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궁창, 궁창 위의 물, 궁창 아래의 물
(창1:6‐8)
6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물 한가운데 창공(궁창)이 생겨, 물과 물 사이가 갈라져라" 하셨다.
7 하나님이 이처럼 창공(궁창)을 만드시고서,
물을 창공 아래에 있는 물과 창공 위에 있는 물로 나누시니, 그대로 되었다.
8 하나님이 창공(궁창)을 하늘이라고 하셨다.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튿날이 지났다.
8절을 보시면 궁창은 ‘하늘’입니다.
그러니까 궁창은 ‘솨마임‘’하늘 들‘ 중에 1층 천을 말하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대기권을 지칭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디서부터를 하늘이라고 할까요?
지상 몇 미터 위부터가 하늘입니까?
공기를 담고 있는, 땅과 바다 바로 위부터
우리 눈에 보이는 저 파란 하늘까지를 ’궁창’ ‘하늘’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델리취 성경학자는
궁창을 ’대기권으로써 지구를 둘러싸고 있는 공기의 확장‘이라고 해석을 했습니다.
그런데 7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그 궁창을 ’만드셨다‘라고 굳이 표현을 합니다.
그 말은 하나님께서 이 ’궁창’을 지으심으로
하나님이 거하시는 하늘과 땅을 분리시키셨다는 말이 되는 것입니다.
이 ‘분리’와 ‘구별’은 종말론적 관점으로 보면 참 중요한 개념입니다.
그 부분에 대해서는 조금 있다가 언급을 하도록 하고
먼저 그 궁창의 창조를 실존적이며 현상론적인 관점에서 알아 보겠습니다.
하나님께서 궁창을 만드셨다는 말은 하나님께서 생물을 만드시기 전에
그 생물들이 호흡하며 살 수 있는 공기의 비율과 그 비율을 잘 유지할 수 있는 자연의 법칙을 만드신 것입니다.
우리는 그 구절에서 하나님께서 생물을 창조하시기 전에
생물들이 존재할 수 있는 틀을 정성스럽게 만들고 계심을 읽을 수 있습니다.
만일 우리가 공기를 사서 마셔야 한다면 그 값이 얼마나 될까요?
예를 들어 사람이 호흡을 하는데 필요한 하루치 공기가
10,000불이라고 한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서라도 그 공기를 사야합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호흡은 하루 이틀 걸러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 소중한 공기를 거저 허락하셨습니다.
궁창이 지어질 때 이 지구의 대기가 형성이 된 것입니다.
대기권의 공기는 산소 20% 질소 80%의 비율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이 비율이 깨지면 생물이 존재할 수 없습니다.
만일 질소의 비율이 높아지고 산소의 비율이 낮아지게 되면
생명체가 파괴되고 인간의 삶에 소중한 불을 지필 수가 없습니다.
반대로 산소의 비율이 높아지고 질소의 비율이 낮아지게 되면 삽시간에 지구는 불바다가 될 것입니다.
그러니까 베드로가 그의 서신서에서 이야기 한 것처럼
마지막 날에 체질이 뜨거운 불에 풀어지는 일은
하나님께서 이 대기권의 산소의 비율만 조금 높여 버리시면
바로 모든 것들이 뜨거운 불에 녹아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그 산소와 질소의 비율이 안정되게 유지되는지 아십니까?
동물들이 호흡을 하면서 매일 매일 산소를 마시고 탄산가스를 배출하고 있는데도
어떻게 그 산소의 비율이 20%로 정확하게 유지가 될까요?
동물들이 호흡을 할 때 식물은 광합성을 하지요.
동물들이 끊임없이 산소를 소모할 때 식물들이 광합성을 통해 끊임없이 산소를 방출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그 비율이 20 대 80으로 정확하게 유지가 됩니다.
바로 그러한 만물이 존재하고 유지될 수 있는 공기와
공기에 관한 자연의 법칙이 둘째 날 궁창 속에 만들어 진 것입니다.
