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선은하 >
1.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창1:1)
1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우리는 요한계시록을 읽으면서 하나님의 백성들이 얼마나 존귀한 존재이며
하나님은 얼마나 영광스럽고 크신 분이신가를 알아야 하며
하나님의 백성들은 가시적인 이 역사 속에서 어떤 모습으로 살아야 하며
우리의 대적들은 어떤 모양으로 공격을 해 오는지 그리고 하나님은 그들을 어떻게 심판하실 것이며
궁극에 가서 하나님은 그 분의 백성들을 어떤 모습으로 완성하셔서 어떤 곳에 살게 하실 지를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요한계시록을 읽음으로 성경의 결론 부분을 다 알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성경의 서론 부분인 창세기를 공부할 것입니다.
모쪼록 성경의 결론을 알고 있는 우리가 성경의 서론을 공부함으로 말미암아
성경 전체의 맥을 잘 잡을 수 있을 줄 압니다.
우리는 서점에 가서 책을 고를 때 우선 지은이를 보고 목차를 봅니다.
그리고 서론 부분과 결론 부분을 대충 훑어보고 책을 선택합니다.
책의 지은이와 그 책의 서론과 결론 부분을 알면 그 책의 전체 내용이 짐작이 되기 때문이지요.
마찬가지로 성경도 서론과 결론을 잘 공부해 놓으면
그 중간에 있는 본론의 내용의 이해가 아주 수월합니다.
지은이야 뭐 확실하신 분이시니까요.
성경의 지은이는 누구입니까? 성령님이시잖아요.
여러분 혹시 이런 말을 아십니까?
‘eschatology precedes soteriology’ ‘종말이 구원을 앞선다.’는 뜻입니다.
그 말은 종종 ‘종말이 창조를 앞선다.’라고 표현이 되기도 합니다.
이 말은 프린스톤 대학에서 성경 신학을 오랫동안 가르쳤던 게할디스 보스라는 분이 하신 말씀입니다.
그 말의 의미를 잘 곱씹어 보십시오.
종말은 끝을 의미하고 창조는 시작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끝이 시작을 앞선다는 말은 이 시간 세계 속에서 사는 우리에게는 다소 이율배반적으로 들립니다.
그러나 우리가 시간을 잠시 벗어나서 영원 속에서 그 뜻을 이해한다면
그 말이 그리 어려운 말이 아님을 금방 알 수 있습니다.
무엇이든지 다 아시고(omniscience) , 무엇이든지 다 하실 수 있으시며(omnipotence),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받지 않으시는 하나님께서
시간과 공간의 제한이 없는 영원 속에서 어떤 것을 계획하셨다는 것은 이미 이루어진 것이라 할 수 있나요?
잘 생각해 보세요.
어떤 것을 계획하는 즉시 그 일을 실현하실 수 있는 능력을 소유하신 분이
시간과 공간의 제한이 없는 영원 속에서 어떤 것을 계획한 즉시 그 일이 완성이 된다는 것이
불가능한 말인가요?
하나님께서 창세 전에 시간과 공간의 제한이 없는 영원 속에서 창조를 계획하셨을 때는
이미 요한계시록의 새 하늘과 새 땅을 목적하시고 계획을 하신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그 요한계시록의 새 하늘과 새 땅은
이미 창세 전인 영원 속에서 완성이 되었다고 하는 것이고,
그런 의미에서 종말이 창조를, 혹은 구원을 앞선다는 말을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완전하신 분입니다.
그런 하나님께서 아무런 계획과 목적도 없이
우발적이며 즉흥적으로 어떤 일을 하신다는 것은 불가능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속에 요한계시록의 새 하늘과 새 땅이 그려져 있었다면
창조는 그 목적지를 향한 첫 삽에 불과한 것입니다.
첫 창조는 그 자체가 하나님의 목적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성경에서 묵시 부분을 이해할 때는
자꾸 시간을 벗어나 이해를 하는 버릇을 들여야 합니다.
시간이라는 것은 물질이 존재할 때부터 시작된 것입니다.
시간은 물질이 존재하는 방식에 불과한 것입니다.
따라서 영원 속에서의 일을 시간에 얽매여 이해를 하려다 보면 자주 단단한 벽에 부딪히게 됩니다.
