 그 영원 속에서 ‘육신’을 입는다고 성경은 말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 때 입을 육신은
우리가 지금 입고 있는 이 ‘물질’로서의 육신이 아닌 ‘새로운 육신’입니다.
그 새 육신은 지금의 이 육신처럼 시간을 존재 방식으로 하지 않는 새로운 육신인 것입니다.
그 부활의 몸을 입으시고 그래서 주님께서 부활하신 후에
벽을 뚫고 들어오시기도 하고 동시에 여러 곳에 나타나시기도 하신 것입니다.
신자나 불신자나 모두 땅의 소산을 먹고 살다가 죽으면
죄의 결과로 육신은 흙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죽음은 죄의 결과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신자는 육신 속의 영혼이 하늘의 소산(하나님의 말씀)을 먹고 살았기에
육신이 죽는 날 하나님이 계시는 곳으로 돌아 갑니다.
그래서 신자를 천국 백성이라 합니다.
그러나 불신자는
육신 속의 영혼이 본능과 사탄의 말에 따라 살았기에
하나님과 단절된 곳으로 갑니다.
그곳은 하나님과 단절된 곳이기에 두 번째 죽음을 맞이하는 곳입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에서의 삶은
천국에서 살 것인가 지옥에서 살 것인가를 결정짓는 중요한 삶입니다.
개념적으로 정리한 표
Days of Forming (형성) ← Days of Filling (채우기)
Light and Dark ← Sun, Moon, Stars
Sea and Sky ← Fish and Birds
Land and Plants ← Land animals and Humans
여자 창조는 언제 계획하셨나
창2:18 <사람의 독처하는 것이 좋지 못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하시니라>
여자 창조 계획에 있어서 시간적 순서로 보면,
창조된 아담이 에덴동산 안으로 인도되어,
선악과에 관한 금령을 받은 後에,
그리고, 창조된 동물들을 아담에게로 이끌어 오기 前.
그 사이에 여자 창조 계획이 있었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여자 창조 계획은 이미 만세 전에 계획되어진 것입니다.
그런데 아담이 에덴 동산 안으로 인도된 다음에서야
뒤늦게 계획 되어진 것처럼 기록한데는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창1:26-27절을 보면,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라고만 기록되었을 뿐
남자 창조와 여자 창조의 시간 차이와 남자에게 여자가 왜 필요했는가
그 이유에 대해서는 충분한 설명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여자 창조 목적과 그 이유와 아담창조 후 시간적 차이에 대해서
설명할 필요가 있었던 것입니다. (창2:18절)
창세기 1장은 대충 기록되었고,
창세기 2장에서는 구체적 설명을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창세기 2장은 창세기 1장의 보충설명인 것입니다.
여자 창조 목적의 첫 번째 이유는,
아담의 독처가 좋지 못했고,
두 번째 이유는 아담에게 돕는 배필이 필요했기 때문이라고 설명하셨습니다.
왜 독처가 좋지 못한가?
1. 남자 혼자서는 생육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남자의 독처가 좋지 못한 첫번째 이유는 남자 신체의 기능의 문제입니다.
남자의 신체는 인간을 생산할 수 있는 기능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그것을 허락하지 않으셨기 때문입니다.
여자가 없으면 생육하고 번성할 수 없습니다.
이것은 이미 만세 전에 하나님의 계획 속에 있었던 것입니다.
아이를 낳을 수 있는 육체적 기능은 여자에게만 있습니다.
2. 많은 후손들로 하여금 신정국가를 세우기 위해서 입니다.
남자의 독처가 좋지 못한 두 번째 이유는
만물은 번식하여 땅에 충만해지는데,
인간은 아담 한 사람으로 그쳐버린다면
지구촌은 동물농장으로 변하여 삭막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사람도 생육하고 번성해야 하므로 여자를 만드신 것입니다.
인류가 충만해져야 하나님께서 통치하시는 신정국가가 이루어집니다.
신정국가의 백성들이 많아지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며
그의 기뻐하신 바입니다. (창22:15-18)
하나님께서는, 많은 백성들을 통치하시면서,
더 많은 백성으로부터 경배와 찬양을 받기 원하시며,
더 많은 백성들과의 사랑의 교제를 나누시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더 많은 하나님의 자녀들을 얻기 위해서는
여자를 만들어 생육하고 번성하도록 해야 하므로
여자 창조를 계획하신 것입니다.
3. 남자 혼자 독처하면 외롭기 때문입니다.
남자의 독처가 좋지못한 세번쩨 이유는
당시는 죄가 개입되지 않는 무죄 상태요,
성령이 충만하여 하나님과 사랑의 교제를 나누고 있다 하더라도,
인간끼리의 사랑을 나눌 수 있는 상대도 필요했습니다.
만약 즐겁게 교제할 수 있는 상대가 없으면
육체를 가진 인간은 고독하기 마련이요,
또한 하나님의 백성들의 숫자도
이러한 남녀의 사랑 노래 속에서 증가되는 것입니다.
인간끼리의 뜨거운 사랑이 없다면
누가 고통을 겪으며 아이를 낳으려 하겠습니까 !
인구 번성은 남녀 부부의 뜨거운 사랑의 결실인 것입니다.
여자가 있음으로서 하나님의 백성들은 날로 증가될 수 있으며
인간도 외롭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인간의 영혼은 사랑을 나눌 하나님이 필요하고
또 육체를 가진 인간은 사랑을 나눌 상대가 있어야 고독하지 않습니다.
인간끼리의 사랑만 나누면 50% 행복이요,
하나님과도 사랑을 나무면 100% 행복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하나님과의 사랑을 나누면서도
인간끼리 나눌 사랑의 상대도 있어야 고독하지 않게 됩니다.
무엇을 돕는 배필인가?
1. 많은 후손들을 낳기 위해 돕는 배필입니다.
여자는 무엇을 도와야 하는 것 입니까?
여기서 <돕는 배필>이란 노예개념이 아니라 남녀의 육체적 기능을 말하며
또한 각자에게 주어진 사명의 문제를 말합니다.
여자 존재 목적은 남편의 부족한 면을 돕기 위함이지
주인의 명령에 무조건 복종하는 노예나 하인의 개념으로 만든 것은 아닙니다.
아담에게는 아이를 낳을 수 있는 기능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아내는 그 일을 도와 후손들을 생산하는 일을 도와야 합니다.
또한 행복과 기쁨이 서로 간에 더 하도록 도와야 합니다.
<돕는다>는 개념 속에는, 자기의 유익이나,
욕심. 자존심 등을 다 버리지 아니하면 도울 수 없음을 함축하고 있습니다.
여자의 근본적 사명은 남편을 돕는 일이기 때문에 도우미 역할을 잘 해야 합니다.
두 사람 사이 사랑의 조화가 무너지면 가정이 파탄에 이릅니다.
아내는 서로 간의 사랑의 조화가 깨지지 않도록 삼가 조심해야 하며
하나님 안에서 진정한 가정을 유지해 나가는 일에 힘쓰고 애써야 합니다.
2. 목회자인 남편을 신앙으로 돕기 위한 배필입니다.
아내는, 생육과 번성으로 돕고,
행복한 가정을 유지하는 그것으로 여자 창조 목적을 다 이룬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 육신 생활에 창조의 목적을 두지 않으셨습니다.
인간 육신에 관한 것들은 덤이요,
부수적인 것들이지 원래의 창조목적은 아닙니다.
이런 것들보다는,
아내가 남편의 신앙적 사역 문제에 관한 것을 돕는 것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아담에게는 중대한 사명이 있습니다.
그 사명이란 만물 통치나,
장차 많은 백성들의 최고 지도자로서의 사명을 뛰어 넘는 것입니다.
아담에게 있어서 중대한 사명이란,
장차 많은 백성들을 하나님께로 이끌고 나가야 하는 예배 인도자
즉 목회자로서의 사명인 것입니다,
그래서 창조 당시부터 아담에게 성령의 기름을 부어
에덴성전으로 인도한 다음,
에덴성전의 목회자로 구별시켰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담은 왕이요, 목회자인 것입니다.
이렇게 중대한 사명을 띠고 있는 아담을
아내는 무엇을 어떻게 도와야 하는가에 관심을 집중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마귀는, 하나님께로부터 중대한 사명을 부여 받은 사람들을 표적으로 삼고 있습니다.
천지와 만물을 창조하기 전, 천상에서는 루시퍼를 중심으로 한 반역이 있었고,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저주하여 천상의 에덴동산에서 내어 쫓아버렸습니다. (겔28:13이하).
내어쫓긴 사탄은, 하나님의 창조 사역을 지켜보았고,
중대한 사명을 띠고 있는 아담을 예의 주시하고 있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아내가 무엇을 어떻게 도와야 할 것인가에 대한
방법론이 나와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남편인 아담으로 하여금,
사탄의 유혹을 막아주는 일이었습니다.
이것은 남편과 아내 두 사람으로만 끝나는 문제는 아니었습니다.
온 인류의 대표자인 아담 한 사람이 사탄의 유혹을 받아 하나님을 배반할 경우
그의 모든 후손들까지 비참한 상태에 빠지게 할 수 있는 일로
모든 자손들이 죽고 사는 문제였습니다.
하와가 아담의 도우미가 되려면,
첫째, 아담이 전해준 하나님 말씀을 정확하게 듣고
둘째, 그것을 명심하여 지켜 행하며,
셋째, 사탄의 유혹에 속지 않도록 신앙 무장(정신무장)을 잘 해야 합니다.
그리고, 남편으로 하여금 죄를 짓지 않도록
그 사명을 잘 감당할 수 있도록 남편을 위해 늘 간구하며 기도에 힘써야 합니다.
이것이 아담을 돕는 일입니다.
아담이 배필의 필요성을 깨달음
하나님께서는 아담에게 돕는 배필이 필요하다는 사실은
만세 전부터 알고 계시는 일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담 창조 당시 그 자리에서 여자까지 창조하지 아니하시고,
아담을 에덴동산으로 인도하여 들이신 후,
선악과에 대한 율법을 주시고
새와 짐승들을 이끌고 들어와 이름부터 지어주도록 명령하셨습니다.
왜 그리하셨을까요?
그 이유는, 아담으로 하여금 배필의 필요성을 느끼고
구하게 되면 주시기 위해서였습니다.
아담은 생물들에게 이름을 주는 과정에서,
그들에게는 생육하고 번식할 수 있는 암수컷이 있음을 보았습니다.
그러나 자신에게는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할 수 있는 배필이 없음을 알게 되었고
그때 아담은 배필의 필요성을 깨닫고 여자를 구하게 된 것입니다.
아담이 돕는 배필을 구함
아담은 후손들을 위해 여자가 필요함을 알고 하나님께 구했습니다.
성경에는 아담이 여자를 만들어 달라고 구했단 기록이 없습니다,
그러나, 원본에는 구했단 사실이 있었는데 유실 되었는지도 모릅니다.
다만, 아담이 아내를 달라고 기도했다는 근거는
창2:20 절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창2:20 <아담이 돕는 배필이 없으므로>란 구절에서
<아담에게--->가 아니라 <아담이---> 로 나와 있습니다.
<이. 는. 가>는 주격이며, <에게>는 여격(소유격)입니다.
<아담에게(여격) 돕는 배필이 없으므로>라고 기록되었다면,
아담이 구하지 않았는데도
아담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하나님 스스로가 아내를 주셨다는 것이요,
<아담이(주격)> 라고 기록된 것을 보면
아담이 필요성을 깨닫고 하나님께 청구했기 때문에
여자를 만들어 주셨다는 의미가 됩니다.
성경 원리로 봐서는 분명 아담이 청구한 것이 분명합니다.
그것은 복음과의 관계에서 분명한 사실로 드러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미 만세 전에 아담의 배필로 여자를 계획해 두셨으나,
아담의 원할 때 주시기로 작정하신 것입니다.
성경에도 보면, 하나님께서 우리들을 위해서 만세 전에 많은 것들을 준비해 두셨으나,
구함으로서만 받을 수 있도록 하신 것들이 수없이 많습니다. (마7:7. 눅11:13 등)
여자를 만드신 과정
1. 아담을 깊이 잠들게 하심
창2:21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깊이 잠들게 하시니
잠들매 그가 그 갈빗대 하나를 취하고 살로 대신 채우시고…>
사람이 아무리 깊은 잠이 빠져있어도
갈비뼈를 빼도 모를 정도로 깊은 잠에 빠진 사람은 없습니다.
깊이 잠들게 하셨단 말은,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능력으로 잠깐 마취를 시켰음을 말합니다.
즉, 잠시 죽음을 맛보게 하신 것입니다.
여기서 아담은 잠깐 죽음을 체험했으며,
죽음은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분명하게 느꼈을 것입니다.
2. 갈빗대 하나를 취하심
아담의 갈비뼈 한 대로, 여자의 척추 골격을 세웠고,
그 나머지 부분은 흙의 D.N.A로 만들었다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왜냐하면, 성경에는 그런 내용이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여자도 흙에 있는 인체구성요소인 D.N.A로
얼마든지 만드실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자 창조는 순전히 아담의 뼈와 피와 살로만 만들었습니다.
이러한 창조는 부부연합의 원리를 삼기 위함도 있겠지만,
그렇게 만드신 데는 하나님의 다른 이유가 있었음이 분명합니다.
그러므로, 부부 연합의 원리로 서로 간 소유의식과 자신의 몸에 대한 애착심을 가지고,
상대방을 자신의 몸처럼 아껴주고 사랑해주고 보호해 주고 관리해 주도록 하기 위해
여자를 만들었다고만 생각하면 안 됩니다.
여자를 만드실 때,
아담의 뼈와 피와 살 외에 어떤 불순물도 가미시키지 않고 만드신 데에는,
둘이 한 몸이 되는 인간 육체의 부부 원리를 훨씬 뛰어 넘는 그 무엇인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이었는지 여자와 복음과의 관계에서 이해되어질 것입니다.
3. 남자와 여자의 차이점
첫째 : 남녀의 동등성
◐ 하나님께서 만드신 피조물에서도 차이가 없고
◐ 영혼이 있는 인격체라는 것에도 차이가 없으며
◐ 이성적이고 도덕적인 존재라는 것에도 차이가 없으며
◐ 구원받아야할 사람들이라는 것에도 차이가 없으며
◐ 회개해야될 죄인들이라는 것에도 차이가 없으며
◐ 하나님의 심판에 있어서도 차이가 없으며
◐ 부활과 변화에 있어서도 차이가 없으며
◐ 행위에 따른 상급 분배에 있어서도 차이가 없습니다.
둘째 : 남녀의 차이점
◐ 힘의 강약에서 차이가 납니다
◐ 남녀의 기능 면에서 차이가 납니다
◐ 창조의 시간에 있어서 차이가 있었습니다.
◐ 창조 재료가 달랐습니다.
◐ 각자에게 주어진 사명이 달랐습니다.
여자와 복음과의 관계
1. 여자는 무엇으로 만들었을까요 ?
성경을 자세히 보면,
여자는 아담의 갈비 뼈로만 만들었다고 기록이 되어 있을 뿐,
갈비뼈로 여자의 골격을 세우고
그 외에 다른 부분은 흙으로 대신 채웠다는 말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성경대로 말한다면,
아담의 아내는 온전히 아담의 몸으로만 만들었다고 주장함이 옳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담의 갈비뼈를 뺄 때 닭을 솥에 넣고 한참 끓인 다음 건지면
닭 뼈는 살 점하나 붙지 않은 채 깨끗이 뽑히듯이
그렇게 뽑혔을 것이라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그 갈비뼈를 뺄 때,
그 뼈에는 살점이 붙고 피가 흘렀단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창2:23).
왜 그렇게 만드셨을까요?
여기에 위대한 복음이 숨어 있는 것입니다.
2. 아담부부와 복음과의 관계
아담부부와 복음과의 관계는 엡5:30-32에서 잘 설명하고 있습니다.
거기에 보면, 아담의 부부 관계를
예수 그리스도와 교회와의 관계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성경에는 인조 아담과 두 번째 아담인 예수 그리스도를 비교한 구절들이
복음서에 여러 번 나오고 있습니다. (고전15:22. 45. 등 )
롬5:14에는 <아담은 오실 자의 표상이라>했습니다.
그러므로, 아담은 예수 그리스도의 표상(상징 인물)이요,
하와는 하나님의 어린 양 신부인 교회의 표상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아담과 하와를 부부로 만드시는 과정에서 먼 미래에 있을 구속사를
시청각으로 보여주셨던 사건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만세 전에 계획되어진
하나님의 구속사를 확인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하와는 분명 아담의 갈비뼈와 피와 살로만 만들어진 것입니다.