사람이 받는 공기의 압력이 14톤에서 16톤 정도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모든 사람을 공기가 14톤의 압력으로 누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사람이 찌그러지지 않고 멀쩡하게 살아있습니까?
이 14톤의 압력이 수직으로만 누르는 것이 아니라
상하 좌우에서 골고루 누르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이렇게 멀쩡하게 움직일 수 있는 것입니다.
신기하지 않습니까?
상하좌우의 공기 압력의 평형이 조금만 깨져도
이 지구 위의 만물은 일순간에 찌그러져서 몰살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 그러한 자연의 법칙을 조금만 흔들어 버리셔도
우리는 존재조차 할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우리가 그 하나님 앞에 두 손 들고 항복하지 않을 수 있습니까?
우리는 이 창세기를 공부하면서 하나님이 얼마나 크신 분이라는 것을 새삼 느낍니다.
우리는 호흡을 할 때마다 저 푸르른 하늘을 볼 때마다
하나님의 전능하심과 은혜로우심에 감사를 드려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너무나 쉽게 그 분을 잊고 삽니다.
그러니까 감사도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러한 인간들을 보시며 얼마나 가슴이 아프실까요?
(사1:2‐3)
2 하늘아, 들어라! 땅아, 귀를 기울여라! 주께서 말씀하신다.
"내가 자식이라고 기르고 키웠는데, 그들이 나를 거역하였다.
3 소도 제 임자를 알고, 나귀도 주인이 저를 어떻게 먹여 키우는지 알건마는,
이스라엘은 알지 못하고, 나의 백성은 깨닫지 못하는구나."
우리는 이 우주 만물 속에서
하나님의 손길을 관(觀)하고 청(聽)할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 궁창이라는 단어 ‘라키아’는 원래 ‘두들겨서 넓게 펼친 판’이라는 뜻입니다.
성경이 ‘하늘‘을 그렇게 표현을 하는 이유는
구속사적인 중요한 의미가 그 ’궁창‘속에 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욥26:7)
7그는 북편 하늘을 허공에 펴시며 땅을 공간에 다시며
여기에서 ‘펴다’라고 번역이 된 히브리어 ‘나타’는
‘연장을 사용하여 펴거나 구부리다’라는 뜻입니다.
하늘을 표현하는데 이렇게 ‘라키아’나 ‘나타’라는 단어가 동원되는 이유는
그 궁창과 어떤 것이 연관이 되어 있음을 힌트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게 뭘까요?
여러분 ‘연장을 사용하여 펴거나 구부려 만든 것‘ 하면
성경에서 어떤 것이 먼저 떠오르십니까? 성막의 물두멍이 떠오르시지요?
(출30:18)
18 너는 물두멍을 놋으로 만들고 그 받침도 놋으로 만들어 씻게 하되
그것을 회막과 단 사이에 두고 그 속에 물을 담으라
놋을 펴서 물두멍을 만들고 그 물 두멍 위에 물을 담아 제사장들의 몸을 씻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하늘‘’궁창‘을 펴시고
그 위에 궁창 위의 물을 두신 창세기의 둘째 날이 성막의 물두멍 안에 들어 있는 것입니다.
지금부터 이 창세기의 창조가 그 성막의 구조와
이스라엘의 출애굽과 요한복음과 요한 계시록에 이르기까지 어떻게 연결이 되는지 알아 봅시다.
여러분의 머릿속에 성 막의 구조를 한 번 떠올려보세요.
성막의 입구를 들어서면 바로 등장하는 것이 번제단이지요?
번제단은 죄인들의 속죄를 위해 무죄한 어린양이 도살을 당하는 곳입니다.
바로 빛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을 내용으로 담고 있는 것이 번제단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번제단에서 창세기의 첫째 날 ’빛‘의 창조를 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번제단을 지나면 바로 나오는 것이 물두멍입니다.
그 물두멍은 궁창 위에 물을 담고 있는 창세기의 둘째 날을 내용으로 하고 있습니다.