아무튼 그렇게 하나님의 최종목적지인 요한계시록의 새 하늘과 새 땅,
즉 종말론, eschatology를 먼저 공부하고
그 종말이 어떻게 시작이 되어 완성의 지점으로 가게 되었는지를
기록하고 있는 초기론, soteriology를 공부하는 것이 순서상 맞으며
요한계시록을 먼저 읽고 공부하는 것도 유익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창세기를 공부하시면서
요한계시록에서 알게 된 역사와 우주의 종말과 하나님 나라의 완성이
어떻게 시작되었으며 어떻게 진행이 되어 가는지를 알게 되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을 모르고 창세기를 이해할 수 없으며
창세기를 모르고 요한계시록을 완벽하게 이해할 수 없습니다.
창세기와 요한계시록이 어떻게 밀접하게 연결이 되어 있는지
우리는 확실하게 보실 수 있으실 것입니다.
성경은 창세기의 벌거벗은 아담과 하와가
어떻게 요한계시록의 의(義)의 흰옷을 입은 하나님의 백성으로
새롭게 창조가 되는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을 잘 읽어보면 창세기, protology는 요한계시록, eschatology를 힌트하고 있고
요한계시록, eschatology는 창세기, protology를 완성하고 있는
구조로 기록이 되어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이니까 몇 군데만 확인을 해 봅시다.
(창2:9~10)
9 주 하나님은 보기에 아름답고 먹기에 좋은,
열매를 맺는 온갖 나무를 땅에서 자라게 하시고,
동산 한가운데는 생명나무와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자라게 하셨다.
10 강 하나가 에덴에서 흘러나와서 동산을 적시고,
에덴을 지나서는 네 줄기로 갈라져서 네 강을 이루었다.
창세기의 에덴에 강과 생명나무가 나옵니다.
(계22:1‐2)
1 천사는 또, 수정과 같이 빛나는 생명수의 강을 내게 보여 주었습니다.
그 강은 하나님의 보좌와 어린 양의 보좌로부터 흘러 나와서,
2 도시의 넓은 거리 한가운데를 흘렀습니다.
강 양쪽에는 열두 종류의 열매를 맺는 생명 나무가 있어서,
달마다 열매를 내고, 그 나뭇잎은 민족들을 치료하는 데 쓰입니다.
여기도 역시 강과 생명나무가 등장합니다.
Protology(서론)가 eschatology(결론)를 힌트하고 있고
eschatology가 protology를 완성하고 있는 형국입니다.
그런데 서론에는 있고 결론에는 빠진 게 하나 있습니다. 무엇입니까?
바로 선악과입니다.
그 말은 이제 결론인 새 하늘과 새 땅에서는 probation is over,
즉 다시는 시험이 없는 완전하게 회복되고 완성된 하나님 나라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렇게 서론은 결론을 힌트하고 있으며 결론은 서론을 완성하고 있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서론인 창세기에는 아담과 하와의 결혼 장면이 나오고
결론 부분인 요한계시록에는 어린양 예수 그리스도와 교회의 혼인이 나옵니다.
(창2:22~25)
22 주 하나님이 남자에게서 뽑아 낸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시고, 여자를 남자에게로 데리고 오셨다.
23 그 때에 그 남자가 말하였다.
"이제야 나타났구나, 이 사람!
뼈도 나의 뼈, 살도 나의 살, 남자에게서 나왔으니 여자라고 부를 것이다."
24 그러므로 남자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떠나, 아내와 결합하여 한 몸을 이루는 것이다.
25 남자와 그 아내가 둘 다 벌거벗고 있었으나,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이 부분은 우리가 너무나 잘 아시는 아담과 하와의 결혼 장면입니다.
그런데 24절을 보시면 아담과 하와의 결혼을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 아내와 연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루는 것’ 이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한 번 잘 생각해 봅시다. 아담이 부모가 있었나요?
아담은 인류의 시조입니다.
그가 최초의 인간입니다.
그런데 왜 아담과 하와의 결혼 장면에 갑자기 부모라는 단어가 등장한 것일까요?
그것은 이 아담과 하와의 혼인 장면은 단순히 최초의 인간들끼리의 결혼에 대한 묘사가 아니라
어떤 것을 상징적으로 그려내고 있는 것임을 힌트 하는 것입니다.