그러면 그 나머지 부분은 무엇으로 만들었을까 하는 의문은 버려야 합니다.
無에서 有를 창조하신 하나님의 능력을 믿는다면 의문은 사라질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담의 갈비뼈와 그 뼈에 묻은 살과 피만 가지고도
얼마든지 사람을 만드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아담부부와 복음과의 관계를 비교해 봅시다
1). 하나님께서는 만세 전에 아담의 아내 하와를 계획하셨습니다.
◐ 교회도 만세 전에 계획하셨습니다.
2). 아담은 아내를 위해 잠시 죽음을 맛보았습니다. (창2:21)
◐ 예수님도 신부인 교회를 탄생시키기 위해 잠시 죽음을 맛보셨습니다.(히2:9)
3). 아담의 갈비뼈에는 피가 흘렸고, 살은 찢기었습니다.
◐ 예수님께서도 그 아내인 교회를 위하여 십자가 위에서 온 몸이 찢기고 온 살을 찢기며 물과 피를 아낌없이 다 쏟아 주셨습니다.
4). 아담의 갈비뼈는 아내의 골격이 되었습니다.
◐ 그리스도의 고난의 십자가는 복음의 골격이 되었습니다.
5). 하와는 순전히 아담의 뼈와 피와 살로(희생)만 구성되었습니다.
◐ 교회는 온전히 그리스도의 피와 살로만 구성되었습니다.
세상의 역사나, 교리나, 사상이나, 신화나, 철학 등이 가미되지 않는,
순전히 그리스도의 희생으로만 이루어진 것입니다.
◐ 그리스도와 교회. 그리고 부부관계는 생사고락을 같이 할 수 밖에 없는 사랑의 운명 체인 것입니다.
6). 하와 창조는 본인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아담의 뜻에 따라 창조 되었습니다.
◐ 교회 역시 인간의 뜻과는 상관없이 그리스도의 뜻에 따라 탄생된 것
입니다. (롬9:16)
7). 아담이 아내를 통하여 많은 후손들을 얻고자 했습니다.
◐ 예수께서도 교회을 통하여 하나님의 많은 백성들을 얻고자 하셨 습니다.(창17:2-8. 창12:2-4)
8). 아담은 아내와 사랑의 교제를 갖기 원했습니다.
◐ 주님께서도 그의 신부인 성도들과 사랑의 교제를 나누고 싶으셨습니다.
9). 아담은 아내에게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에 살이로다>라 고백 했습니다.
◐ 예수께서도, 사랑스런 성도들을 보시고는 이는 십자가 위에서 흘리신
내 피와 살(몸)이라고 하셨습니다. (계21:9.고전12:27.고전6:20).
10). 하나님께서 하와를 만들어 아담에게로 인도해 오셨습니다. (창2:22)
◐ 하나님께서도 어린양 신부들을 예수께로 인도해 주시고 계십니다.
(요6:44 )
11). 하나님께서는 아담의 아내를 극치의 아름다움으로 창조하셨습니다.
◐ 하나님의 어린 양 신부도 극치의 아름다움으로 만드셨습니다.
(계21:2-27)
12). 하와는 창조되자마자 아담과 결혼했습니다.
◐ 죄인들도 회개하고 중생 하자마자 하나님께 속한 자녀들이 됩니다.
(행2:38. 요1:12-13. 요3:3-6 등)
아담의 결혼식은 장차 있을 어린양 혼인잔치를 의미했습니다.
아담에게로 인도하심
창2:22 <그를 아담에게로 이끌어 오시니>
하나님께서는 모든 동식물들도 마찬가지이지만
아담과 하와도 처음부터 성숙한 모습으로 창조하셨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창조되자마자,
곧 이어 결혼을 할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하와의 손을 잡고 입장하셨으며
인류의 최초 결혼 주례자는 하나님이셨습니다.
위대한 패물
인간 최초로 결혼식을 하게된 아담은
신부 하와에게 가장 귀한 패물을 주었습니다.
그것은 곧, 자기의 갈비뼈와 피와 살이었습니다.
더 이상 무엇을 말하겠습니까 !
인간 역사 창조 이레 수많은 사람들이 결혼할 신부에게
다이아몬드와 금 은 보석과 가장 값비싼 물건들을 주었다 하더라도,
이만한 패물을 준 신랑은 지구 역사상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예수께서 교회에게 주신 자신의 피와 살은 모든 죄인들에게 희소식이며
지상 최대의 선물인 것입니다.
이 세상 죄인들에게 이보다 더 큰 선물이 어디 있겠습니까!
아담의 사랑고백
아담은 신부를 향하여 <이는 내 뼈 중에 뼈요, 살 중의 살이라> 이라고 고백했습니다.
아내는 곧 내 몸이기 때문에 사랑해 주고, 지켜주며, 아껴주며
생사를 같이 할 수밖에 없는 운명체임을 함축하고 있습니다.
즉, 내 몸이기 때문에 절대로 버릴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아담 앞에 서 있는 신부는 아담이나 하나님 앞에서 아무 말이 없습니다.
신부가 말을 했다는 구절은 단 한마디로 없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이것은, 그리스도와 교회와의 관계 속에서만이 이해해야 할 부분입니다.
엡5:31 절에 부부 관계를 그리스도와 교회와의 관계로 해석하고 있습니다.
아담은 예수님의 그림자요, 여자는 교회의 그림자로 해석을 하고 있습니다. (갈4:21-26 참조)
먼저 하와가 아담과 하나님 앞에서 말이 없었던 그 이유를 추론해 봅시다.
자신을 위해 죽음의 고통을 당하면서까지
뼈와 피와 살을 제공해 준 남편에게 무슨 말을 할 것이며
그것도 부족해서 아내는 자기의 뼈와 살이기 때문에
자기 생명처럼 사랑하겠다고 하니
더 말할 이유가 없으며
자신을 만들어 행복한 연합을 시켜주신 하나님 앞에서는
더 이상 할 말이 없는 것입니다.
구원받은 성도들도 하와처럼 예수님과 하나님 앞에서
유구무언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채찍에 맞아 살은 갈기갈기 찢어지고 십자가 고통은
심장파열로 이어져 동맥과 정맥이 터지면서
물과 피를 다 흘러 나를 구원해 주셨으니
그 분 앞에서 무슨 할 말이 있겠습니까!
그것도 모자라서, 성도들을 끝까지 책임지고 사랑하며 지키겠다 하시니
더 이상 무엇을 더 원하겠습니까 !
요14:18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 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
마16:18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 하리라>
시121:4 <이스라엘을 지키시는 자는 졸지도 아니하고 주무시지도 아니하시리로다 >
그리스도와 신비적 연합을 할 수 있도록 성도의 손을 잡고
그리스도께 인도하신 하나님 앞에서 무슨 말을 하겠습니까!
요6:44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시면
아무라도 내게 올 수 없으니 -->
부활되고 변화 받은 성도들은,
재림하신 주님 앞에서 황송하고 죄송한 마음 때문에
고개를 들 수 없을 것입니다.
그 큰 영광에 이르게 된 것은,
오직 그리스도의 공로로만 된 것이니
모든 성도들은 하나님 앞에서 할 말이 없는 것입니다.
아담이 지어준 아내의 이름
아담이 아내의 이름을 짓다.
창3:20 <아담이 그 아내의 이름을 하와라 이름하였으니
그는 모든 산 자의 어미가 됨이더라>
메시야에 대한 약속은 아담에게 하신 적이 없습니다.
그러나 사탄을 향하여 보복 선언을 하시는 과정에서
메시야에 대한 하나님의 계획을 알게 되었을 것입니다.
아담은 하나님께서 왜 자기에게 메시야 약속을 하지 않으셨는지
그 이유를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과 같이 되려고 금지시킨 지성소와 지성물을 범하여
신성모독 죄를 범한 결과 지옥의 형벌만 남게 된 아담에게는
메시야와 아무 상관이 없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짐짓죄의 무서운 결과인 것입니다. (히6:4-8. 히10:26).
육체적 고통과 죽음이라는 사형선고를 받은 아담 부부의 인생은 비참했습니다.
그들에게는 존재가치도, 삶의 의미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삶의 목적도 있을 수 없었습니다.
그저 930년이란 세월을 덧없이 살다가 지옥의 형벌을 받을 수밖에 없는
그 상황에서 아내의 이름을 산 자의 어미라고 이름을 지은 것입니다.
(마22:32 참조)
왜 그랬을까요? 소망이 없는 아담이 무엇을 바라보고 그리했을까요?
아담은 장차 태어날 후손들에게 안겨 줄 저주와 지옥의 형벌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영생과 행복 대신에,
식물에 대한 육체적 노동과 가시와 엉겅퀴만 내주는
토지의 저주와 사망의 공포와 지옥의 형벌이
후손들에게까지 미칠 것을 생각하면
장차 태어날 후손들에게 한없이 미안하고,
불쌍하기 그지없어 목이 매었을 것입니다.
부끄럽고 죄송하여 하나님을 바라볼 수 없고,
지난 죄를 생각하며 후회하고 탄식해도
행복했던 지난 날로 되돌릴 수는 없습니다.
장차 태어날 후손들까지 소망 없이 살다가 죽어 지옥 갈 것을 생각하면
절망 밖에는 보이지 않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후손들의 소망을 위해 자신은 해 줄 것이 아무 것도 없습니다.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요?.
그들을 구원할 방법은 없을까요!
비록 짧은 시간이었지만,
후손에 대한 아담의 고뇌는 상상을 초월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사탄에 대한 심판을 선포하신 가운데서 소망의 빛을 보았습니다.
그것은, 장차 메시야가 여자의 몸에서 탄생하여 사탄의 능력과 존재를 멸하시고,
만백성들을 죄에서 구원하게 될 것이라는
소망적인 하나님의 선전포고를 들은 것입니다.
비록 자신은 메시야와 상관없는 영혼이 되었지만,
자신의 죄로 절망에 빠뜨린 후손들을 위한 메시야 예고는
아담에 있어 가슴이 벅찬 순간이었습니다.
아담은, 구원이 여자의 몸을 통해서 성취될 것이라는 하나님 말씀에 의지하여
아내의 이름을 하와라 <생명주는 자. 산 자의 어미>라 했습니다.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라, 산 자의 하나님이십니다
<산 자>란,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된 사람을 말합니다.(마 22:32 참조)
이렇게 이름한 것은,
장차 태어날 후손들에게 메시야 대망 사상을 심어주기 위함이었습니다.
후손들의 존재가치나 삶의 의미는 메시야 갈망 속에서만이 찾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일곱째 날 : 하나님의 안식
안식하셨다는 의미
1. 더 창조할 필요가 없었다.
안식하셨단 의미는,
하나님께서 피곤하여 잠시 쉬셨단 말이 아닙니다.
모든 창조는 인간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인간이 살아감에 있어서, 충분조건이 되었고,
수많은 지하자원과 천연자원과 수자원 등
미래 개발에 있어서도 부족함이 없이 창조되었으므로,
이제는 더 이상 창조할 것이 없었음을 의미합니다. (창2:1-3).
2. 창조물을 관리 보존하심
모든 자연만물은 인간을 위해서 창조하셨고,
그것을 인간에게 위임하셨다 하더라고,
우주만물을 관리하고 보존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하실 일입니다.
그 넓고 많은 삼라만상에 비를 내려 푸르게 하시고,
열매를 맺게 하시며, 태양을 중심으로한 우주의 법칙까지 하나님께서 주관하시고,
또한, 생물들의 생육과 번식. 비의 량과, 눈의 량, 바람의 속도와 방향,
바다의 한계 등, 자연을 다스리시는 일을 지금도 계속하고 계신 것입니다.
(느9:6. 욥38장-39장).
그러므로, 무에서 유의 창조는 더 이상 필요 없게 되었지만,
이미 창조된 피조물들을 관리하고 보존하는 일은 하나님의 몫인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인간을 높이고 낮추고 하는 일과 악인과 죄인들을 벌하시며,
온 인류의 역사를 주관하시며,
온 인류를 구원하는 구원사역까지 담당하고 계시므로,
하나님께는 안식일이 따로 없는 것입니다.
요5:17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
그러므로 <안식하셨다>는 것을
하나님의 무동작 상태를 의미한 것이라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복 주어 거룩케 하심
1. 그날(안식일)을 복 주고 거룩케 하신 이유
만물이나 사람에게 복을 주신 것이 아니라
일곱 번째 날에게 복을 주셨습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모든 시간은 하나님께서 만드셨습니다.
그리고, 창조된 시간 중 6일은, 인간과 그 만물들에게 분배해 주셨지만,
단 하루 일곱째 날만큼은 하나님의 시간으로 구별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일곱째 날은, 그 누구도 손을 댈 수 없도록 왕의 인장반지로 인을 쳐,
하나님의 것으로 구별했으니 지극히 거룩한 성물개념의 시간인 것입니다.
2. 왜 날을 구별하셨는가!
특별히 구별하신 이유는,
그의 사랑하는 백성들과 만나 사랑의 교제를 나누며
그들에게 복을 주기 위함이셨습니다.
그러므로,
아담은 6일동안 성령과 동행하며 자기에게 주어진 모든 일을 성실히 하고
예배만큼은 구별된 시간에 하나님과 만나기로 한 정한 시간에 드려야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무 때나 축복을 빌어주신 것이 아니라,
정해진 그 날 그 시간에 나와 예배할 때 그 예배를 받으시고 난 후
축복을 해 주시는 것입니다.
3. 타락 前 아담 부부의 예배 내용
타락 전, 예배개념은 하나님의 창조를 기념하는 <창조 기념일>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는 학설도 있지만 그 보다는 진정한 예배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예배의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 자신을 창조해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하고
둘째 - 천지와 우주와 만물로
인간의 삶의 기본 조건을 갖춰주신 그 은혜를 감사하고
셋째 - 아내와 남편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고
넷째 - 만물통치권을 위임해 주신것에 감사하고
다섯째 - 인간의 왕이 되신 하나님께 경배와 찬양을 드렸습니다.
아담과 하와는 능력이 있으신 하나님이 자기 아버지 되심에 대한 감사로,
경배와 찬양을 드렸을 것입니다.
시95:6 <오라 ! 우리가 허리 굽혀 경배하며 우리를 지으신 여호와 앞에 무릎을 꿇자>
이러한 예배 개념은 <오직 하나님만 섬기겠다>고
하는 군신 맹약적 성격을 띤 오늘날의 예배개념과 같은 개념이었습니다.
(왕하23:3 등)
그러나, 타락 후에는,
메시야 대망사상과 더불어 구원의 길을 열어주신 감사로 이어졌습니다.
4. 타락 前 아담부부의 기도 내용
모든 것이 만족하게 풍성하게 만들어 놓은 상태에서
그리고 성령충만하여 하나님과 동행을 하고 있는 상태에서
영육간 그 어떤 것도 부족함이 없는 상태에서 구할 수 있는 기도가 있을까요?
이렇게 생각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기도는 하나님을 섬기는 성도들이라면 반드시 해야 됩니다.
기도는 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 그런 성질의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사무엘은 <나는 너희를 위하여 기도하기를 쉬는 죄를
여호와 앞에 결단코 범치 아니하고 -- (삼상12:23) >라고 고백했습니다.
기도하다가 쉬는 죄도 회개해야 합니다.
그러나 아무리 무죄상태라 할지라도
하나님께 구해야 될 것이 있는 것이 나약한 인간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불완전한 피조물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그러면 그들은 예배를 통해서든지
또 가정생활을 하면서 평상시 무엇을 구했을까요?
그들이 구해야 할 것은
첫째 하나님께서 <이것을 먹는 날엔 반드시 죽을 것이다>란
말씀을 잘 지켜 행할 수 있도록
죄의 유혹에 넘어가지 않게 해 달라고 생명 걸고 기도해야 합니다.
둘째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는 축복을 해 주셨을지라도
그것이 이루어지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오늘날도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이렇게 해 주겠다
저렇게 해 주겠다 했지만
하나님의 뜻대로 살지 않아서 구하지 않아서
그 복들이 다 취소된 것을 수없이 많이 보아 왔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도 수많은 복을 약속해 주셨지만
그들의 죄와 간구치 않는 기도로
그들은 앗수르와 바벨론의 칼을 맞고 쓰러졌습니다.