물두멍을 지나면 성소가 나오지요?
그리고 성소와 지성소를 가르는 건빵 두 개 두께의 휘장이 있습니다.
그 휘장이 바로 두 번째 하늘 ‘이층 천’입니다.
그래서 성경이 때로는 하나님께서 하늘을 ‘차일처럼, 커튼처럼 치셨다‘라는 표현도 하는 것입니다.
(사40:22)
22 땅 위의 저 푸른 하늘에 계신 분께서 세상을 만드셨다.
땅에 사는 사람들은 하나님 보시기에는 메뚜기와 같을 뿐이다.
그는 하늘을, 마치 엷은 휘장처럼 펴셔서, 사람이 사는 장막처럼 쳐 놓으셨다.
(시104:2)
2 빛으로 휘감으셨습니다. 옷감을 펼치듯이 하늘을 펼치시고,
그리고 그 휘장을 지나면 하나님의 임재가 있는 지성소인 것입니다.
그 지성소는 ‘삼층 천‘’하나님이 거하시는 하나님 나라‘를 상징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죄인들이 하나님을 뵙기 위해서는 물두멍과 휘장을 지나야 하지요?
성막에서 죄인인 인간이 하나님이 계신 지성소에 들어가기 위해서
반드시 물두멍에서 몸을 씻어야 한다는 것은
죄인들이 물에 빠져서 죽고 새로운 사람으로 탄생이 되지 못하면
하나님을 뵐 수 없다는 것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성소와 지성소를 가르는 휘장에
’그룹들’ ‘천사들’이 그려져 있는 것은 죄인들은 하나님을 둘러싸고 있는
그 그룹들을 통과하지 않고는 절대 하나님을 알현할 수 없음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에덴동산에서 생명나무가 그룹들로 둘러싸여 있던 것을 기억하시면 됩니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가 어떻게 이렇게 하나님을 수시로 뵐 수 있게 되었습니까?
아니 어떻게 우리가 하나님이 거하시는 성전이 되었습니까?
우리가 지금 알아 본 이 창세기의 그림과 성막의 그림에다가 출애굽기의 그림을 포개보겠습니다.
창세기와 출애굽기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은혜의 구원‘이라는 한 가지 주제를 설명하고 있는 책입니다.
그래서 그 두 책은 그 예수 그리스도라는 주제 속에서 정확하게 포개집니다.
(출1:7) ‘
7 그러나 이스라엘 자손은 자녀를 많이 낳고 번성하여,
그 수가 불어나고 세력도 커졌으며, 마침내 그 땅에 가득 퍼졌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정말 온 땅에 가득했었습니까? 아니지요?
그런데 왜 이런 표현을 썼을까요?
모세는 지금 창세기 1장 28절의 단어들을 동원해서 이스라엘의 구원,
새 창조와 창세기의 첫 창조가 정확하게 같은 이야기를 담고 있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관점을 가지고 창세기와 성막에다가 출애굽기를 포개보세요.
출애굽은 무죄한 어린양의 피가 문설주에 발림으로부터 시작이 됩니다.
창세기의 첫째 날 ‘빛’과 성막의 ‘번제 단’이 포개지지요?
그리고 유월절을 거쳐 출애굽한 이스라엘이 가나안으로 가기 위해,
다른 말로 하나님과 화목한 자가 되어
하나님이 약속하신 언약의 땅에 들어가기 위해 건너야 할 바다가 있었습니다. 그 바다가 바로 홍해입니다.
그런데 그 바다가 은혜로 갈라졌습니다.
창세기의 둘째 날 궁창과 궁창 위의 물과 궁창 아래의 물이 갈라진 사건과
성막의 물두멍과 홍해가 갈라진 사건이 정확하게 포개지지요?
그러면 이제 그 세 그림 위에 요한복음의 그림을 포개볼까요?
요한복음 1장과 2장 11절까지의 일곱 날은 정확하게 창세기의 구조를 갖고 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요한복음의 일곱 날에 쓰여진 단어는 ‘어린 양‘이라든지 ‘세례‘같은 출애굽기의 언어가 쓰입니다.