이 창세기의 아담과 하와의 혼인 장면은
하늘 아버지를(부모) 떠나 이 땅에 내려오셔서 신부인 교회와 혼인을 하시고
그들과 하나로 연합이 되시는 신랑이신 예수 그리스도,
그리고 세상의 끝 날에 하나님의 백성들과 온전히 하나가 되는,
어린양의 혼인잔치의 완성을 이루실 예수 그리스도를 미리 힌트(예표)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 성도는 천국에는 있지도 않는 결혼이라는 제도를 통해서
그 영광스러운 연합의 관계를 역사 속에서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서론에서는 신부가 벌거벗고 있습니다.
25절에 나오지요? 그러면 결론으로 가 볼까요?
(계19:7~9)
7 기뻐하고 즐거워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자. 어린 양의 혼인날이 이르렀다.
그의 신부는 단장을 끝냈다.
8 신부에게 빛나고 깨끗한 고운 모시 옷을 입게 하셨다.
이 고운 모시 옷은 성도들의 의로운 행위다."
9 또 그 천사가 나에게 말하였습니다.
"어린 양의 혼인 잔치에 초대를 받은 사람에게는 복이 있다고 기록하여라."
그리고 또 말하였습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의 참된 말씀이다."
여기에 보시면 창세기에서 벌거벗었던 신부가 무언가를 입고 있지요?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를 입고 있습니다.
역시 protology가 eschatology를 힌트하고 있고
eschatology가 protology를 완성하고 있는 형국이지요?
이렇게 창세기와 요한계시록은 아주 긴밀하게 연결이 되어 있는 책입니다.
아무쪼록 우리가 이 창세기를 잘 공부하셔서
하나님께서 계시하신 하늘의 비밀을 더욱 깊이 이해하는 데에
큰 도움이 되기를 바랍니다.
창세기의 히브리어 책명은 ‘베레쉬트’입니다.
한글로는 ‘태초에’로 번역이 되었지요?
우리가 사용하는 창세기의 제목 ‘Genesis’는
히브리 성경을 헬라어로 번역한 70인 역, LXX에서 기원된 제목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아시다시피 이 창세기의 저자는 모세입니다.
그래서 루터는 이 창세기를 ‘모세의 첫 번째 책’ ‘Das erste Buch Mose’라고 불렀습니다.
성경도 모세 오경은 모세가 저자임을 분명히 밝히고 있습니다.
(눅24:44)
44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전에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너희에게 말하기를,
모세의 율법과 예언자의 글과 시편에 나를 두고 기록한 모든 일이
반드시 이루어져야 한다고 하였다."
여기서 모세의 율법 이라고 번역이 된 ‘노모스’는 ‘law, 법’이라는 의미도
있지만 ‘모세의 책’이라는 뜻도 됩니다.
그러니까 그 어구를 달리 번역을 해 보면 ‘모세의 책’이 되는 것입니다.
주님은 모세 오경을 ‘모세의 책’이라고 말씀을 하심으로 말미암아
모세 오경의 저자를 모세로 확실하게 밝히고 계신 것입니다.
창세기의 저작연도는 모세가 BC 1,500년 경 사람이니까 BC 1,500년경이라고 알고 계시면 됩니다.
이 창세기의 구체적인 내용을 보면 창세기에는
‘우주만물의 기원’과 ‘인간의 기원’ 그리고 ‘결혼과 가정의 기원’과
‘죄와 죽음의 기원’ 또 ‘구원의 기원’과 ‘정부와 민족의 기원’
그리고 ‘이스라엘 역사의 기원’과 ‘이신칭의(以信稱義),
하나님의 주권적 선택’등이 아주 명료하고 명쾌하게 그려져 있습니다.
우리는 이 창세기를 공부하시면서
로마서에서 다루어진 모든 교리를 다 접하시게 되실 것입니다.
이 창세기는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그 첫 번째 부분이 1장부터 11장까지이고 두 번째 부분이 12장부터 50장까지입니다.
첫 번째 부분인 1장부터 11장까지 에서는
‘하나님의 창조’ ‘사탄의 등장과 사람의 타락’ ‘하나님의 구원 약속과
그 약속의 전개’ 등을 그 내용으로 하는 ‘태초의 역사부터 아브라함을
부르시기 전까지의 세계 역사’를 말하는 부분이고
두 번째 부분인 12장부터 50장까지 에서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신 때로부터
이스라엘 족속의 애굽 체류 때까지의 역사를 통해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를 본격적으로 전개하며 그리고 있습니다.