겔36:25-31에 보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하여
여러 가지의 축복을 약속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37절에 가서는 하나님께서 이런 축복을 약속해 주셨을지라도
이스라엘 족속이 이와같이 이루어 주기를 내게 구하여야 할지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아담은 하나님께서 축복을 해 주셨을지라도
그 축복이 그대로 이루어지기를 기도해야 합니다.
이것이 아담부부가 당시 했던 기도 내용들 입니다.
하나님 만나는 시간
1. 하나님은 안식일에 만났다.
타락 전에는, 안식일이 따로 정해진 것이 아니라,
일곱째 날부터 계속 안식으로 보아야 하기 때문에
에덴동산에서는 특별한 예배가 있을 수 없고,
날마다 하나님과 동행하며 살았다고 하는 주장도 있고
또 일곱째 날을 하나님께서 쉬시는 날로 정한 것이지,
예배하는 안식일로 정하신 것은 아니라고 하는 주장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일곱째 날을 복 주사 거룩하게 하셨으니>란
아담부부를 통하여 예배를 받으시고, 그들에게 복을 주셨다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으로 하여금 정해진 장소에서 정해진 시간에
하나님께 예배하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그래서 창조된 땅 가운데, 에덴동산을 구별하셨고,
창조된 시간 중에서 안식일을 구별하셨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것과 인간의 것에 대한 분명한 선을 그으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무질서의 하나님이 아니라, 질서의 하나님이십니다.
무질서하고 혼돈스러운 것을 좋아 아니하십니다.
6일 동안은, 인간의 위치에서 만물을 다스리고,
에덴동산을 잘 관리 보호하고 짐승들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지키다가
7일째는 하나님께 나아와 예배를 드린 것입니다.
타락 전 안식일 준수는,
육체적인 노동에서의 쉼을 의미하지 않고
모든 것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는 날로 드려진 것입니다.
안식일에 피조물인 인간은 창조주 하나님께 경배와 찬양과 감사를
그리고 하나님은 인간에게 축복을 빌어 주신 것입니다.
2. 안식일에 만났다는 증거
아담부부가 안식일 날 하나님을 만났다는 증거가 있느냐고 반문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절기라는 단어가 그 증거입니다.
구약에는 유월절. 무교절. 칠칠절. 나팔절.
대속죄일. 초막절. 안식일 7대 절기가 있습니다.
이 7대 절기 중 가장 큰 절기는 안식일이라고 하는 절기입니다.
왜 안식일이 가장 큰 절기일까요?
모든 절기들은 안식일과 관련지어 행해졌고,
다른 절기는 1년에 하루거나 일주일 정도 행해졌으나,
안식일만큼은, 일년에 약 48번 이상이나 됩니다.
그리고, 안식일은 천국의 영원한 안식의 모형이요 그림자이기도 합니다.
이 절기를 히브리어로 "모에드" 라 하는데,
이 모에드는 <만나기로 약속을 정하다>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절기는
반드시 정해진 날짜에 정해진 장소에서 정해진 시간에 거행되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안식일을 정하셨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아담부부와 만나는 시간를 정하셨다는 말입니다.
장소는 에덴동산 한 중앙 생명나무와 선악과가 서 있는 곳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질서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아무 장소나 아무 날이나 아무 시간이나 아량곳 하지 않고 만나
예배를 받으신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담에게 주어진 사명을 준수할 수 있는
6일간의 시간을 주셨고,
일곱째 되는 날에는 반드시 하나님을 만나 예배하기를 원하신 것입니다.
아무리 무죄시대라 할지라도,
아담이, 해야할 일이 있고,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이 따로 있습니다.
그러므로, 아담은, 6일 동안 하나님의 경고의 말씀을 지키며,
만물을 다스리면서, 아내와 즐겁게 지내다가,
안식일이 되면, 하나님의 어전으로 나아와 경배와 찬양을 드린 것입니다.
그리고, 예배를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신앙생활을 충실하게 하면서
만물을 다스리며 에덴성전을 관리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안식일을 몇 번이나 지킨 후 타락했는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다만 첫 아기를 낳기 전에 타락했다는 것을 보면
에덴동산에서의 하나님과 같이한 생활은 그리 많지 않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창세기 5장 족보를 보면 아담이 셋을 낳았을 때 나이 130세요,
셋이 에노스를 낳았을 때가 105세요,
에노스가 90세에 게난을 낳고, 등등
첫 아이을 낳았던 나이들을 보면 아담부부가 가인을 낳았을 때가
적어도 50세 이상은 되지 않았을까 추측해 본다면
에덴동산에서의 행복한 삶은 최하 50년 이상은 되지 않았을가 생각이 듭니다.
가죽옷을 지어 입히시다.
1. 옷을 주지 않는 이유
하나님께서 인간을 위하여 천지를 창조하실 때,
인간 삶의 기본조건에 있어서 100% 만족하도록 만드셨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옷만큼은 만들어 주지 않으셨습니다.
왜 그리하셨을까요?
하나님께서 인간의 옷에 대한 필요성을 느끼지 않아서 였을까요!
아니면 인간 스스로가 취향에 맞게 옷을 만들어 입기를 원해서 였을까요!
하나님께서 필요성을 느끼셨다면
천사장 미가엘이나 가브리엘의 옷 못지 않게
아름답고 품위 있는 옷을 만드셨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옷을 주지 아니하신 이유는 오직 한가지.
죄의 부끄러움이 개입되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인간 육체가 벌거벗는다고 부끄러운 것이 아니라
진정한 수치심은 죄로부터 오게 됨을 가르치고자 하신 것입니다.
2. 가죽옷을 지여 입히신 이유
여기서 옷이 생기게 된 동기와 목적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옷이 생기게 된 동기는 인간의 죄 때문입니다.
인간의 고안물이었던 나뭇잎의 옷은 해만 뜨면 말라 버리는
일시적인 옷이었으나,
하나님께로부터 나온 가죽옷은, 영구성이 있어,
오랜 세월동안 아담의 부끄러운 곳을 가려 주기에 충분했습니다.
그러므로, 당시 아담의 옷은, 추워서 입은 것도 아니요,
몸의 치장을 위함도 아니요, 신분에 맞게 품위를 높여 주기 위함도 아니라,
단지 부끄러운 곳을 가려 주기 위한 목적에서부터 출발했습니다.
그리고, 한 마리의 희생양은,
아담에게 영구적인 옷을 제공해 주기 위한 목적으로 죽었던 것입니다.
3. 무화과 잎과 가죽옷의 의미
무화과 나뭇잎은, 벌거벗은 육체를 가리기 위해서
인간이 고안해낸 현세적 성격을 띤 옷을 의미합니다.
이러한 옷은, 육체의 수치스러운 곳을 가려주기 위한 목적 하에,
인간 존재의 품위와 권위와 아름다움을 더 하도록 발전해 갔습니다.
아담은, 자신의 수치를 현세적인 옷으로 가리려 했습니다.
다시 말하면, 자신의 죄를 무화과 나무 잎으로 은폐시키려 했던 것입니다.
이러한 무화과 나무 잎은,
인간의 죄를 영원히 숨기는데 있어
완전범죄의 수단이나 방법은 되지 못했습니다.
아담의 부끄러움은 죄에 대한 수치심 즉, 죄의식과 죄책을 말합니다.
인간은 이것을 없애기 위해 많은 꾀를 써보지만,
죄에 대한 수치심, 즉, 죄의식과 죄책을 없애는 방법은
세상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금빛 찬란한 옷도 죄를 덮을 수 없으며,
그 어떤 고안물과 창작물로도
살아 계신 하나님의 눈을 속일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가죽옷이 등장했습니다.
가죽 옷은 희생양으로부터 나왔습니다.
이것은, 복음의 의미가 함축되어 있는 옷으로,
하나님의 백성들의 죄를 영원히 덮어주고 가려주기 위해서
십자가에 못 박혀 흘리신 피공로로부터 출발한
이신칭의의 거룩한 옷의 모형이었습니다. (엡1:4).
그러므로, 이 가죽옷은,
신약 시대에 있어 그리스도의 복음을 통해서만 입을 수 있는 의의 옷으로
메시야 출현이 함축된 것이었습니다.
4. 아담은 구원을 받았는가?
흔히 말하기를 하나님께서 아담을 위하여
가죽옷을 지어 입히신 것을 근거로 구원을 받았다고 주장합니다.
과연,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를 상징하는 희생양의 가죽옷을
아담에게 입혀 주신 그 자체에 죄사함과, 구원약속이 함축된 행위였을까요?
착각은 자유지만 결코 아담의 죄에 있어 죄사함과 구원과는
별개의 문제라는 사실을 유념해야 합니다.
당시 아담에 있어 가죽옷은,
아담 육체의 수치스러운 곳만을 가려 주었을 뿐
구원과는 아무 상관이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당시 희생양은, 아담의 속죄를 위함이나,
구원을 약속하기 위함이나, 제사법을 가르쳐
아담에게 메시야 대망 사상으로 소망을 주기 위함도 아닌 것입니다.
왜냐하면,
아담은 철저하게 회개하여 죄사함을 받았다는 구절은
한 구절도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왜 가죽옷을 위하여 양을 희생시키셨을까요?
그 이유는, 양이 몸부림을 치며 처참하게 죽어 가는 모습 속에서
<너의 죄 때문에 장차 그리스도께서 어떠한 죽음을 당하게 될 것인가>을
아담에게 똑똑히 보여주기 위해서였습니다.
즉, 아담의 죄는, 인간의 저주와 형벌로 끝난 것이 아니라,
죄 없는 하나님에게까지 미쳐 엄청난 고통을 안겨 주었다는 사실을 알게 하여
아담이 받은 저주와 형벌
또한 얼마나 중(重)하여야 하는가를 깨닫게 하는데 있었습니다.
장차 예수님께서는,
아담이 온 인류에게 끼친 죄를 해결하기 위해서
양처럼 처참한 죽음을 당하게 될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아담의 옷을 위해 죽은 양은
장차 십자가 위에서 죽으실 예수 그리스도의 처참한 모습을 보여 주셨고
피묻은 양의 가죽은 예수 그리스도의 피묻은 의의 옷을 보여 주었습니다.
여기서 아담은 사탄에게 하시는 보복선언을 통해
메시야 계획을 알게되어 아내의 이름을 <산 자의 어미>라 했고
또 자기들의 옷을 위해 죽어가는 희생양을 보고
제사법을 알게 되었음이 분명합니다.
메시야와 제사법과는 자신과 아무런 관계가 없지만
자기의 후손들에게 아담창조에서부터 어린양 희생까지 있었던
모든 하나님의 말씀과 번제법을 가르치면서
메시야 대망사상을 주입시킨 것이 분명합니다.
아담에게는 제사를 명하신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설사 아담을 향하여
<장차 태어날 후손들에게 이와같은 제사법을 가르치라> 명했을지라도
또한 아담이 그와같이 번제를 드렸다할지라도
아담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메시야의 모형인 제사법을 가르쳐주었다고 해서
제사를 드리는 모든 사람들에게 구원이 보장된 것은 아니었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아담에게 번제법을 지시하셨다 할지라도
구원이 보장된 것은 아닙니다. (신28:1이하).
예수 그리스도의 모형인 제사를 아무리 드려도,
아담 같은 종교적인 짐짓죄를 범할 경우에는
절대로 용서받지 못하고 죽었기 때문입니다.
(레10:1-2. 출19:11-12. 민17:12-13. 등).
왜 아담에게 제사법을 가르쳐 주셨을까요?
아담이 저주를 받을 당시 아담의 후손들은
아직 한 사람도 태어나지도 않았을 때 였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인류의 대표자인 아담에게 제사법을 가르쳐
후손들에게 전하기를 원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담에게 가르쳐 준 제사법은, 후손들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이제 앞으로 태어날 후손들은,
하와의 이름속에 함축되어있는
그리고 아담이 입고 있는 가죽옷 속에 함축되어 있는
죄와 저주에서 구원해 줄 메시야를 대망하며 제사를 드려야 했습니다.
5. 아담이 용서받지 못한 이유
아담은 용서가 불가능한 짐짓죄. 고범죄를 범했습니다.
(히10:26-27) <우리가 진리를 아는 지식을 받은 후, 짐짓 죄를 범한 즉,
다시 속죄하는 제사가 없고 오직 무서운 마음으로 심판을 기다리는 것과
대적하는 자를 소멸할 맹렬한 불만 있으리라
모세의 법을 폐한 자도
두세 증인을 인하여 불쌍히 여김을 받지 못하고 죽었거든 ---
살아 계신 하나님 손에 빠져 들어가는 것이 무서울찐저 --- >
히6:4-8 <한번 비췸을 얻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예한 바 되고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 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케 할 수 없나니--->
히10:26-28과 히6:4-8절은
아담의 범죄와 저주에 뿌리를 두고 하신 말씀입니다.
아담은 성령이 충만한 상태에서, 하나님이 되려고 신성모독 죄를 범했으며,
100% 완전한 지혜를 받은 상태에서
거룩한 지성소와 지성물을 즉 하나님 자리를 범했습니다.
그 결과, 온 인류의 대표자였던 아담은,
천하보다 귀한 후손들의 그 많은 영혼들을 지옥불로 몰아 넣고 말았습니다.
요일5:16 <누구든지 형제가
사망에 이르지 아니한 죄 범하는 것을 보거든 구하라
그러면 사망에 이르지 아니하는 범죄자들을 위하여 저에게 생명을 주시리라.
사망에 이르는 죄가 있으니 이에 대하여 나는 구하라 하지 않노라
모든 불의가 죄로되 사망에 이르지 아니하는 죄도 있도다>
생명에 이르는 죄는 윤리도덕적인 죄를 말하며,
사망에 이르는 죄는, 히6:4-8과 히10:26-27절과 같이 성도가 지은
성령훼방죄나 신성모독죄로 종교적 범죄를 말합니다.
아담은 용서가 불가능한 사망에 이르는 죄를 범했습니다.
호6:7 <저희는 아담처럼 언약을 어기고 거기서 내게 패역을 행하였느니라>
고전15:22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
이와 같은 사실을 볼 때,
하나님의 어전 침해사건은 용서가 불가능한 종교적 범죄인 것입니다.
그래서, 아담의 범죄는,
큰 저주를 몰고 후손들의 영혼에 까지 큰 타격을 주었습니다.
6. 아담의 죄는 어떤 결과를 가져왔는가?
보십시오! 아담의 죄 때문에,
얼마나 많은 영혼들이 지옥을 채워가고 있는가를!
그러므로, 아담과 같은 죄를 범한 일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많은 후손들이 지옥에 가 있는데,
온 인류를 꺼지지 않는 지옥 불로 몰아 넣었던 장본인이 구원을 받았다면,
하나님은 공의의 하나님이 아닌 것입니다.
성경에도, 영혼의 살인은 육체 생명의 살인죄보다
더 무서운 형벌을 받을 것이라 하셨습니다.
어린 소자 한 사람 영혼만 실족시켜도
그 사람에게 화가 있을 것이라고 했거늘,
하물며 그 많은 인류를 실족시켜 지옥 불에 빠뜨린 아담이
어찌 구원을 받을 수 있겠습니까! (눅17:1-2).
그러므로 아담은 온 인류를 죽인 영혼의 살인자이므로
구원을 받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정녕 죽으리라>라고 하신 것은,
육체적인 사망만을 의미한 것이 아니라,
영과 육이 아울러 지옥으로 가는
둘째 사망까지를 다 포함하고 있는 것입니다. (계20:6)
하나님의 염려
1. 선악을 아는 일에
여기서 선악이라고 할 때,
인간과의 관계 속에서 이해되어지는, 도덕적인 선악개념이 아닙니다.
인간의 도덕적인 선악개념은 타인의 유익을 위한 것이면 선이요,
타인에게 손해를 끼치면 악입니다.
그러나, 성경에서의 선악개념은,
하나님과 인간과의 관계 속에서만 이해되어 질 수 있는
신앙적인 선악개념입니다.
하나님께 순종하면 선이요, 불순종하면 악입니다.
여기서 아담이 선악을 알았다는 것은,
악에 대한 결과를 체험적으로 알게 되었다는 의미입니다.
불순종에 대한 결과는
하나님의 저주와 함께 아담의 삶의 현장을 통해서 나타났을 때,
그 비참함을 체험적으로 알게 되었음을 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선에 대한 결과가 얼마나 행복한지 다 아시며,
또한, 악에 대한 결과가 얼마나 비참한지 체험없이도 다 알고 계십니다.
그러나, 아담은 저주를 받고서야
악의 결과가 얼마나 비참하고 처참한지 알게 된 것입니다.