그러니까 성경은 창세기와 출애굽기와 요한복음은
같은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요한복음은 ‘빛이 오셨다’로 시작을 하지요?
창세기의 첫째 날이며 성막의 번제단이며 출애굽기의 유월절과 포개집니다.
그리고 요한복음은 그 빛이신 분이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시는 이야기로 이어집니다.
(고전10:1‐2)
1 형제자매 여러분, 나는 여러분이 이 사실을 알고 지내기를 바랍니다.
우리 조상들은 모두 구름의 보호 아래에 있었고, 바다 가운데를 지나갔습니다.
2 이렇게 그들은 모두 구름과 바다 속에서 세례를 받아, 모세에게 속하게 되었습니다.
성경은 이스라엘이 홍해를 건넌 것을 그들이 ‘세례를 받았다‘라고 표현을 합니다.
창세기의 둘째 날 궁창과 궁창 위의 물과 궁창 아래의 물,
그리고 성막의 물두멍과 출애굽기의 홍해 사건과 요한복음의 예수님의 세례가 정확하게 포개집니다.
그러니까 창세기와 출애굽기와 성막의 이야기는
정확하게 요한복음의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어떻게 그분의 백성들을 구원하셔서
안전하게 하나님이 거하시는 새 하늘과 새 땅으로
인도하실 것인가를 설명하시기 위해 창조부터 이야기가 전개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 예수께서 빛으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리고 그 분이 세례를 받으셨습니다.
세례라는 것은 옛 사람이 죽고 새사람이 탄생이 되는 사건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심으로 우리 죄인들과 연합되셨고,
두 번째 십자가의 세례로 우리 성도들의 옛 사람을 완전히 죽이신 것입니다.
그래서 성막의 번제단을 부수어 버리시고 물두멍을 쪼개 버리신 것입니다.
그 물 두멍이 쪼개지지 않고 여전히 존재하는 한 인간들은 절대 그 물두멍을 그냥 지나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게 율법입니다. 율법은 지키지 않으면 죽는 것입니다.
율법은 항상 행위를 요구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 물두멍에서 몸을 씻는 예식을 하지 않으면 그 물두멍의 저주의 물이 그를 덮쳐서 죽여 버릴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거룩하신 분이시기에
더러운 죄인이 그냥 물두멍을 지나쳐서 지성소로 들어가게 되면
그가 죽게 되는 것입니다.
그 것이 죄인들의 실존입니다.
실제로 궁창 위의 물과 궁창 아래의 물이 모두 쏟아져서
더러운 죄인들을 모두 몰살시킨 사건이 있었지요?
노아의 홍수 사건이 바로 율법 아래에서 물두멍을 그냥 지나친 자들에게
쏟아지게 될 하나님의 저주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의 세례를 받으심으로그 물두멍을 쪼개 버리신 것입니다.
그리고 지성소를 막고 있던 둘째 하늘인 휘장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위에서 아래로 찢어져 버린 것입니다.
(마27:50‐51)
50 예수께서는 다시 큰소리로 외치시고 나서, 숨을 거두셨다.
51 그 때 성전 휘장이 위에서 아래까지 두 폭으로 찢어졌다.
그리고 땅이 흔들리고, 바위가 갈라지고,
이렇게 해서 3층천을 가로막고 있던 궁창과 2층천이 제거가 된 것입니다.
그러니까 창세기 둘째 날의 창조기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궁창과 저주의 물이 제거되고
천지 만물과 하나님이 화목하게 되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향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완성된 새 하늘과 새 땅에는 더 이상 궁창과 바다가 없어지게 되고
어둠도 사라지게 되는 것입니다.
창세기의 첫째 날과 둘째 날의 창조가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 아시겠지요?
(계21:1)
1 또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
(계22:1‐5)
1 천사는 또, 수정과 같이 빛나는 생명수의 강을 내게 보여 주었습니다.