창세기에는 이렇게 많은 내용들이 들어 있지만
그 중심 사상은 어디까지나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구원이
그 주제입니다.
그게 성경 전체의 주제이기도 하고요.
하나님은 창세기의 내용을 통해서
혼돈과 공허와 흑암뿐인 죄인들을 포함한 이 세상을
어떠한 방법으로, 그리고 어떠한 힘으로 당신께서 회복시켜 가실 것인지를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창세기를 공부하면서
그 안에 예수 그리스도가 어떻게 풍성하게 계시되어 있는 지를
찾아내셔야 하며 분명히 그렇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예수 그리스도를 주제로 하고 있는 창세기에는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백성들의 구원을 설명하기 위한
여덟 명의 구별된 인물들이 등장합니다.
‘아담과 하와, 아벨, 에녹, 노아, 아브라함, 이삭, 야곱, 요셉’이 그들입니다.
그들의 창세기의 중심인물들입니다.
그 인물들은 모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필연성을 설명하거나
또 본인들이 직접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하는 삶을 산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창세기에서는 그 인물들의 묘사도 전기의 방식이 아닌
그들의 삶 중에서 하나님의 약속에 관련된 내용만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들 들어 아담이 930년을 살았는데
아담의 다른 일상은 전혀 기록이 되어 있지 않고
구속사 안에서 그가 하나님과의 약속과 관련해 저지른 사건만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요셉도 마찬가지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창세기에 등장하는 인물을 보실 때도 그 사람의 전기를 궁금해 하실 것이 아니라
그 사람들이 하나님의 목적 안에서 어떤 역할을 했는지를 찾아 내셔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창세기 1장과 2장의 창조 기사도
단순히 창조의 과정을 설명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란 무엇이며 그 사람에게 진정으로 필요한 것은 무엇인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창조의 목적에 대해 기록이 되어 있는 것입니다.
창세기 1장 1절을 보시면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로 시작을 하지요?
그런데 창세기 2장 4절도 창세기 1장 1절과 똑같은 단어들로 구성이 되어 있습니다.
창세기 1장을 창세기 1장 1절과 2장 4절이 샌드위치의 빵처럼 싸고 있다는 것을 아세요?
두 구절을 원어로 비교하여 보면
‘에레쯔(땅), 솨마임(하늘들), 엘로힘(하나님), 바라(창조하다)’등의 똑같은 단어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히브리 문학의 기법 중에 수미(首尾)일치법(inclusio)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양쪽에 주제를 두고
가운데에서 그 양쪽을 덮고 있는 주제를 구체적으로 설명해 주는 기법입니다.
지금 창세기 1장은 바로 수미일치법으로 기록이 된 것입니다.
따라서 창세기 1장을 잘 공부하면
하나님께서 왜 태초에 천지를 창조하셨는지를 알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혼돈(formless)과 공허(empty)의 상태,
즉 무(無)의 상태에 틀(structure)을 만드시고
공허(empty)를 내용(contents)으로 채우셨습니다.
우리가 앞으로 공부하게 되겠지만 그게 첫째 날부터 셋째 날까지의 창조와
넷째 날부터 여섯째 날까지의 창조가 담고 있는 내용인 것입니다
.(그런데contents가 structure(언약)를 무너뜨린 것이 타락,
그래서 예수님이 사흘 동안 무덤 속에 계심으로
셋째 날까지의 structure와 언약을 회복시키시는 것임) 그리고는 일곱째 날에 안식을 하셨습니다.
그런데 일곱째 날에는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 이는 일곱째 날’이라는 창조의 후렴구가 없습니다.
그 말은 하나님의 안식, 즉 일곱째 날은 끝없이 영원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간혹 신학자들이 인간의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안식이 깨졌다는 표현을 하는 것은
이 세상의 관점으로,
역사 속에서 가시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을 보았을 때 그러하다는 것이지
한번 안식에 들어가신 하나님은 절대 그 안식에 실패하실 수 없는 것입니다.
그 분은 전지전능하신 분 이시니까요.