2. 우리 중 하나같이
<선악을 아는 일에 우리 중 하나 같이 되었으니>
여기서 <우리 중>이란 성부-성자-성령을 말합니다.
그렇다면 삼위일체 하나님 중 누가 선악을 체험적으로 알게 되었다는 말입니까?
악의 결과를 누구같이 알게 되었단 말임니까?
삼위일체 중 인간의 옷을 입고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은
악에 대한 결과가 얼마나 비참한가를 십자가 고통속에서 실감하신 분이십니다.
성부와 성령은 예수님 같이 인간들을 통해서
자가 고통을 당하지는 않으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가난. 질병. 고문. 채찍. 십자가 고통 등
뼈가 아픈 고통을 당하셨는데 지금까지 행복했던 아담도
그와같은 고통을 알게 되었음을 말합니다.
즉, 악의 결과을 체험으로 아는 일에 하나님처럼 되었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동정녀 탄생하기 전부터,
악에 대한 체험적 지식을 이미 소유하고 계셨기 때문에,
탄생 전부터 예수님은 저주와 사망의 공포를 몸소 체험하신 것처럼 아시고,
자신의 고난에 대해서 많은 선지자들을 통해 기록하도록 하신 것입니다.
(사53장. 시22장. 시41장. 시55장. 시 69장. 시109장 등)
그러나 하나님과 인간과는 차이점이 있습니다.
아담은, 선악지식을 체험을 통해 얻었으나,
예수 그리스도는 체험이나 경험을 통하지 않고도,
처음부터 지옥의 고통이 어떠한지 천국의 행복이 어떠한지 하는
체험적인 지식을 소유하고 계셨습니다.
그러므로, 비록 아담이 선악을 아는 일에 하나님과 같이 되었다 할지라도,
아담은 유한한 피조물이요,
예수 그리스도는 무한한 창조주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경험이 없이도 선의 결과는 영생이요,
악의 결과는 사망이라는 그 무서운 상태까지도 다 알고 계시기 때문에
지옥에만은 가지 말라고 하신 것입니다.
아담이 하나님처럼 선악을 아는 체험적 지식을 갖기 전에는,
선과 악에 대해서 이론과 지식으로만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불순종으로 인하여 이론이 실제상태로 나타났을 때,
돌이킬 수 없는 후회와 탄식으로 변하게 됩니다.
오늘날 많은 기독교인들도 아담과 똑같습니다.
당해보지 않고서는 그 고통이 어느 정도인지 아는 자가 없습니다.
<지옥의 유황불은 심히 뜨겁고 무서워 견딜만한 곳이 못됩니다.
그러니 철저하게 회개하고 지옥만큼은 가지마라> 외쳐도
지옥이 얼마나 무서운 곳인지 천국이 얼마나 행복한 것인지
심각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없습니다.
그래서 <천국가면 심심하겠다.
왜 항상 찬송만 부르고 생명수 강가나 나들이 하고 무슨 재미로 살아!>
<지옥! 모든 사람들이 다 가는 곳인데 뭐!>하면서
천국과 지옥을 우습게 여깁니다.
그러나 천국과 지옥에 대한 이론이 실제상황이 되었을 때에는
체험으로 알게 될 때에는 후회하고 탄식해도 울부짖어도 때는 늦은 것입니다.
아담이 그랬습니다.
정녕 죽는다고 한 것을 이론적으로만 알았을 때
그 죽는다는 말을 심각하게 생각지 아니한 것입니다.
왜 ? 당해 보지 안했으니까요.
에덴동산에서 추방당하다.
1. 아담이 추방된 장소
아담은 저주을 받고, 에덴 성전으로부터 추방되었습니다.
즉, 하나님 어전으로부터 쫓겨난 것입니다.
그러나 쫓겨난 곳은, 에덴 성전으로부터 그리 멀리 떨어지지 않는 곳이었습니다.
가인이 아벨을 죽이고,
여호와 앞을 떠나 에덴 동편 놋 땅에 거한 것을 보면
아담부부는 가인보다 에덴 성전과 더 가까운 곳에서 생활하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아담부부나 가인은 비록 에덴성전과는 떨어졌다 할지라도
같은 에덴 지역에서 살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2. 추방 당시 아담의 심정
아담은, 하나님께서 지어 입혀주신 가죽옷을 입고 에덴에서 추방당했을 때,
한없이 울고 또 울었을 것입니다.
불신앙과 불순종으로 인항 후회와 탄식,
죄의 결과에 대한 불안과 공포, 자기 자신에 대한 실망과 좌절,
에덴 밖에서의 비참한 생활들이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이
마음을 무겁게 했지만
무엇보다도, 하나님과의 영원한 이별이
아담의 생애가운데 가장 비참한 일이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과의 이별은 영원한 형벌을 의미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인간이 가장 비참한 때는 하나님의 곁을 떠나가는 것입니다.
아담의 죄는 가장 행복했던 에덴동산을 슬픈 눈물의 이별 장소로 만들었고
하나님의 얼굴을 두 번 다시 뵈올 수 없는 가슴 아픈 장소로 만들었습니다.
3. 사탄과 인간의 저주의 차이점
사탄과 그 후손들(추종자들)에게는 100% 공의를 시행하여,
영원한 저주를 선고하셨습니다. (마25:41).
아담에게도 100% 공의를 시행하여 영원한 저주아래 두었습니다.
그러나, 그 후손들을 위하여는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를 쫓아
구원해 줄 메시야를 약속하셨습니다. (창3:21).
4. 에덴에서 내 보내신 이유
하나님은 거룩하신 속성 때문입니다.
그래서 더럽고 추한 죄인과는 함께 거하실 수 없었던 것이며,
두 번째는, <이것을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고 법으로 정하셨기 때문에,
그 법대로 추방과 함께 사형을 선고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에덴동산은 지극히 거룩한 하나님의 어전입니다.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하셨습니다.
그런데 더러운 죄인과 어찌 함께 머물을 수 있겠습니까!
5. 근본된 토지를 갈다.
근본된 토지를 갈았다는 것은,
땅을 개간하므로 생계를 위한 노동이 시작되었다는 뜻입니다.
이제 땅은 경작할 사람이 생겼고,
들에나 밭에는
사람의 경작을 필요로 하는 모든 것들이 생겨나기 시작했습니다.
창2:5 <경작할 사람도 없으므로, 들에는 초목이 아직 없었고
밭에는 채소가 나지 아니하였으며 --->
창2:5절에 있는 초목이나 채소는
사람의 경작을 필요로 하는 채소류, 곡식류 등 모든 것을 총망라합니다.
이것들이 생긴 것은, 죄인들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자연은총이요,
둘째는, 종신토록 이마에 땀이 흐르도록 수고해야
그 소산을 먹도록 하신 저주의 성취입니다.
이러한 육체적 노동을 하다 보면,
피로에서부터 각종 질병들이 유발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생로병사는 다 죄의 결과로부터 온 것입니다.
여기서 주는 영적인 교훈은 모든 죄인들은
강퍅해진 심령의 밭을 회개의 쟁기로 늘 갈아엎는 작업을 일평생 해야 하며
메시야를 대망하며 무딘 양심과 죄로 오염된 마음을 갈아엎어야 하며, (호10:12)
죄의 보응도 순히 받아야 됨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레26:41. 믹6:9 등)
사탄과 인간의 차이점
1. 사탄과 인간이 같은 점
아담과 사탄 루시퍼와 같은 점을 비교해 봅시다.
<에덴동산이란 장소가 같음>.
루시퍼가 있었던 장소가,
하나님의 보좌가 있는 가장 거룩한 에덴동산이었듯이, (겔28:13).
아담이 있었던 장소도, 하나님의 임재의 장소인 에덴동산이었습니다. (창2:8).
◐ 창조 목적도 같음
루시퍼를 창조하신 목적은, 예배를 통해서 영광을 받으시는 것이었습니다.
아담도 예배를 통해서 영광을 받으시려고 창조하셨습니다.
◐ 죄도 같음
사탄이 교만하여, 하나님처럼 되어 보려고
천국의 법도를 어기고, 신성 모독죄를 범했습니다.
아담도 율법을 어기고, 하나님처럼 되어 보려는 교만으로
신성모독죄를 범했습니다.
◐ 추방도 같음
사탄도 저주를 받고, 하나님의 성산 에덴에서 추방되었듯이
아담부부도 저주를 받고 에덴동산에서 추방되었습니다.
◐ 저주도 같음
저주받은 루시퍼가, 하나님과의 관계가 영원히 단절되었듯이
아담부부도, 저주를 받고 추방된 후,
하나님과의 관계가 영원히 단절되었습니다.
◐ 지옥에 떨어진 것도 같음
아담은 이미 지옥 불에 들어갔지만
사탄은 예수 그리스도 재림 후, 천년동안 무저갱에 갇혔다가
천년 후 영원한 불 못에 들어갈 것입니다.
2. 사탄과 인간의 차이점
창조에 있어서, 사탄은 말씀으로 창조되었으므로,
육체가 없어 눈에 보이지 않으며, 초자연적인 힘을 가졌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흙(D.N.A)으로 창조되었으므로,
육체가 있어 유한한 존재입니다.
당시 아담 부부상태
1. 벌거벗은 상태였습니다.
창2:25 보면, 두 신랑 신부는 벌거벗은 상태로 결혼했습니다.
왜 벌거벗고 결혼했을까요?
그때는 과학문명이 발달되지 않아 옷을 만들 수 없어서 였을까요?
아니면, 두 부부 밖에 없었기 때문에 부끄러워할 필요가 없어서 였을까요!
하나님께서 옷을 만들어 주실 능력이 없어서 였을까요!
하나님께서는 아무 죄가 없는 천사들에게도
극히 아름다운 옷을 만들어 입히셨습니다. (겔28:13이하).
하나님의 능력은 인간의 과학의 힘을 빌리지 않고도
얼마든지 아름다운 옷을 만들어 입히실 수 있습니다.
그런데 왜 옷을 입히지 않는 상태에서 결혼을 시키셨을까요?
2. 부끄러움이 없는 상태였습니다.
두 사람에게 옷을 지어 입히지 아니하신 이유에 대해서는,
복음과의 관계를 떠나서는 설명할 길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아담 부부와의 관계를
그리스도와 교회와의 관계로 성경이 설명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엡5:31).
성경은 구속史를 다루고 있는 책입니다.
육체를 가진 한 가정史를 다루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아담부부의 상태도 구속사 속에서 이해되어야 합니다.
육체가 벌거벗었다고 그것이 진정한 부끄러움일까요?
진정한 부끄러움은 죄로부터 왔습니다.
옷은 아담이 죄를 지은 후부터 동장했습니다. (창3:7)
옷의 목적은 부끄러움을 가리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당시 두 사람은 무죄 상태였습니다.
죄가 없는 상태에서 그들은 하나님 앞에 서 있었습니다.
무슨 옷이 필요했겠습니까!
인간이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 속에 있다면 부끄러울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죄인은 하나님 앞에 설 수가 없습니다.
가장 수치스럽고 부끄럽고 추한 것은 죄이기 때문입니다.
죄는 은밀한 죄가 있고, 외부에 드러난 죄가 있으나,
하나님의 눈을 가리울 수 있는 휘장은 세상에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축복
1. 아담부부의 축복
주례자이신 하나님께서는, 아담 부부를 축복해 주셨습니다.
◐ 첫 번째, 축복은 (창1:27-28)-<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 두 번째 축복은-<땅을 정복하고, 모든 생물을 통치하라> 문화창조의 복
◐ 세 번째 축복은, <내가 온 지면의 씨 가진 열매 맺는 모든 나무를 너희에게 주노니 너희 식물이 되리라>
2. 생물들의 축복
모든 물에 있는 생물들과 새들에게 생육하고 번성의 축복은
다섯째 날 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먹을 수 있는 식물에 대한 축복은,
아담 부부가 축복을 받던 그 날 곧, 여섯째 날에 있었습니다.
그 이유는, 모든 동식물들은, 인간 수하에 두셨기 때문에
아담이 축복을 받을 때, 축복을 받았고 아담이 저주를 받을 때 같이 저주를 받았습니다.
(창 2:30. 창3:17-18)
그들에게 주신 식물은 모든 푸른 풀이었습니다.
그들의 먹이감인 푸른 풀은, 하등식물로서 무종자 식물입니다.
타락 전에는 모든 짐승들이 푸른 풀만 먹었으나,
타락 후에는 육식 동물로 변해 가며 사나워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소, 양, 염소, 노루, 사슴. 비둘기 등은
타락 전과 같이 푸른 풀이나 곡식류만 먹고 살았습니다.
그래서 정결한 동물로 인정되어, 하나님의 제물로 사용되었고,
또한 그리스도의 모형인물이 되었습니다. (레1장- 2장. 레11장)
생물들은, 죄 없는 아담이 다스릴 때가 행복했습니다.
왜냐하면 살생과 잡아 먹히는 일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의 축복은 곧 동식물들의 축복이었습니다.
(롬8:20-23).
하나님의 평가
하나님께서 아담의 결혼식을 마치시고
<하나님이 그 지으신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창1: 31)>고 평가하셨습니다.
먼 미래를 현재처럼 보고 계신 하나님께서,
아담의 타락이 눈앞에 있는데도 불구하고
이런 평가를 하실 수 있을까라고 생각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과거와 미래를 다 알고 계시지마는,
인간의 현재 상태를 중히 여기시기 때문에
현재의 상태를 보시고 평가하신 것입니다.
베드로를 보십시오! 곧이어 하나님의 뜻을 가로막아 설 줄 알면서도,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니이다>고
신앙을 고백한 베드로를 향하여
<바요나 시몬아 ! 네가 복이 있도다---
너는 베드로라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고 칭찬하셨지만, ( 마16:15-23)
또 금방 죄를 범하자
<사탄아 내 뒤로 물러나라 !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고 책망하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진정한 평가는,
주께서 재림하시는 날,모든 만물이 회복되고,
거룩한 성도들이 하나님 앞에 모였을 때 하실 것입니다.
마치 타락하기 전,
아담과 그 아내가 하나님 앞에 서 있었을 때 평가하셨던 것처럼 ---
에덴동산은 장차 나타날 지상 천국의 모형입니다.
장차 신천 신지와 새 예루살렘 성이 이루어지는 날,
그리고, 그의 백성들이 하나님께 찬양과 경배를 드리는 날
<하나님 보시기에 심 히 좋았더라>고 평가하실 것입니다.
결혼의 조건
1. 남자는 부모를 떠나야 한다.
오늘날 남녀의 결혼은 여자가 부모를 떠나야 합니다.
그러나 창2:24의 남녀의 결혼의 조건은
엡5:31 절에 입각하여 해석해야 성경적입니다.
성경은 육신의 문제를 다루고 있는 책이 아니라,
구속사와 연관된 사실을 다루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와 교회와의 신비적 연합의 모형이 바로 아담의 결혼입니다.
그렇다면,
아담의 결혼의 조건도 구속사 속에서 해석해야 합니다.
(엡5:30. 고전12:27. 엡1:2).
창2:24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 아내와 연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
엡5:31 <사람이 부모를 떠나서 그 아내와 합하여 그 둘이 한 육체가 될지니,
이 비밀이 크도다 !
내가 그리스도와 교회에 대하여 말하노라!>
예수께서는 성도와 연합하기 위해서 천국을 떠나,
인간의 문화권 안으로 들어오셨습니다(빌2:6-10).
즉 교회와 연합하기 위해서 상부 하나님 곁을 떠나 이 땅으로 오신 것입니다.
앞으로의 재림도 마찬가지입니다.
2. 하나님은 일부일처를 만드셨다.
하나님께서는 일부다처주의를 원하지 않으셨습니다.
만약 일부다처제가 필요했다면
아담의 갈비뼈를 5개이든 6개든 빼서 아내를 많이 만드셨을 것입니다.
왜 아내 하나만 만드셨는지 그 이유에 대해서 성경은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말2:15 <여호와는 영이 유여하실지라도 (풍성하실찌라도)
오직 하나를 짓지 아니하였느냐 어찌하여 하나만 지으셨느뇨.
이는 경건한 자손을 얻고자 하심이니라>
그런데, 아담의 후손들은 일부다처주의를 추구하다가 멸망했습니다.
(창4:16-24참조)
부부간의 최고의 도덕률은 한 남편에 한 아내이며,
그 외의 이혼이나 동성연애, 등은 창조 원리에 위배되는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는 신약 교회의 모델입니다.