그 강은 하나님의 보좌와 어린 양의 보좌로부터 흘러 나와서,
2 도시의 넓은 거리 한가운데를 흘렀습니다.
강 양쪽에는 열두 종류의 열매를 맺는 생명 나무가 있어서,
달마다 열매를 내고, 그 나뭇잎은 민족들을 치료하는 데 쓰입니다.
3 다시 저주를 받을 일이라고는 아무것도 그 도시에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과 어린 양의 보좌가 도시 안에 있고,
그분의 종들이 그분을 예배하며,
4 하나님의 얼굴을 뵐 것입니다.
그들의 이마에는 그분의 이름이 적혀 있고,
5 다시는 밤이 없고, 등불이나 햇빛이 필요 없습니다.
그것은 주 하나님께서 그들을 비추시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영원무궁하도록 다스릴 것입니다.
이렇게 창세기는 요한 계시록을 향하고 있는 것입니다.
창세기의 둘째 날은 하나님께서 궁창을 만드셔서
하나님이 계신 하늘과 땅을 나누시고 구별시키셔서
하늘과 땅이 다른 말로 하나님과 죄인들이 그들의 타락으로 말미암아
어떻게 분리가 되었는지를 보여주시고
그 나눔 벽인 궁창을 예수를 통해 거두심으로
하나님이 계신 하늘과 땅이 합일될 것임을 힌트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한 연유로 하나님의 언약이 세워질 때마다 ‘분리’가 등장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능력으로 그 분리를 합일로 만드시겠다는 것이
바로 언약의 내용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언약 때마다 분리가 등장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담에게서 하와를 분리시키시고 혼인을 시키셔서
다시 하나로 만드시는 것도 죄로 말미암아 분리되었던 하나님과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의 은혜로 하나로
‘재통일‘’애나케 팔라이오‘될 것임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에베소서에서 혼인을
예수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로 표현을 한 것입니다.
창세기 15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언약을 하실 때
짐승들을 쪼개시고 그 쪼갠 고기 사이로 지나가시지요?
하나님은 그 쪼개진 제물을 통해 분리를 보여주시고
하나님의 능력과 하나님의 은혜로
그 분리가 하나로 합일 될 것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쪼갠 고기 사이를 홀로 지나가셨다는 것은
우리가 아시다시피 그 언약은 하나님 홀로 이루실 것이라는 암시이고요.
그리고 제사 때마다 항상 제물은 둘로 쪼개지고 살과 피로 분리가 됩니다.
하나님의 언약궤가 들어 있는 지성소와 성소도
휘장으로 분리가 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거하시는 하늘과 땅의 엄격한 분리를 암시하는 것입니다.
그 휘장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찢겨지고
하늘과 땅이 하나로 화해가 될 것이라는 하나님의 은혜 언약이
그 속에 숨어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언약의 관점 안에서
창세기 둘째 날의 ‘궁창으로 인한 하늘과 땅의 분리’를 이해하시면
조금 더 이해가 쉬우실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는 창세기 속에서도 eschatology (종말론)를 볼 수 있는 것입니다.
‘그 궁창 위의 물이 도대체 무엇이었는가?
‘ 우리는 성경을 통해 어떤 역사적 사실이나
우주에 관한 정보를 얻어내는 것이 아니라
바로 그 예수 그리스도와 십자가,
그리고 하나님 나라의 완성을 읽어내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혹자들이 왜 창세기의 둘째 날에만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라는 말씀이 빠졌는가에 대해 궁금해 하시는데
그것은 창세기의 둘째 날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생물들이
기식하는 데에 필요한 이 세상의 틀이 구조적으로
만들어지는 과정이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창세기의 셋째 날까지는 틀이 완성되고
넷째 날부터 그 틀에 만물이 채워지는 것이잖아요.
그런데 둘 째 날 하늘이 만들어진 것만으로 생물이 존재할 수 없지요?