남편도 하나요, 아내도 하나인 것 같이,
그리스도도 하나요, 교회도 하나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두 명의 하와가 필요없었듯이,
두 종류의 교회도 필요 없었습니다.
그리스도도 하나요, 교회도 하나일 때,
그 교회에서 한 하나님을 섬기는 경건한 자손들이 생기게 되는 것입니다.
인간의 타락과 저주
1.타락의 연대
진화론에서는 창세기의 년대를 몇 십억전 몇 억년전 등으로 보지만
성경의 역사는 진화론의 년대를 따를 수 없습니다.
아담에서부터 열왕기 시대까지 역사의 년대를 연구해 보면
절대로 진화론 주장과 같은 년대는 나오지 않습니다.
그래서 창세기 년대를 B.C.4000년경으로 보고 있으며
성경은 아담의 타락을 실제로 일어난 역사적 사실을 다루고 있습니다.
아담에서부터 요셉까지의 년대를 살펴보십시오 !
몇 억만년이니 몇 억년이니 하는 가설은 절대 나오지 않습니다.
아담이 6일만에 창조되었기 때문입니다.
2. 타락의 장소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땅 중에서 에덴을 구별하셨고
그 중앙에 선악과 생명나무를 세워 놓으신 후 아담을 창조하셨고
그 아담을 에덴동산으로 인도하셨습니다.
그곳에서 아담은 하나님을 섬겼고 만물을 다스렸습니다.
이곳이 곧 예루살렘이며 아담이 만물을 통치하며 거했던 곳이며
하나님의 어전인 에덴동산에서 타락했습니다.
3. 유혹자
천지창조를 지켜 보았던 타락한 천사장 루시퍼는
하나님의 창조목적을 실패로 돌리기 위해
들짐승 뱀을 이용하여 여자를 먼저 꾀었고
여자를 통해 아담을 타락시켰습니다.
뱀은 자기의 지혜로 인한 교만 때문에,
사탄의 도구로 발탁되어 사탄 왕국의 일등공신이 되었습니다.
당시 뱀의 형태와 특성
1. 당시 뱀의 형태
우리가 흔히 알기로 창3장에 나온 뱀을 파충류 중 하나로,
살모사나 독사나 구렁이 같은 존재일 것이라고 추측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아담부부를 꾄 뱀의 그림들을 보면
꼬불꼬불한 뱀이 선악과 나무를 휘감고 입을 벌려 여자를 꾀고 있는 것을 많이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파충류의 뱀이 아니라
<들짐승 뱀>이었다고 분명하게 밝히고 있습니다.
성경은 과학책이 아니므로 과학적으로 복잡하게 다루지 아니하고
당시 뱀은 들에 사는 들짐승으로서
온혈 태생한 젖빨이 동물로서 포유동물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창세기 3장에 나온 뱀을
거북이나 악어, 뱀, 도롱뇽 등은 파충류로 생각하면 안 됩니다.
들짐승 뱀이 포유동물이었다는 사실은 본문에서 찾아 볼 수 있습니다.
창3:14 <네가 모든 육축과 들의 모든 짐승 보다 더욱 저주를 받아 --->에서
찾아볼 수 있으며, 창1:24-25절에도 파충류에 대해서는
<기는 것과 --- 땅에 기는 모든 것을 그 종류대로 만드시니 --- > 라고
분명하게 구분 짓고 있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든 파충류를 들짐승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창세기 3장의 뱀은 파충류가 아닌 포유동물로
새끼를 낳아서 기르는 젖빨이동물인 것입니다.
2. 당시 뱀의 특성
하나님께서 수많은 생물들을 만드실 때, 뇌의 기능도 다양하게 만드셨습니다.
그 중에 들짐승 뱀은 모든 짐승들보다 뇌의 기능이 뛰어났습니다.
짐승마다 바다의 생물마다 아이큐가 각각 다릅니다.
어떤 생물은 아이큐가 높은 짐승이 있고,
어떤 것은 아이큐가 낮은 짐승도 있습니다.
창3:1의 "간교" 란, 히브리어로 아룸인데,
이 아룸은 <영리한. 영악한. 지혜로운> 이란 뜻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창3장에 등장한 뱀을 비유하여
<너희는 뱀같이 지혜로와라(마10:16)>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한역본이 "간교하다" 번역한 것은 뱀이
사탄의 도구가 되어 여자를 꾈 때 직선적으로 꾄 것이 아니라
뱅뱅 돌려가며 간교하게 유혹하였기 때문입니다.
만약에 하나님께서 동물을 창조하실 때,
악의적으로 간교하게 만드셨다면 죄의 원인자는 하나님 자신이 되는 것이며,
또한 <들짐승 중에 뱀이 가장 간교> 했다면,
창조된 모든 짐승들이 다 간교했는데
그 중에 더 간교한 놈은 뱀이었다는 결론이 됩니다.
그리고서도 어찌 <지으신 모든 것을 보시니 하나님 보시기에 좋았더라>고
평가하실 수 있겠습니까 !
좋았다고 하는 말을 히브리어로 하면 톱입니다.
톱은 <선하다. 좋다>입니다.
그러므로, 악의적으로 간교하게 창조하신 것이 아니라
각 생물들마다 각자에게 주어진 높고 낮음의 아이큐가 있음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인간과의 언어상통 문제
1. 당시 동물들의 언어소통
당시 모든 짐승들이나 새들은 어떤 소리를 냈을까요?
그때는 무죄 상태므로,
모든 짐승들이나 새들이 인간의 말을 했을 것이라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 각종 짐승들과 각종 새들과 각종 물고기들을 창조하실 때,
그들만이 통할 수 있는 언어를 주셨습니다.
그래서, 종류마다 소리가 다르고, 하는 행위가 다릅니다.
비록 인간이 타락하여,
만물까지 도매금으로 저주를 받았다 할지라도,
당시의 소리들은 지금도 그대로 보존되고 있는 것입니다.
각 종류대로의 모든 생물들은 자기들 끼리의 언어상통이 있습니다.
이 언어상통은 창조 때나 현재나 변함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아담 당시의 생물들은, 인간의 언어를 사용했다거나,
혹은 동물들만이 가지고 있는 언어상통이
아담과도 통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추론할 필요는 없습니다.
2. 그러면 유혹 당시 뱀은 어떤 언어를 사용했을까요?
동물이 인간의 말을 할 수 있을까요?
동물도 인간의 말을 할 수 있습니다.
성경에도 이런 예가 나오고 있습니다.
민22:28 에 보면, 하나님의 도구로 쓰임 받았던 나귀가
인간의 말을 사용하여 선지자 발람을 깨우친 사건이 나옵니다.
여기서 나귀는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하였기에 나를 이같이 3 번 때리느냐?>
<나는 네가 오늘까지 너의 일생에 타는 나귀가 아니냐!>
<내가 언제든지 너에게 이같이 하는 행습이 있더냐?>고 말했습니다.
현재도 인간이 훈련만 시켜도 말을 하는 구관조나 앵무새를 보십시오.
얼마든지 말을 하지 않습니까!
하물며 초자연적인 힘을 가진 사탄이,
동물을 사용하여 자기의 목적을 달성코자 함에야 당연하지 않겠습니까 !
사탄의 궁극적 표적은 누구였는가?
1. 궁극적으로 하나님을 겨냥했습니다.
사탄의 표적은 여자가 아니라 아담이었습니다.
자신의 정체를 드러내 직선적으로 아담을 공격하게되면,
실패로 돌아갈 염려가 있어,
사탄은 뱀과 여자를 유혹의 징검다리로 사용했습니다.
뱀에게 주어진 사탄의 명령은 <여자를 유혹하는데만 성공하라 !
그리하면 그 나머지는 여자가 해낼 것이다>였습니다.
사탄의 궁극적 목적은,
하나님과 아담 사이를 이간 붙여 영원한 원수로 만든 것이며,
하나님의 창조사역을 헛수고로 돌리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사탄의 궁극적 목적은 하나님께 대한 두 번째 도전인 것입니다.
천국에서도 반역행위가 있었습니다. (겔28:13).
사탄은 사랑의 교제를 하시고자 창조하신 인간을 타락시킴으로,
하나님의 창조목적을 실패로 돌리고자 했습니다.
하나님은 계획하고 세울지라도,
사탄 자신은 헐고 무너뜨리겠다는 사탄의 도전적 행위인 것입니다.
2. 왜 뱀과 여자를 이용했을까요?
타락 전에는, 모든 동물들과 인간이 친밀한 관계에 있었습니다.
사납지도 않았고, 강자가 약자를 공격하지도 않았습니다.
아담의 통치 아래 있는 짐승들은,
마치 집짐승 저럼 온순하여 인간을 잘 따랐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담으로 하여금 통치하도록 그렇게 만드셨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근거는 노아 홍수 사건에서 볼 수 있습니다.
노아 홍수 이전만 해도 동물들과 인간은
얼마나 친밀한 관계에 있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홍수 일주일 전에 부정한 짐승과 정결한 짐승들이
자기 스스로 노아 방주로 나아왔습니다(창6:20. 창7:9. 창7:15 )
노아가 호랑이 잡으러 뛰어다니거나,
사자 잡으러 뛰어 다닌 것이 아니라,
짐승들 스스로가 노아에게 나아온 것입니다.
만약 짐승들이 지금처럼 사나웠다면
<정결한 짐승은 일곱 쌍씩. 부정한 짐승은 두 쌍씩 방주에 넣으라 >는
명령을 지키기 위해서 순종했다면
일주일 동안 과연 몇 마리나 잡았겠습니까?
그러므로,
노아 당시만 해도 모든 동물들은 풀만 먹고사는 초식동물이었음이
노아 방주 사건에서 나타납니다.
만약 그렇지 않았다면, 일년간의 방주 속에서 강한 짐승은,
약한 짐승을 잡아 먹었을 것이고
약한 짐승들은 흔적조차 없이 사라져 종자도 남지 않았을 것입니다.
당시 부정한 짐승과 정결한 짐승을 구별했던 것은
모세 오경이 쓰여질 당시, 제사용과 그렇지 않는 것으로 구별되었습니다.
蔽一言(폐일언)하고 사탄은 인간과 친밀한 뱀을 선택하여
자연스럽게 접근하도록 했습니다.
그런데 하와는,
금단의 과일에 대해서 하나님께 직접들은 것이 아니라,
남편을 통해 들었기 때문에 잘못 들었을 가능성도 있고,
또 남자는 여자의 말을 잘 듣는다는 약점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음이 분명합니다.
사탄의 전술은 발람과 같아서
하나님으로 하여금 친히 아담을 저주하도록
죄만 짓도록 만드는데 그 목적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축복권과 저주권이
오직 절대주권을 가지신 하나님께만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신 28:1이하).
이러한 사탄의 전술은 술사 발람을 통해서도 나타났습니다.
민25:1∼15에 보면, 모압 왕의 초청을 받은 술사 발람은,
자기가 친히 저주하지 않고 하나님으로 하여금 친히 자기 백성을 저주하도록
모압 왕에게 방법만 제시해 주고 떠나갔습니다.
능력 있는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사랑하고
그들과 함께 있는 한 모압 왕 당신은 그 어떤 연합군을 동원해도
그 백성을 쳐 이길 수 없습니다.
이길 수 있는 방법은 오직 한 가지.
<그 백성들로 하여금 죄를 짓도록 유도하라 !
그 나머지는 그들의 하나님이 알아서 하실 것입니다>였습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속성을 교묘하게 이용했던 사탄의 전략작전은 100% 적중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은 사탄의 그물에 걸려
하루에 2만 4천명씩 염병으로 죽어 갔습니다.
창3:16-19의 저주내용을 보십시오!
사탄의 전략이 얼마나 적중했습니까 !
뱀과 여자를 통해 죄를 지은 아담에게 하나님의 심판은 준엄했습니다.
첫째 하나님과 원수가 되었고
둘째 사망의 공포아래 놓이게 되었고
셋째 육체적 노동이 부여되었고
넷째 잉태와 해산의 고통이 가중되었으며
다섯째 땅이 저주를 받아 인간의 수고의 대가를 100% 내주지 않게 되고, (대상21;1∼13)
여섯째 지옥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뱀을 통한 사탄의 유혹
1. 당시 아담은 어디 있었을까요?
여자가 뱀의 꾀임을 받을 때 아담은 어디 있었습니까?
많은 사람들은 아담이 없을때 여자 혼자 있을때
유혹을 받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을 자세히 보면 아담은 분명 아내와 같이 있었습니다.
그 증거는 여자가 유혹을 받을 때,
단수가 아니라 복수형으로 쓰인 것이 증거입니다.
<너희>라는 복수형이 7번이나 나온 것을 보면,
아담이 동석해 있었음을 분명하게 알 수 있습니다.
*. 창 3:1…너희더러 --
*. 창 3;4 너희가--
*. 창 3:5 너희가-- 너희 눈이--
*. 창 3:6 자기와 함께 한 남편에게도 주니--
*. 창 3:7 그들의 -- 자기들의 눈이 밝아 --
이것은 2절과 3절에 여자가 하는 말가운데 있는
복수형 3번을 제하고도 7번이나 됩니다.
그리고 <같이, 함께> 등은 히브리어로 임이라고 합니다.
이(임)이란 "같이. 함께" 로 아담이 아내와 함께 있었음을 증명하고 있는 말입니다.
또한 " 그들의 눈이 밝아" 란 말은 같은 시간에 먹었다는
동시적 사건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2. 사탄의 유도 질문
창3:1<여호와 하나님의 지으신 들짐승 중에 뱀이 가장 간교하더라
뱀이 여자에게 물어 가로되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더러 동산 모든 나무의 실과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
(2) 여자가 뱀에게 말하되 동산 나무의 실과를 우리가 먹을 수 있으나-
(3) 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실과는
하나님의 말씀에 너희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 하셨느니라>
뱀을 통한 사탄의 눈은 여자를 보고 말했으나,
말의 내용은 두 사람을 다 포함시켰습니다.
그리고, 사탄의 유도질문에 대한 대답은 여자가 했습니다.
<하나님이 너희더러 한 중앙에 있는 선악과는 먹지 말라 하시더냐?>고
직선적으로 묻게 되면 그 여자는 <그렇다>라고 말 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작전이 실패로 돌아갑니다.
그래서 빙빙 돌려서 물어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참으로 동산 모든 나무의 실과를 먹지 말라고 하시더냐?>
지혜롭게 빙빙 돌려 헷갈리게 해서 유도 질문한 것입니다.
그래서 선악과에만 국한시켜 묻지 않고,
모든 나무를 포함시켜 물음으로써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 얼마나 정확하게 알고 있나를 시험해 본 것입니다.
금령에 대한 말씀은 아담에게만 하셨기 때문입니다.
말씀의 정확성 여부를 알고 나면,
죄로 유혹할 수 있는 방법론은 쉽게 나오기 마련입니다.
이때, 하와는 사탄의 전술에 말려들어, 말씀을 가감하고 말았습니다.
<창3:2-3 동산나무의 실과를 우리가 먹을 수 있으나,
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실과는
하나님의 말씀에 너희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 하셨느니라 >
<만지지도 말라> 말씀을 더했습니다.
<죽을까 하노라> 말씀을 감했습니다.
<반드시 죽으리라>의 말씀을 약화시킨 말입니다. (계22:18∼19).
말씀을 가감시킨 이유는,
아담을 통해 들은 과정에서 무심코 들었든지,
아니면 잘못 들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이때 여자는 한가지 거짓말을 덧붙였습니다.
창2:15-17절에 보면 선악과에 대한 경종의 말씀은
아담에게만 했지 여자와 같이 있었을 때 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창2:15-17까지는 복수가 아니라 단수로 나와있습니다.
그런데 여자는 마치 자기와 함께 있었을 때 하신 말씀하신 것처럼 말했습니다.
성경에 보면 여자는 집에 가서 남편에게 배우라고 하신 그 원리가
여기서부터 나온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담에게 아담은 아내에게 하나님은 모세에게 모세는 백성에게
이것이 영적인 성경의 위계질서입니다.
15절- 그 사람을 이끌어--
16절- 그 사람에게 명하여 --
그런데 여자는 뱀을 향하여
창3:2- --우리가 먹을 수 있으나 --
3절- --너희는 먹지도 말고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 --
여자가 성경을 제대로 모르고 있었다는 사실을 안 사탄은
자기의 전략이 100% 성공할 수 있다는 확신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사탄은 3가지 문제를 가지고 여자를 설득시켰습니다. (창 3:4-5).
◐ 첫째-<너희는 결코 죽지 않는다>는 사탄의 말과,
하나님께서 <이것을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는 말과는
그 의미가 천지차이로 다릅니다.
하나님께서 <정녕 죽는다>고 하신 말뜻은 그 영혼과 하나님과의 분리 즉,
천국과 지옥의 분리를 의미했지만 사탄이 <죽지 않는다>는 의미는,
그 과일을 먹는다고 해서 육체생명이 금방 죽게 된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처럼 영원히 살게 될 것이라고 했습니다.
다시말하면 하나님은 육체와 영혼의 두 가지 사망을 다같이 말씀하셨고,
사탄은 육체적 사망만을 말한 것입니다.
◐ 둘째-<먹으면 눈이 밝아진다>고 들짐승 뱀은 유혹했습니다.
즉, 먹는 즉시 인간의 눈은, 천지를 살피는 하나님 눈처럼 되어,
지혜와 명철이 무한하게 될 것이며
눈에 보이지 아니하는 영적인 세계까지도
통찰하게 될 것이라고 거짓으로 유혹했습니다.
◐ 셋째-<하나님처럼 선악을 알게 된다>
하나님처럼 선과 악의 결과를 체험하지 않아도 체험한 것처럼
체험적인 지식을 가지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불순종의 결과는 사망이라고 하셨습니다.
즉, 불순종에 대한 결과가 얼마나 처참한가를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그때 가서 후회하고 탄식해도 소용없는 줄을 알게 될 것이며
그때 가서야 선악에 대한 체험적인 지식을 갖게 될 것입니다.
이러한 지식을 체험적으로 알게 될 때에는
이미 회개할 기회를 놓친 뒤인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은 소 잃고 외양간 고친다는 식으로,
인생의 쓴맛을 보고서야 하나의 체험적 지식을 얻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체험이나 경험이 없이도,
선과 악의 결과에 대해서 실제로 경험하고 체험해 본 것 같은
참된 지식을 소유하고 계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악의적 결과를 체험하기 전에 회개하라고
선지자들을 통해서 목이 터지도록 안타깝게 외치고 계신 것입니다.
그 예로 메시야 고난 장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받을 고난의 고통을
잘 묘사해 놓은 것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시55장. 시 41장. 시 22장. 시 69장. 시109장. 사53장 등 ).
그런데, 마귀는,
체험적인 참된 지혜와 지식은 오직 창조주께만 있는 것이 아니라,
선악과를 따먹는 순간 인간도 소유할 수 있다고 유혹했습니다.
즉, 선악과를 따먹는다해도,
결코 저주를 통해서 체험적인 지식을 갖게 되지는 않을 것이며,
또한 하나님의 거룩한 속성과 창조능력까지 소유하게 될 것임을 말했습니다.
다시 말하면, 인간더러 하나님이 되라는 유혹이었습니다.
사탄은 처음부터 반역자요, 거짓말쟁이가 되어 거짓의 아비가 되었습니다. (요8:44).
사탄의 이름은 디아볼로스 파괴자, 반역자, 반대자, 대항자, 훼방자, 고소자란 뜻입니다.
이단은 어디로부터 출발합니까?
잘못 들음에서 출발하여 성경을 가감함에서 완성을 보게됩니다.
모든 이단 교주들의 잘못된 사상들이 어디에서부터 출발했는가를 살펴보면,
그들이 성경을 잘못 읽고 잘못 듣고, 잘 못 깨달아
성경을 가감한데서부터 비롯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3. 사탄의 말에 설득을 당하다.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란 말은,
이미 금지된 나무인지라,
평상시에는 그 실과에 대해서 두려워하며 먹기를 포기하고
무관심했던 나무였는데,
사탄의 말을 듣고 나서,
그 나무를 관심있게 자세히 살피고 또 살펴보았다는 말입니다.
자세히 본 이유는,
과연 그 실과가,
인간을 하나님처럼 만들 수 있는 능력이 있을까 해서였습니다.
그러자 안목의 정욕이 태동했습니다.
원초적 죄의 근원은, 안목의 정욕에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만가지 죄는 눈으로부터 시작되었음을 알게 해 줍니다.
여자는 그 나무를 유심히 살피고 난 후, 따 먹어볼 가치를 느꼈습니다.
사탄의 말과 같이 될 수 있다는 확신을 갖게 된 것입니다.
<먹음직도 하고> 먹어 볼만한 가치를 느끼고 나니 군침이 돌았고
<보암직도 하고> 또한 안목의 정욕을 채워주기에도 만족할 만큼 보기에도 심히 아름다워 보였고
<지혜롭게 할만큼 탐스러운 나무>였으니
과연, 하나님과 같은 존재로 만들어 주기에 충분해 보였습니다.
미혹에 빠진 하와는 들짐승 뱀이 하는 말이 사실이라고 확신했습니다.
지혜와 권세는 하나님께로부터 옴을 망각하고
피조물인 나무로부터 오는 것으로 착각하여
자신도 모르게 만물 숭배에 빠지고 만 것입니다.
창3:6과 사53장를 대조해 보면 보기 좋은 나무는
전 인류를 저주아래 놓이게 했고,
볼품없었던 그리스도는 전 인류를 구원시켰습니다.
4. 하나님처럼 되기로 결정했다.
하와는 사탄의 유혹에 넘어가
하나님처럼 되기로 결정하고 선악과를 따먹고,
자기와 함께 한 남편에게도 주었습니다.
아담은 하나님 말씀보다도 아내의 말을 더 듣고,
그 선악과를 받아 먹었습니다.
선악과는 하나님의 말씀을 부여해 놓은 자연계시 즉, 성경입니다.
그런데 성경을 범한 것입니다.
인간이 사탄으로부터 죄의 유혹을 받은 것은 죄가 아닙니다.
그러나, 양자택일에서 악으로 결정이 내려지면 그것이 곧 죄요,
악이며, 불순종입니다.
예수님께서도 3번이나 사탄의 유혹을 받았지만,
악으로 결정 내리지 않았습니다(마4:1이하)
하와는, 들짐승 뱀의 유혹으로부터 악으로 결정지어졌고,
아담은 아내의 유혹에 불순종으로 결정이 지어졌습니다.
이때부터 만물 통치권은 마귀에게 넘어갔고
마귀는 이 세상 임금이 되어 천하를 지배하기 시작했습니다.
눅4: 6 <마귀가 천하만국을 보이며 ---
이 모든 권세와 그 영광을 내가 네게 주리라
이것은 내게 넘겨 준 것이므로 나의 원하는 자에게 주노라>
요14:30 <이후에는 내가 너희와 말을 많이 하지 아니하리니
이 세상 임금이 오겠음이라>
(요16:11) <진리를 파수하지 못하고 무너지면
부패한 행위는 자동적으로 따르며>,
한 사람이 죄를 짓게되면,
반드시 다른 사람까지 끌고 들어가는 습성이 유전되었습니다.
아담 타락 후 상태
1. 수치를 느꼈다.
선악과를 따먹은 후,
나타난 결과는 하나님처럼 전지한 눈이 열린 것이 아니라
자기들의 몸이 벗은 것을 알게 되었고
그들은 하나님께 대한 부끄러움 보다
서로간 벌거벗은 것에 대한 부끄러운 수치를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순간부터 하나님을 향한 영적인 눈은 소경이 되고 말았습니다.
이러한 영적 소경은 아담 대에서 끝난 것이 아니라,
아담의 모든 후손들에게까지 미쳤습니다.
요9:1이하 예수께서 나면서부터 보지 못한 소경의 눈을 뜨게 한 것은,
아담의 원죄로부터 감겨진 영적 소경을
복음을 통해 회복시킨 사건과 맥을 같이 합니다.
그들이 타락하기 전에는 두 사람이 벌거벗었지만
부끄러움을 전혀 느끼지 못했지만 아니 부끄러움 자체가 아예 없었지만
불순종 후에는 죄에 대한 수치심을 알게 되었습니다.
타락 전이나 타락 후나 두 사람이 벌거벗고 있었다는 것은
변함이 없었지만 불순종 후에야 수치심을 깨닫게 된 것은
죄에 대한 수치심을 알게 되었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진정한 부끄러움과 수치심은 죄로부터 왔음을 알 수 있습니다.
2. 수치를 가릴 방법을 모색했다.
아담과 하와는 벌거벗은 몸을 가리기 위한 방법을 모색하다가,
무화과 나무의 큰 잎을 보고
그것을 따서 엮어 치마를 만들어 수치스러운 곳을 가렸습니다.
그러나 무화과 나뭇잎은,
아담과 하와의 벌거벗은 몸을 영원히 가리워 줄 수 있는 옷은 되지 못했습니다.
햇볕이 쬐이면, 말라져 버리고,
바람이 불면 그 수치는 여전히 드러났습니다.
여기서 죄인들의 심리상태를 잘 묘사해 주고 있습니다.
이담 이후 모든 인간들은,
자기의 죄를 감추기 위해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습니다.
은밀한 죄를 가리기 위해 권력과 재물을 이용하여,
숙청도 시켜보고, 감옥에도 넣어보고,
정신 병원에도 넣어 입도 막아 보고, 거짓말도 해보고,
합리화와 정당화도 시켜보고 오리발도 내밀어 봅니다.
죽은 자는 말이 없다하여, 살인도 해보고,
도덕적으로 선한 일도 하여 죄인이 아님을 가장해 보기도 하고,
종교를 이용해보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 어떤 것으로도 그 부끄러운 죄를
하나님의 눈으로부터 가리워 줄 수 있는 옷이나 휘장이나 차양은
세상에 결코 있을 수 없습니다(시139:9).
그 죄들을 없애기 위해서
비누나 세제로도 양재 물로도 닦아 낼 수도 지울 수도 없습니다.
시139:7 <내가 주의 신을 떠나 어디로 가며
주의 앞에서 어디로 피하리이까
내가 하늘에 올라갈찌라도 거기 계시며
음부에 내 자리를 펼찌라도 거기 계시니이다
내가 새벽 날개를 치며 바다 끝에 가서 거할찌라도
곧 거기서도 주의 손이 나를 인도하시며
주의 오른 손이 나를 붙드시리이다
내가 혹시 말하기를 흑암이 정녕 나를 덮고
나를 두른 빛은 밤이 되리라 할찌라도
주에게서는 흑암이 숨기지 못하며 밤이 낮과 같이 비취나니
주에게는 흑암과 빛이 일반이니이다>
렘2:22 <주 여호와 내가 말하노라 !
네가 잿물로 스스로 씻으며 수다한 비누를 쓸지라도
네 죄악이 오히려 내 앞에 그저 있으리니 --->
그리고, 세상의 과학의 힘으로도, 학문으로도,
그 어떤 예술로도 죄를 가리워 줄 수는 없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우리의 죄를 영원히 가리워 줄 수 있는 진정한 옷인 것입니다.
3. 그들의 날이 서늘해 졌다.
아담과 하와가 신성모독죄를 범한 동시에
성령존재 자체가 철수되어 버린 상태를 말하고 있습니다.
성령이 철수되자 하나님과의 관계도
서늘하게 식어버렸음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죄가 개입되면 하나님과의 관계도 멀어져 서늘해지고
죄가 개입되면 부부간 사이도 서늘해 지고
죄가 개입되면 친구사이도 서먹서먹해집니다.
성령의 철수는 두 가지입니다.
첫째는 감화력의 철수요,
둘째는, 성령 존재 자체의 철수입니다.
성도가 도덕적인 죄를 범하면, 성령의 감화력이 철수되지만,
신성모독죄나 성령 훼방 죄를 범하게되면, 성령 존재 자체가 철수됩니다.
감화력의 철수는, 다시 철저하게 회개하면, 충만해질 수 있으나,
성령존재 자체가 철수되면 무서운 심판만 있을 뿐,
회개할 기회는 주지 않습니다. (마12:31-32 등)
그들은, 하나님의 것으로 구별해 놓은 거룩한 지성물을 탐냈고,
하나님의 명령을 어겨 신성모독죄를 범했을 때,
그들과 함께 하셨던 성령 존재 자체가 탄식하며 떠나버린 것입니다.
이제 그들에게는 무서운 심판만 남아 있었습니다.(히6:4-8. 히10:26-31)
사63:10 <그들이 반역하여 주의 성신을 근심케 하였으므로,
그가(성령이) 돌이켜 그들의 대적이 되사 그들을 치셨더니---->
죄는 하나님 사이 뿐만 아니라,
인간과의 관계 속에서도 한번 개입되면
모든 신뢰와 사랑을 서늘하게 만들어 철저하게 깨부숴 버리는
폭탄과 같은 위력을 지니고 있습니다.
부부사이에 개입되면 가정이 파탄나고
친구 사이에 개입되면 불신으로 변하고
부모와 자식 사이에 개입되면 불효자로 만들며
군신(君臣)사이에 개입되면 목숨을 부지하기 어렵게 됩니다.
이와같이 죄는 핵폭탄보다 큰 위력을 지니고 있어
모든 관계들을 서늘하게 식어버리게 만든다는 것입니다.
4.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숨었다.
그들은, 동산에 거니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동산 나무사이에 숨었습니다.
그들은 죄의식과 죄책에 사로잡힌 결과
절망하고 좌절하고 낙심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때 들려오는 하나님의 음성은, 자비로운 음성이라기 보다,
죄의 불안을 한층 더 가중시키는 공포의 소리로 들렸습니다.
이제 하나님을 다시 만난다 해도
반갑지 아니하는 어색한 관계가 되어 버린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그 음성을 듣자마자 동산에 있는 나무 사이로 재빨리 피해 숨어 들어갔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으로부터의 도피로 죄인들의 특성을 잘 나타내고 있는 말입니다.
조금 전까지, 사랑과 신뢰의 대상이 되었던 하나님이,
이제는 불안과 공포의 대상이 되었으며
사랑의 대상이 경계의 대상으로 변한 것입니다.
잠28:1 <악인은 쫓아오는 자가 없어도 도망하나--->
죄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파괴시켰고
하나님을 부담스러운 존재로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계속 부르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피할 수는 없었습니다.
이때 아담은 숨게 된 원인에 대해서 이렇게 변명했습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니 두렵습니다>
<제가 피하여 숨게 된 것은 내 몸이 벌거벗었기 때문입니다>
<왜 우리에게는 옷을 만들어 주시지 않았습니까!>
<옷이 있었다면 어찌 하나님을 피하여 숨었겠습니까!>
<옷을 입고 정중한 예의를 갖추어 하나님의 얼굴을 뵈옵는 것이
인간의 마땅한 도리가 아니겠습니까!>
대답은 그렇듯하다.
그러나 그것은 자기 합리화요 정당화요 변명일 뿐입니다.
그리고 마치 죄의 원인과 책임이 하나님께 있는 양
원망스러운 대답을 했습니다.
다시 말하면, 숨게 된 원인이 하나님께 있으므로
그 책임을 하나님이 져야 함을 함축한 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옷에 대해서 물으신 적이 없습니다.
만약 그들에게 옷이 필요했다면
최고의 아름다운 옷을 입혀 결혼식을 치뤄 주었을 것입니다.
그들은 창조되자마자 부끄러움이 없는 상태에서 벌거벗고 결혼했습니다.
그런데 아담은 솔직하지 못한 대답을 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고 하신 것은,
아담이 어디 있는지 그 위치를 몰라서가 아니라,
그 영혼의 상태를 묻는 소리였습니다.
아담은 자기의 영혼의 위치가 어디에 있는지 조차 모를 정도로
하나님과 먼 거리에 있었습니다.
창3:11 <누가 너의 벗었음을 네게 고하였느냐!> 고 하셨을 뿐
어찌하여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벌거벗고 있느냐는 말은
하나님도 들짐승 뱀도 말한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자신은 내가 벗었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 선뜻 나서지 못한 것이라고 둘러댔습니다.
이때 하나님께서는 <네가 벗었기 때문이 아니라
내가 너더러 먹지 말라 명한 그 나무의 실과를 네가 먹었기 때문이 아니냐!>
하심으로 숨게 된 원인은 죄로 인한 너의 양심이
하나님께 가까이 갈 수 없도록 만들었던 것이 아니냐고 정통을 찌른 것입니다.
결국 불순종은, 죄의 수치를 깨닫게 했고
거기에 따른 무서운 형벌은 죄와 정비례된다는 사실을 직감하게 했습니다. (롬2:14-15)
무화과 나무잎으로 가린다고 죄가 감추어질 리 없고
숨는다고 하나님이 모를 리 없고
피한다고 형벌을 면할 수 없는데도
아담은 가릴수 있는데 까지 가렸고
피할 수 있는데까지 피해 숨었고
책임추궁을 피해 보려고 끝까지 변명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담아 ! 아담아 ! 부르실 때가 회개할 수 있는 기회였는지도 모릅니다.