셋째 날 땅이 드러나고 바다가 한 쪽으로 몰려가야
비로소 물고기와 식물과 동물과 인간이
살 수 있는 하늘과 땅과 바다라는 터가 완성이 되는 것이기 때문에
셋째 날 땅과 바다까지 완성이 된 다음에
‘보시기에 좋았더라‘라는 말씀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리고 본문 8절을 보면 하나님께서
‘궁창을 하늘이라 칭하셨다‘라는 구절이 나오는데
거기서 ’칭하다‘라는 단어 ’카라‘는 ’선언하다, 공포하다, 이름을 주다’라는
의미가 들어 있습니다.
고대 셈족의 문화권에서 이름을 부여한다는 것의 의미는
단순히 이름을 지어주는 것을 말하지 않았습니다.
고대 셈족의 문화권에서
이름을 부여한다는 것은
소유권과 지배권과 통치권의 행사를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창조를 하시고 거기에 이름을 직접 붙이셨다는 것은
이 천지만물의 주인은 하나님이시며 그 분이 통치하고 계시며
지금도 그 천지 만물의 운행과 유지에 친히 간섭하고 계심을
나타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한 내용은 ‘보시기에 좋았더라’에서
‘보다’ ‘라아’라는 단어에서도 찾을 수 있습니다.
그 ‘보다‘’라아‘라는 단어는 단순한 시각현상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 단어는 ’감찰하다, 보호하다, 염려하다’라는 의미의 단어입니다.
그 단어가 담고 있는 것은 이슬람교도 같은 이신론자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하나님은 천지 만물을 지으시고 그냥 절대 타자로
저 하늘에 머물러 계신 분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창16:11‐14)
11 주의 천사가 그에게 또 일렀다.
"너는 임신한 몸이다. 아들을 낳게 될 터이니,
그의 이름을 이스마엘이라고 하여라.
네가 고통 가운데서 부르짖는 소리를 주께서 들으셨기 때문이다.
12 너의 아들은 들나귀처럼 될 것이다. 그는 모든 사람과 싸울 것이고,
모든 사람 또한 그와 싸울 것이다.
그는 자기의 모든 친척을 떠나서 살아가게 될 것이다."
13 하갈은 "내가 여기에서 나를 보시는 하나님을 뵙고도,
이렇게 살아서, 겪은 일을 말할 수 있다니!" 하면서,
자기에게 말씀하신 주를 "보시는 하나님"이라고 이름지어서 불렀다.
14 그래서 그 샘 이름도 브엘라해로이라고 지어서 부르게 되었다.
그 샘은 지금도 가데스와 베렛 사이에 그대로 있다.
하갈이 사래의 학대를 피해 도망가는 길에 여호와의 사자를 만납니다.
그런데 그 여호와의 사자가 이르기를
하나님께서 하갈의 모든 것을 처음부터 끝까지 보고 계셨다는 사실을 알려줍니다.
그래서 하갈이 감격하여 여호와의 이름을 ‘감찰하시는 하나님’으로 부릅니다.
거기서 ‘감찰하다‘라고 번역이 된 단어가
’보시기에 좋았더라‘에 쓰인 ’라아‘라는 같은 단어입니다.
(창22:11‐14)
11 그 때에 주의 천사가
하늘에서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하고 그를 불렀다.
아브라함이 대답하였다. "예, 여기 있습니다."
12 천사가 말하였다. "그 아이에게 손을 대지 말아라!
그 아이에게 아무 일도 하지 말아라!
네가 너의 아들, 너의 외아들까지도 나에게 아끼지 아니하니,
네가 하나님 두려워하는 줄을 내가 이제 알았다."
13 아브라함이 고개를 들고 살펴보니, 수풀 속에 숫양 한 마리가 있는데,
그 뿔이 수풀에 걸려 있었다. 가서 그 숫양을 잡아다가, 아들 대신에 그것으로 번제를 드렸다.
14 이런 일이 있었으므로, 아브라함이 그 곳 이름을 여호와이레라고 하였다.