그렇다면 아담은 이렇게 회개했어야 했습니다.
제가 하나님의 말씀을 아내에게 전해 주었는데
아내가 그 말씀을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는지
재차 재차 확인해 보지 않았던 자신의 실수와
에덴성전의 관리자로서 아내가 유혹되기 전에 그 짐승을 바로 쫓아내 버리지 못했던 것과
아내로 하여금 들짐승 뱀의 말을 듣지 못하도록
또한 선악과를 따먹지 못하도록 적극적으로 막지 않았던 죄와
또한, 하나님 말씀보다 아내의 말을 더 중히 여겼던 자신의 죄와
솔직히 말해서 제 자신도 하나님처럼 되고 싶었습니다.
용서해 주시옵소서! 라고 솔직하게 정직하게 회개했어야 했습니다.
5. 상대에게 죄를 전가시켰다.
하나님께서 죄의 정통을 찌르자
아담은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 하게 하신 여자 그가
그 나무 실과를 네게 주므로 내가 먹었다>고 죄를 전가시켰습니다.
즉, 죄의 원인자는 자신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만들어 주신 그 여자라고 지적함으로써,
죄에 대한 책임을 여자에게 돌리는 비열한 인간성을 드러냈습니다.
아내를 향하여 <그 여자> 라고 한 말투는,
여자를 만들어 같이 살게한 하나님께 대한 원망이 함축된 말입니다.
그러므로 죄에 대한 형벌 역시 여자가 받아야한 것은
당연한 이치라고 하는 항의도 함축된 것이니,
아담의 말을 종합해보면 자신이 범죄하게 된 것은,
여자를 만든 하나님과 아내였다는 것으로 결론지어진 셈입니다.
왜 여자를 만들었습니까! 왜 내 아내로 주셔서 같이 살게 했습니까!
이때부터 모든 인간들은 자신의 죄를 환경 탓으로
타인 탓으로 돌리는 악의적 성격이 유전되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잘된 것은 자기탓이요 잘못된 것은 조상탓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담으로부터 정직한 회개를 기대할 수 없게되자,
여자를 향하여 어찌하여 그리했느냐고 물으셨습니다.
그러나 여자 역시 죄의 원인을 들짐승에게 전가시킴으로서
여자에게서도 정직한 회개는 기대할 수 없었습니다.
여자는 이렇게 회개했어야 했습니다.
남편이 전해준 하나님 말씀을 무관심하게 들었던 죄와
남편의 말보다 뱀의 말을 더 믿었던 죄와
남편의 동의나 허락없이 금단의 과실을 따먹은 죄와
솔직히 하나님처럼 되고 싶었던 마음 때문에
따먹었습니다라고 고백했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여자 역시 죄의 원인자는 저 들짐승 뱀이기 때문에
죄에 대한 형벌은 마땅히 뱀이 받아야 한다고 주장하고 나섰습니다.
순종한 결과 저주를 받다
1. 들짐승 뱀에 대한 저주(창3:14)
하나님께서는 뱀에게 <어찌하여 유혹하였느냐?> 묻지 아니하셨습니다.
그 이유는, 뱀은 영혼이 없는 짐승이었기 때문입니다.
사탄의 도구가 되었던 뱀은 두 가지의 저주를 받았습니다.
뱀의 첫 번째 저주는, 배로 기어다녀야 하는 것과,
두 번째 저주는, 종신토록 흙을 먹어야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배로 기어 다녀야 한다>는 말을 달리 해석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첫번째 견해는, 포유동물이었던 뱀이 저주를 받아서
파충류로 둔갑이 되어 배로 기어다니게 되었다는 주장이고
두번째 견해는 원래부터 파충류였던 뱀이 저주를 받아
배로 기어다니게 되었다는 주장입니다.
그러나 이 두 견해는 다 잘못된 주장입니다.
왜냐하면 모든 생물들을 각기 그 종류대로 지으신 하나님께서
마술사처럼 포유동물을 파충류로 둔갑시켰을 리도 없고
그렇다면 둔갑된 뱀은 독사입니까 ? 살무사입니까?
구렁이입니까 ? 방울뱀입니까 ? 꽃뱀입니까?
어떤 종류의 뱀이란 말입니까?
또한, 창조 때부터 이미 배로 기어 다니고 있었던 뱀이,
저주를 받아 배로 기어다니게 되었다고 한다면
창조 당시부터 저주를 받았다는 말인데
보시기에 좋았더라와 말이 맞지 않습니다.
정당한 해석은 다음과 같습니다.
뱀은 파충류가 아니라, 포유동물인 들짐승이었습니다.
그렇다면 들짐승 중에서도 여우입니까?
늑대임니까? 자칼입니까 ? 고양입니까 ? 들개입니까? 등등
이런 식으로 묻는다면 할 말이 없습니다.
그러나 아담을 꾀일 당시 뱀이라는 이름을 가진
들짐승이 사탄의 도구로 선택되어 쓰임을 받았다는 것만 알면 됩니다.
성경 해석은 성경이 가는데 까지만 가고 성경이 멈춘 곳에서 멈추면 됩니다.
그렇다면 들짐승 뱀이 저주를 받아 배로 기어다녔다는 말은 무슨 말입니까?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이 들짐승 뱀의 건강을 치시니
큰 병이 걸려 100% 제 기능을 발휘했던 네 다리가
제 기능을 하지 못하고 배로 기어다니게 되었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큰 질병으로 다리가 제 기능을 못하니
새끼도 번식하지 못하고 그 자신의 대에서 끊어져
지구 상에서 사라져 버렸음을 말합니다. (시109:13).
인간도 질병이 들면
두 다리 쓰지 못하고 배로 기어다니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종신토록 흙을 먹으라>는 말은 무슨 말씀입니까?
어떤 생물이든 흙을 주식으로 삼고 사는 짐승은 없습니다.
그런데 죽을 때까지 흙을 먹으라고 하셨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흙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첫째 흙은 무가치성을 의미합니다.
즉, 땅을 통해서 얻어지는 푸른 풀들은 모든 동물들의 주식이었습니다. (창1:30)
그런데 흙을 주식으로 삼다가 죽으라는 말은
하나님의 모든 축복을 누리고 살 가치가 없는 존재라는 뜻입니다. (창1:30).
둘째 흙은 허무성을 의미합니다.
하나님 영광을 위해 지은 피조물이 하나님과 관계가 없으니
존재가치가 없는 허무한 생애임을 말합니다.
셋째 흙은 비참성을 의미합니다.
생육과 번식의 축복 없이 종자하나 남기지 못한 채 살다 죽으니 얼마나 비참한 존재입니까!
그러므로 당시 들짐승 뱀이라는 존재는 이후로 단 한 마리도 없는 것입니다.
성경에도, 무가치하고 비참하고 허무한 인생에 관하여 논하기를
<하물며 흙집에 살며 티끌로 터를 삼고
하루살이에게라도 눌려 죽을 자이겠느냐(욥4:19)>
<이둘이 일반으로 흙 속에 눕고 그 위에 구더기가 덮이는구나(욥21:26)>
<그들은 곧 궁핍과 기근으로 파리하매 캄캄하고 거친 들에서
마른 흙을 씹으며 --- (욥30:3)>라고 했습니다.
오늘날도 사탄의 도구로 발탁된 사람들이
성도들을 죄로 유혹하기 위해 허사만 경영하다가 심판 받아 지옥에 떨어지니
얼마나 무가치하고 허무하며 비참한 인생입니까!
시2:1∼4 <이런 사람들을 일컬어 존귀하나 장구치 못함이여, 멸망하는 짐승같도다.
존귀에 처하나 깨닫지 못하면 멸망하는 짐승 같도다(시49:12. 20)>고 했습니다.
위 구절은 들짐승 뱀을 염두에 두고 하신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마귀에게 쓰임 받고 살면서도 지옥을 향해 질주해 가면서도
웃는 웃음을 미친 것이라고 정의했습니다. (전2:2).
하나님께 버림을 당한 영혼은
그 존재자체가 무가치하며 허무한 인생이며
그 궁극은 비참하고 처참한 것입니다.
전2:2 <내가 웃음을 논하여 이르기를 미친 것이라 하였고,
희락을 논하여 이르기를 저가 무엇을 하는가 하였노라>
한마디로 마귀에게 쓰임 받은 짐승이나 사람은 존재가치가 없고, 삶의 의미도 없다는 말입니다.
사탄의 조종아래 살고 있는 불신자들은
흙처럼 썩어질 세상 양식 위해 허무한 인생을 살다가,
비참한 지옥에 들어가고
성도들은 천국의 양식인 하나님 말씀 먹고 살다가 천국 가게 되는 것입니다.
마4:4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말씀으로 살 것이라>
2. 여자와 사탄이 원수가 되다.
창3:15절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너의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이 말씀은 들짐승 뱀에게 하신 말씀이 아니라
뱀을 조종했던 사탄에게 하시는 말씀입니다.
사탄은, 여자를 통하여 인간과 하나님 사이를 원수로 만들었지만,
결국은 여자를 사탄의 원수로 만들겠다는 하나님의 강한 의지가 담겨있습니다.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겠다>
<너의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기서 여자란 구약교회를 말하며,
여자의 후손은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몸된 모든 성도들을 말합니다.
구약의 예언을 통해서 그리스도가 오셨기 때문입니다.
또한 그리스도는 교회의 머리요,
신약의 성도는 그의 지체요 몸이기 때문에 따로 구별할 수 없는 것입니다. (고전 12:27).
여자의 후손에 대해서 이리 해석한 이유는,
신약교회가 구약에 뿌리를 두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신약교회는 구약 교회가 낳은 후손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사탄에게 하신 선전포고대로
구약 교회도 사탄과의 전쟁은 끊임없이 해 왔습니다.
사탄과 구약교회와의 전쟁사를 살펴봅시다.
들짐승 뱀과 여자를 통해서 에덴 교회를 파괴시켰던 사탄은,
불경건한 가인을 통하여,
경건한 성도의 표상이었던 아벨 교회를 파괴시켰으며,
(창4:8. 히11:4. 요일3:12).
사람의 딸들과 하나님의 아들들의 결혼을 통해서
홍수심판으로 구약교회를 말살시키려 했으며, (창4:26. 창6:1 이하)
노아 홍수 후, 아비의 하체를 본 함을 통하여
셈과 야벳을 유혹하여 온 인류를 저주아래 가두어
경건한 교회 출현을 막으려 하였으며, (창9:20-27).
정치적 단일화. 경제적 단일화.
종교의 단일화를 꿈꾸었던 니므롯의 독재정권을 통하여
하나님의 경건한 신앙인들을
바벨탑의 우상 아래로 가두려 하였으며, (창11:1 이하. 말2:15)
믿음없는 아브라함을 통하여
아내 사라를 애굽 왕과 블레셋 왕에게 넘겨 메시야의 혈통을 막으려 했으며,
(창 20:2. 창 12:13 )
이삭을 통하여
그 아내 리브가를 블레셋 왕 아비멜렉에게 붙여
메시야의 혈통을 막으려 했으며, (창26:1).
장자권에 대한 원한을 품은 에서를 통해서
신앙의 사람 야곱의 씨 즉 야곱 교회를 말살시키려 했으며, (창33:1 이하)
세상 권력을 손에 쥔 애굽의 바로 왕을 통하여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을 홍해에 몰아넣어 말살시키려 했으며,
(출1:8 이하)
아론의 금송아지 사건을 통하여,
광야교회를 말살하려 했으며, (출32:1-34)---
술사 발람을 통하여,
광야 40년 고난을 마친 광야 교회를
모압평지에서 말살시키려 했습니다. (민25:1이하)
그 후에도 사탄의 역사는 사사기를 거쳐 계속내려 오다가
다윗과 솔로몬 시대를 거쳐 그 아들 르호보암 시대에
남 북조가 분열되어 우상숭배에 빠지게 하여
앗수르와 바벨론의 칼을 맞고
구약 예루살렘 교회는 파괴되었습니다. (왕하17장 왕하25장)
그 후, 아말렉 왕족인 교만한 하만을 통하여
파사 제국 내에 있는 유대인들을 탄압하여 말살 정책을 계획했고, (에스더 3:7-15)
알렉산더 대왕 이후,
시리아에 세운 헬라 셀류크스 왕조 중
7번째 왕인 안티오크스 에피파네스의 헬라화 정책을 통하여
제2의 예루살렘 교회를 말살시키려 했습니다. (단11:30-35).
그 후에도 사탄의 방해공작은 쉴 새가 없이 진행되었고,
말라기 이후 그리스도가 탄생하기 전까지
약 450년 동안은 영적인 암흑시대로 들어갔습니다.
<너의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겠다>는 말은
너의 후손 즉 사탄을 후손은 세상 권세를 추구하고
생활방식이 악에 의해 지배를 받고 사는 사탄의 추종세력들을 말합니다. (요8:44).
여자의 후손은 예수 그리스도를 포함한 신약교회를 말합니다.
구약교회가 예수 그리스도를 잉태하여,
신약교회를 낳았기 때문입니다.
또한, 예수 그리스도와 신약교회는 한 몸입니다.
그러므로, 교회의 고난은 곧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이었습니다. (고전 12:27).
핍박자 사울이 성도들을 잡아다 죽이려고
대제사장의 공문을 받아 가지고 다 메섹에 이르렀을 때,
예수께서는 <사울아 ! 사울아 !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에서
그리스도와 성도는 한 몸이라는 사실을 분명하게 밝히셨습니다. (행9:4-5)
그러므로, 여자의 후손은,
마리아 몸을 통해 나신 예수요,
사탄은 예수님의 발꿈치를 상하게 하여 십자가에 매달아 놓았으나
예수님은 3일만에 부활하심으로 사탄의 머리를 상하게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창3:15절은 이미 성취되었기 때문에
더 이상 해석할 필요가 없다고 하면 안 됩니다.
이제부터 신약교회와 영원한 숙적인 사탄과의 전쟁역사를 살펴 봅시다.
첫째 먼저 교회의 머리가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출생을 막는
전쟁사부터 살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메시야가 탄생하자,
에서 족 헤롯왕을 통하여
2살 아래의 사내아이들을 도륙함으로서 메시야를 죽이려고 했으며, (마2:16)
예수께서 40일 금식을 마치자,
사탄 루시퍼는 예수님 앞에 직접 나타나 3가지 죄로 유혹하여
하나님의 구속사를 무너뜨리려 했으며, (마4:1이하. 눅4:5∼6)
사악한 유대인들을 통하여
낭떠러지에 밀쳐 죽이거나,
돌로 쳐 죽이려고 했으며, (눅4:29. 요5:18. 요10:31)
사악한 바리새인들과 가룟 유다를 통하여
예수님 죽일 방책을 의논했으며, (마12:14. 요7:32 요13:27. 마26:47)
세상 영광을 추구한 빌라도를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아 죽임으로써
하나님의 구속사를 실패로 끝나게 하려 했습니다. (계12장. 마28:6. 마27:32)
둘째 그리스도 승천 후, 사탄과 신약교회와 전쟁사는 다음과 같습니다.
유대인들을 통하여,
성령이 충만한 스데반 집사를 공회 앞에서 돌로 쳐죽였고, (행7:54)
분이 난 사탄은, 산혜드린 공의회와 유대인들을 통하여
큰 핍박으로 예루살렘 교회를 파괴하려 했으며, (행8:1-4)
베냐민 지파 사울을 통하여 교회를 잔멸하려 했습니다. (행8:1-3. 행9:1-9)
또, 에서 족인 헤롯 아그립바 1세를 통하여
요한의 형제 야고보 사도를 칼로 죽인 후 베드로까지 죽이려 했으며, (행12:1-19)
아시아에서 온 유대인들을 통하여
바울을 죽이려고 군중들을 선동했으며, (행21: 27-29)
로마 10명의 황제들을 통하여
약 250년간 기독교 말살정책을 펴도록 조종하였으며,
로마의 카톨릭을 통하여
정통기독교 말살정책을 펴 약 천년간 암흑시대로 이끌었으며,
기독교가 전파되는 곳마다 수많은 순교자 숫자를 늘려갔으며,
이러한 기독교 박해는 장차 나타날 적그리스도의 치하에서
대 절정을 이루다가 심판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사탄의 사명자들을 향하여,
"뱀들아 ! 독사의 새끼들아! " 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마23:33절)
3. 사탄에게 보복선언을 하시다.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의 말씀은
사탄에 대한 보복선언입니다.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머리란, 임금. 왕. 지도자. 우두머리를 의미하기도 하지만,
사고력, 사상. 계획. 전략작전. 경영 등을 사고(私考)하는 사령탑으로서의 머리를 말하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사탄의 머리를 상하게 하겠다는 것은
두 가지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첫째 하나님의 구속사를 방해하려고 하는 사탄의 모든 계획과 경영.