오늘날까지도 사람들은 '주의 산에서 준비될 것이다'는 말을 한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번제로 드리려 할 때 하나님께서 칼을 거두라 명하십니다.
그리고 양 한 마리를 준비해 주시고 그 양으로 하나님께 번제를 드리게 하십니다.
그 때 아브라함이 그 땅 이름을 ‘여호와 이레’라고 부릅니다.
‘지켜보시고 감찰하시며 자녀의 필요를 준비해 주시는 하나님‘이라는 뜻입니다.
거기서 ’이레’라고 번역이 된 단어가 ‘보시기에 좋았더라’에 쓰인 ‘라아’라는 단어입니다.
(출4:29‐31)
29 모세와 아론이 가서 이스라엘 자손의 모든 장로를 모으고
30 아론이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하신 모든 말씀을 전하고
백성 앞에서 이적을 행하니
31 백성이 믿으며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자손을 돌아보시고
그 고난을 감찰하셨다 함을 듣고 머리 숙여 경배하였더라
31절의 ‘감찰하셨다’에 쓰인 단어도 ‘라아’입니다.
이렇게 ‘보시기에 좋았더라’에 쓰인 ‘라아’라는
하나님의 보호하심과 감찰하심과 지키심과 도우심을
나타내는 단어인 것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도우심을 구할 때
이 ‘라아‘라는 단어를 기도의 시작으로 삼았습니다.
(사63:15)
15 주여 하늘에서 굽어 살피시며 주의 거룩하고 영화로운 처소에서 보옵소서
주의 열성과 주의 능하신 행동이 이제 어디 있나이까
주의 베푸시던 간곡한 자비와 긍휼이 내게 그쳤나이다
그러니까 모세가 창세기를 기록하면서
이 ‘라아’라는 단어를 둘째 날을 제외한
모든 날들에 마치 후렴구처럼 붙여 놓은 것은
하나님은 역동적으로 천지만물과 역사를 주관하고 계시며
그 분의 계획대로 끌고 가고 계시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보시는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모세는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이렇게 하나님은 창조 때부터 역동적으로
만물의 존재와 역사에 깊이 관여하고 계시고
그 역동적인 하나님의 계획과 일하심 속에 너희의 구원이 들어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너희는 그 하나님께 항복하고 순종하라‘라는 내용을
그 ’라아‘라는 단어에 담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잉태되기 전부터 우리를 알고 계십니다.
그리고 우리의 결국을 결정해 놓으셨습니다.
그리고 단 한순간도 놓치지 않으시고 우리를 ’라아‘’감찰하시며,
지켜보시며, 보호하시며, 우리의 필요를 준비해 주시는 분‘이십니다.
왜요? 우리를 ’좋았더라‘’토브‘의 상태로 완성하시기 위해
하나님은 우리를 ’라아‘’감찰하시고 지켜보시며 보호하고‘ 계신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그 ‘선한 상태’ ‘토브’의 상태로 지어져 가고 있는 것입니다.
창세기의 하나님의 창조가 우리가 눈으로 보고 있듯이
이토록 확실한 것처럼 우리 안에 시작된 그 하나님의 새 창조도
반드시 ‘토브’ ‘좋은 상태, 선한 상태’로 완성이 될 것입니다.
그 일을 위해 하나님은 지금 우리를 지키고 계신 것입니다.
그런데 문득 문득 우리의 처지나 환경이나 우리에게 일어나는 사건들을 보면
‘하나님은 나를 버리셨나보다’라는 생각이 들 때가 있지요?
(욥7:15‐21)
15 차라리 숨이라도 막혀 버리면 좋겠습니다.
뼈만 앙상하게 살아 있기보다는, 차라리 죽는 것이 낫겠습니다.
16 나는 이제 사는 것이 지겹습니다. 영원히 살 것도 아닌데, 제발,
나를 혼자 있게 내버려 두십시오. 내 나날이 허무할 따름입니다.
17 사람이 무엇이라고, 주께서 그를 대단하게 여기십니까?