전략작전 등은 결코 성공을 거두지 못하고,
완벽한 실패로 종지부를 찍을 것입니다.
둘째 들짐승 뱀은 자기가 섬긴 주군(主君)의 말을 듣고
아담을 꾀여 사탄왕국의 일등공신이 되었으나
뱀이 섬겼던 임금은 반드시 심판을 받아 멸망을 받을 것입니다.
주께서 재림하시면
사탄은 반드시 결박되어 무저갱에 잠깐 감금되었다가 풀린 후
영원한 불못에 들어가게 됩니다. (계20:1-7).
그러므로 사탄을 주군(主君)으로 삼고 살았던 사탄의 모든 추종자들은
자기 임금의 멸망을 볼 것이며
자신들 역시 멸망을 받아 사탄이 있는 지옥으로 들어가
영원히 같이 살며 형벌을 받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완벽한 대 승리를 거둘 것입니다. (시2:1. 마21:33-44).
예수께서는 사탄의 머리를 어떻게 상하게 하셨는가!
그들의 전략작전을 어떻게 깨부수셨습니까?
1차적으로 사탄을 이기신 것은
40일 금식기도에서 사탄의 유혹을 이기셨고
2차적으로, 귀신들을 쫓아내심으로 사탄의 능력을 멸하기 시작했으며,
(계20:1-3.계20:7-10. 요일3:8 )
3차적으로는 3일만에 부활하심으로 승리하셨으며
4차적으로는 재림에서 사탄을 결박하여 무저갱에 던져 넣고
이 땅에서 천년 통치를 하실 것이며, (계20:1-3. 요 12:31)
마지막으로는, 사탄을 유황불에 던져 넣은 후,
만왕의 왕으로 영원히 군림하여 대승리를 거두실 것입니다. (계20:10)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하겠다> 이 말은,
사탄이 교회와의 전쟁에서 부분적인 승리를 예고하신 내용입니다.
사탄의 부분적인 승리 즉,
일시적인 승리는 기독교 말살 정책을 폈던
로마제국이나 로마 카톨릭 등의 세계 지구 역사를 통해서
얼마든지 알 수 있습니다. (요14:30).
기독교 말살 정책으로 성도는 흔적 없이 사라진 것처럼 보일 때가 한 두번이 아니었지만
시간이 지나서 보면, 기독교인들의 숫자는 더 많아져 있었습니다. (왕상19:14. 18 참조).
이와 같이, 사탄의 전략은 언제든지 100% 성공을 거두지 못했으며,
완전한 승리를 해 본적도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탄은 끊임없이 교회와의 전쟁을 시도하다가
결국에는 치명타를 입고 패배하고 말 것입니다.
사탄은, 들짐승 뱀을 통하여 에덴의 신정 국가를 무너뜨렸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사탄의 능력을 멸하시고,
그와 추종자들을 유황불에 던져 넣으신 후,
만세 전에 계획하셨던 대로 에덴(예루살렘)을 지구촌의 수도로 삼아 신정국가를 세우시고,
만왕의 왕으로 보좌에 앉아 전 세계를 통치하실 때
공평과 정의가 하수처럼 흐르게 하실 것입니다.
(요8:44. 요14:30. 눅 4:6. 고전15:25. 요5:27 )
4. 하와가 저주를 받다.
<네게 잉태하는 고통을 크게 더 하리니 네가 수고하고 자식을 낳을 것이며>
<더 하리니>라는 말은,
무죄 상태 일지라도 육체를 가진 인간이기 때문에,
잉태하는 고통이 조금은 있었음이 분명합니다.
그런데, 타락의 결과로,
잉태하는 고통을 크게 더 가중시키겠다는 것입니다.
잉태란 배속에 아이를 가질 때의 입덫을 말하고 있으며
<수고하고 자식을 낳을 것이며>는 해산의 수고를 말합니다.
만일 아담이 불순종하지 않았다면,
잉태와 해산의 수고가 별로 없이 하나님 백성들을
쉽게 많이 얻을 수 있었을 것입니다.
무죄상태기 때문에
그들이 낳은 대로 100%가 다 하나님 백성들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타락 후에는 육체적으로도 엄청난 해산의 수고가 있게 되었고
영적으로도 엄청난 해산의 수고가 있어야
한 영혼을 구원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계12:2. 갈4:19. 등).
계12:2절에도 보면,
구약교회가 신약교회를 해산하는데 얼마나 큰 진통을 겪었는가를
해산하는 여자의 모습을 통해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계12:1-6절은 <너는 수고하고 자식을 낳을 것이며>의 성취인 것입니다.
<너는 남편을 사모하고> 여자는 오직 남편만을 사모해야 합니다.
<사모하고>란, 번역판에는 "너는 남편을 주무르고 싶겠으나"로 해석하기도 하며
또, 원문에는
<네가 남편을 다스리려고 한다면 남편은 너를 다스릴 것이니라>이니,
아내는 남편을 좌지우지하지 말고
남편에게 복종하라는 말이라고 해석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해석들은, 인간 가정사적으로 해석한 것이지,
결코 구속사적으로 해석한 것은 아닙니다.
물론 성경에서도 말씀하심같이
가정에서 여자는 남편의 말에 순종해야 하지만
성경은 일반 가정사를 다룬 것이 아니라,
죄인들을 구원하시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구속사를 다루고 있기 때문에
<사모하고>를 영적으로 해석하여,
교회는 오직 한 남편인 예수 그리스도만 사랑하고 사모해야 함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어린양 신부인 교회가,
세상의 다른 것을 사랑하고 사모한다면,
그리스도에 대한 배신행위로 심판을 받아야 마땅한 것입니다.
고전16:22 <누구든지 주를 사랑하지 아니하거든 저주를 받을지어다>
<남편은 너를 다스릴 것이니라>.
가정에서의 가장은 남편입니다.
남편은 집을 다스리고,
아내는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같이 남편에게 순복해야 합니다.
아담이 아내를 신앙으로 잘 다스리지 못한 결과
아내가 사탄의 유혹에 넘어갔음을 함축하신 말씀입니다.
(딤전3:3 딤전3:12 참조).
이러한 원리를 구속사에 적용한다면,
모든 교회는 주께서 다스려야 하며 주의 종들과 성도들은
자기의 주군(主君)인 명령에 따라 충성을 다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목사 전도사 장로가 다스리는 것이 아니라,
오직 절대주권을 가지신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자기의 백성을 다스리는 곳이며
목사. 전도사는 하나님의 심부름꾼이며 글짜 그대로 종 하인인 것입니다.
만일 남편인 그리스도를 제쳐놓고,
인간이 교회를 다스린다면,
그것은 기독교가 아니라 사탄의 회일 것입니다.
오늘날의 교회 사정을 보십시오!
분명 교회는 예수께서 통치하시겠다고 선포하셨는데도 불구하고
인간들이 교회를 다스리겠다며 주인 행세를 하기 때문에
교회는 분열되고 파당싸움은 전쟁터를 방불케 하고 있는 것입니다.
5. 땅이 저주를 받다.
아담은 하나님의 말씀보다 아내의 말을 더 중히 여겨 선악과를 따먹은 결과
땅이 저주를 받았습니다.
땅은 삶의 기본 조건을 충족시켜 주는 축복의 근원입니다. (창3:17-19).
그런데 아담 때문에 저주를 받은 것입니다.
땅이 무슨 죄가 있어 저주를 받았습니까 !
모든 만물은 인간을 위하여 창조되었기 때문에 인간에게 속했습니다.
그래서 인간이 저주를 받을 때 같이 저주를 받은 것입니다.
땅이 저주를 받았다고 하는 것은,
땅에 뿌리를 박고 있는 모든 자연 만물들이 다함께 저주받았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만약 아담만 저주를 받고 땅은 저주를 받지 않았다고 한다면
아담의 저주는 헛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저주를 실현시켜줘야 될 상대가 없기 때문입니다.
아담의 생계유지는 땅을 통해서 얻어 집니다.
그런데 땅이 저주를 받아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내게 됨으로
아담에게 내려진 저주가 임하게 되는 것입니다.
모든 곡식이나 식물은 땅에서 자랍니다.
식물을 자라게 하는 흙 속에는,
수분, 산소. 질소. 칼슘. 석회질. 열기. 미생물. 박테리아 등이 들어 있어
식물을 자라게 하고 열매를 맺습니다.
타락 전에는 땅이 제 기능을 100% 발휘하여
과목들로 하여금 제 구실을 하도록 했으나,
타락 후에는 사람에게 유익을 주는 박테리아나 양분들은 없어지고
수많은 해충들과 벌레들이 생겼으며
땅은 가시덤풀과 엉겅퀴를 내어 인간의 수고를 가중시켰으며
방종과 게으름을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인간에 대한 땅의 분노였습니다.
또한 가시덤불과 엉겅퀴는,
삶의 풍요로움을 원하는 사람들로 하여금 부지런함과 성실함을 요구하여
성실한 수고와 얻어지는 수확을 정비례시켰습니다.
잠24:30 <내가 증왕(옛날)의 게으른 자의 밭과 지혜 없는 자의 포도원을
지나며 본즉 가시덤풀이 퍼졌으며, 거친 풀이 지면에 덮였고 --->
그러나, 땅의 저주는 자연만물과 식물에만 국한된 것은 아니었습니다.
땅에서는 화산이 터지고 지진이 일어나며
토지는 오염되어 독성을 품어내어 각종 질병을 일으켜
인간의 건강을 해치고 있으며
하늘에서는 기상이변, 태풍, 폭설, 무더위, 기근, 홍수 등이
땅으로 하여금 제 구실을 못하도록 방해를 하고 있으며
영계에서는, 사탄과 귀신들이 인간을 공격하고
세상에는 수많은 악인과 죄인들이 성도들을 괴롭히고 있으며
수질도 오염되어 수많은 대장균들이 우굴거리고
오존층 파괴로 태양 빛도 피부암을 일으키고 있는 것입니다.
어떤 면에서 인간은 천천 만만의 적진 속에 포위되어 있다해도 과언은 아닙니다.
6. 아담이 저주를 받다.
아담은 죄의 결과로 <식물을 위하여 죽을 때까지 육체적 노동>을 해야
의식주 문제가 해결될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밭의 채소와(19) 소산은(17),
인간의 수고를 필요로 하는 곡식류과 각종 채소류을 말합니다.
육체적 노동은 죄의 결과로 왔습니다.
이러한 육체적 노동은, 피곤과 함께 질병도 유발시켰습니다.
타락 전에는, 육제적 노동이 없이 삶의 문제가 해결되었으나,
타락 후에는, 인간이 수고한 만큼 거두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땅을 갈고, 씨를 뿌리고, 거름을 주고, 김과 잡초를 뽑아주고,
약을 뿌려 주고, 벌레를 잡아주고, 물을 주어야 수고의 대가를 찾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식물을 위해 일할 수 있는 6일을 제공해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5일 근무제는 성경과 위배된 것입니다.
아담의 두 번째 저주는 <너는 흙으로 돌아가라>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육체적 사망과 함께 영혼의 저주이기도 했습니다.
<정녕 죽으리라>는 육체적 사망뿐 아니라, 영혼의 사망까지를 다 포함한 말씀입니다.
사망에는 3가지가 있습니다.
◐ 육체적 사망: 영혼과 육체의 분리를 말하며,
◐ 영적인 사망: 하나님과의 인간과의 분리로, 하나님과 관계가
끊어지는 가장 큰 비극적인 분리입니다.
◐ 영과 육의 사망: 백보좌 심판에서 천국과 지옥의 분리를 말합니다.
위 3가지 사망은 불순종에서 비롯된 영적인 사망이 가져온 결과입니다.
죄의 삯은 사망입니다. (히9:27)
(롬6:23).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흙을 강조하신 것은,
아담의 허무한 인생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아담의 인생이 허무하게 된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진 상태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아담에 있어서는 존재가치나, 삶의 의미.
또한 하나님 영광을 위한 삶의 목적이란 있을 수 없었습니다.
다만, 930년을 고생하며 살다가 허무하게 죽은 것뿐이었으니,
비록 천년의 갑절을 산다해도
그 영혼이 버림을 당한다면 무가치한 인생인 것입니다.
흙으로 지음 받은 인간이,
하나님 없이 살다가 흙으로 돌아가 버린다면 그 얼마나 허무하고 비참한 존재입니까 !
전1:2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전6:12 <헛된 생명의 모든 날을 그림자 같이 보내는 일평생에
사람에게 무엇이 낙인지 누가 알랴
전7:15, 전9:9, 시39:6,127:2등>
<흙으로 돌아가라>에는 저주 속에 매장 개념도 들어 있다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이스라엘은 그 육체가 매장되지 못하면 저주로 간주했습니다.
전6:3 <사람이 비록 일백 자녀를 낳고 또 장수하여 사는 날이 많을지라도,
---그 몸이 매장되지 못하면 나는 이르기를 낙태된 자가 저보다 낫다 하노니…>
렘16:6 <큰 자든지 작은 자든지 이 땅에서 죽으리니 그들이 매장되지 못할 것이며,
그들을 위하여 애곡하는 자도 없겠고…>
시79:3 <그들의 피를 예루살렘 사면에 물같이 흘렸으며
그들을 매장하는 자가 없었나이다>
렘25:33 <그날에 살육 당한 자가…
매장함을 얻지 못하며 지면에서 분토가 되리로다>
아브라함도 그 아내 사라를 위하여은
400세겔로 에브론의 밭과 굴을 샀으며, (창23:15∼20)
아합과 이세벨의 시체는 매장되지 못했으며, (왕상21:17이하 22:1∼40에 성취)
길에 버려지거나 짐승들의 밥이 된 악인들의 시체는
저주의 개념으로 나오고 있습니다.
그러나 시체 매장도 저주로부터 왔음을 유념해야 합니다.
만일 아담이 불순종하지 않았다면
흙으로 육체를 매장하는 일은 없었을 것입니다.
7. 아담의 죄들
아담이 지은 죄를 한가지로 집약시키면, 불순종입니다.
그러나 구체적으로 분류해 보면 12 가지로 나눌 수 있습니다.
◐ 신성모독죄: 하나님 되고 싶어 지성소를 범했습니다.
◐ 교만 죄: 하나님을 도전하는 사악한 행위를 했습니다
◐ 배교 죄: 죄로 결정지음으로 하나님을 배신했습니다
◐ 방심 죄: 아내를 단속하지 않고 방심했습니다.
◐ 무관심 죄: 목회자로서 아내의 신앙에 위기가 닥쳤을 때 그 영혼에
무관심했습니다.
◐ 용납 죄: 에덴동산을 잘 지키라했는데 들짐승 뱀을 받아 들였습니다.
◐ 불신 죄: 반드시 죽을 것이라 했는데 하나님을 의심하여 그 말을 믿지
않았습니다
◐ 명령거역 죄: 자기의 왕이요 주인이신 하나님 말씀을 거역했습니다
◐ 책임전가 죄: 아내에게 죄의 대한 책임을 전가시켰습니다
◐ 짐짓 죄: 알면서 고의적으로 범했습니다. (고범죄 = 히6:4-8. 히10:26 ).
◐ 망각 죄: 자기 위치와 신분을 망각했습니다
◐ 하나님을 경히 여긴 죄: 하나님 말씀보다 아내의 말을 더 중히 여겼 습니다.
아담의 지성에서는 불신앙과 교만으로 나타났고
감정에서는 제멋대로 행하는 방종으로 나타났고
의지에서는 하나님처럼 되고자 하는 욕망으로 나타났습니다.
아담은 3가지 망각병에 걸렸었습니다.
인간이란 무엇입니까?
자기의 위치와 신분은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무엇을 경고 하셨습니까?
인간은 하나님께서 지으신 피조물이요,
자기를 지으신 하나님만을 사랑하고 섬겨야 하는 위치에 있음과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무엇을 말씀하셨는가를 망각해 버리면,
피조물이 하나님이 되겠다고 나서는 일은 자연스럽게 나타나는 현상인 것입니다.
2014.1.16.(목) 오후 1:33
이우길 집사 정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