어찌하여 사람에게 마음을 두십니까?
18 어찌하여 아침마다 그를 찾아오셔서 순간순간 그를 시험하십니까?
19 언제까지 내게서 눈을 떼지 않으시렵니까?
침 꼴깍 삼키는 동안만이라도, 나를 좀 내버려 두실 수 없습니까?
20 사람을 살피시는 주님,
내가 죄를 지었다고 하여 주께서 무슨 해라도 입으십니까?
어찌하여 나를 주의 과녁으로 삼으십니까?
어찌하여 나를 주의 짐으로 생각하십니까?
21 어찌하여 주께서는 내 허물을 용서하지 않으시고,
내 죄악을 용서해 주지 않으십니까?
이제 내가 숨져 흙 속에 누우면, 주께서 아무리 저를 찾으신다 해도,
나는 이미 없는 몸이 아닙니까?
우리는 때로 욥처럼 이러한 원망을 늘어놓습니다.
‘하나님 하나님이 정말 살아 계시다면 어떻게 나에게 이럴 수 가 있습니까?’
그런데 그게 바로 하나님이 우리를
‘토브’ ‘좋은 자’좋은 상태’로 만드시기 위한 ‘감찰‘’라아‘인 것입니다.
우리가 그 복음의 내용을 올바로 인식하고 깨닫게 되면
우리는 그러한 하나님의 감찰 앞에서 욥과 같은 투정이 아닌
다윗과 같은 찬송을 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시23:1‐6)
1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이신데.).
2 그가 나를 푸른 초장에 누이시며 쉴만한 물 가으로 인도하시는 도다
3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 도다
4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5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베푸시고
기름으로 내 머리에 바르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
6 나의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정녕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거하리로다
동일하게 둘 다 하나님의 지키심을 고백하는데
한 사람은 고통 속에서 그 지키심을 바라보고 한 사람은
만족과 기대 속에서 그 지키심을 바라봅니다.
우리는 어떠십니까?
우리 하나님은 이처럼 우리를 쫓아다니시며 지켜 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런데 그 지키심에는, 그 분의 감찰하심에는 지팡이와 막대기가 동시에 사용됩니다.
그 말은 회초리도 몽둥이도 사용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다윗은 그렇게 회초리를 맞을 때도
또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날 때도
그게 하나님의 지키심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 모든 것들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베푸시기 위한
하나님의 감찰하심이요
보호하심이라는 것을 알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그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이러한 시를 쓸 수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을 지키십니다.
우리를 ‘토브’로 이끄시기 위해 지금도 지키십니다.
우리 주님께서도 이 땅을 떠나시면서
하나님 아버지께 신신당부를 하고 가셨습니다.
(요17:11‐12)
11 나는 이제 더 이상 세상에 있지 않으나,
그들은 세상에 있습니다. 나는 아버지께로 갑니다.
거룩하신 아버지,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그들을 지켜(보전) 주셔서,
우리가 하나인 것과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여 주십시오.
12 내가 그들과 함께 지내는 동안은,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그들을 지켜서 보호하였습니다.
그러므로 그들 가운데서는 한 사람도 멸망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멸망의 자식만 잃은 것은 성경 말씀을 이루시려는 것입니다.
여기서 ‘보전하다‘라고 번역이 된 헬라어 ’테레오‘가
우리가 지금까지 공부한 히브리어 ’라아‘와 같은 단어입니다.
’지키다, 보호하다‘ 이렇게 하나님은 불꽃같은 눈으로 우리를 지키시고 계십니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모든 상황과 사건과 여건들은
다 하나님의 지키심의 열매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잘 견뎌내십시오. 잘 이겨내세요.
이미 우리와 하나님 사이를 가르고 있던 영적인 궁창은 사라졌습니다.
이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를 하나님으로부터 갈라놓을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러한 사람들에게만 주어지는
하나님의 지키심과 감찰하심을 기쁘게 감당해 냅시다.
2014.1.12(주일) 오후
이우길 집사 정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