하나님은 영원 속에서 영원한 안식을 하고 계십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안식이라는 것이 어떤 것을 뜻하는 것일까요?
하나님이 엿새 동안의 사역이 너무 힘들어서 숙소로 돌아가 쉬셨다는 말일까요?
아닙니다. 히브리어의 안식이라는 단어 ‘솨바트’는
‘마땅히 가야할 곳으로 가다, 제 자리에 앉다’라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천지가 하나님의 궁전입니다.
하나님은 그 모든 피조물들을 아우르시며 좌정하시고
모든 피조물은 그 앞에 예배하는 것이 바로 안식입니다.
하늘에서는 이미 그 하나님 나라가 완성이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처럼’이라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안식은 당신이 지으신 피조물들에게 예배를 받는 것이고
피조물의 안식은 하나님을 예배하고 그 분께 순종하는 삶을 사는 것이 안식입니다.
따라서 참된 안식은 하나님이 좌정하고 계신 하나님의 보좌 아래에서
자기가 왕인 줄 착각하고 자기를 숭배하며 살던 자들이
그 자리에서 내려와 하나님께 항복하고
그분께 순종하며 예배하는 자리에서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게 참된 행복이며 참된 안식인 것입니다.
그 참된 안식을 우리가 주일날 모이는 공예배 시간에 맛보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여섯째 날 인간을 창조하시고
그들에게 모든 피조물들을 다스리고 지키고 정복하라 하셨습니다.
그렇게 세상을 다스리고 지키고 정복하여 그들을 이끌고
일곱째 날 하나님 앞으로 나아와 하나님께 예배하는 것이
오늘날 예배의 모형인 것입니다.
지금 세상에서 엿새 동안 열심히 살아서 세상을 지키고
다스리고 정복하는 일을 하게 되면 우리에게 결실로 주어지는 것이 무엇입니까?
돈이지요? 그래서 예배의 요소 중에 헌금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 이렇게 엿새 동안 하나님의 말씀을 좇아
열심히 세상을 다스리고 지키고 정복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제가 세상(돈)에게 정복당하지 않고 세상을 정복하여 이렇게 결실을 맺었습니다.
여기 저의 엿새 동안의 삶이 있습니다.
받으시옵소서.’가 바로 헌금인 것입니다.
바로 창세기에서 주어진 하나님의 명령에 대한 나의 순종과 복종의 삶을
주님 앞에 드리는 것이 헌금인 것입니다.
하와가 다스려야 할 뱀에게 오히려 유혹을 당함으로
질서가 깨지고 예배의 삶이 금이 갔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다스려야 할 이 세상 것들에게
우리가 명령을 받고 살고 있다면
우리는 여전히 첫 번째 아담 속에 들어 있는 자 일지 모르는 것입니다.
세상의 힘의 대표격인 돈을 다스려야 하는 하나님의 백성이
돈 때문에 예배를 거르는 것은 돈에게 명령을 받고 있는 형국인 것입니다.
골프에게 명령을 받고, 피크닉에게 명령을 받고, 게으름에게 명령을 받는 이들도 있습니다.
성도는 세상을 다스리며, 지키며, 정복하여 하나님 앞으로 끌고나와
예배하게 하는 worship leader여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 나라의 안식은 일주일에 한번 오는 것이 아니라
매 순간 순간이 안식이지요? 하나님 나라 자체가 안식의 나라이니까요.
그래서 이 땅에서 하나님 나라를 사는 하나님 나라 백성인 성도는
매 순간을 하나님께 순종하는 삶을 살아 하나님께 바치는 삶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거룩한 산제사 입니다.
그러한 성도의 삶을 모형으로 보여주는 것이 주일 공예배이고요.
그렇게 창세기 1장은
모든 피조물의 창조 목적이 자세한 그림으로 알기 쉽게 설명이 되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과 하나님 나라의 완성,
좀 더 자세하게 말하면 인간의 시작과 만물의 시작,
그리고 인간의 타락과 실패,
그리고 그와 동시에 전개되는 하나님의 구원을 친절하고
자세하게 설명하시기 위해
만물의 시작인 ‘태초’부터 시작을 하시는 것이지
단순히 창조의 과정을 설명하시기 위해
태초부터 시작을 하시는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그러니까 여러분은 창세기를 통해서
지구의 나이가 몇 살인지, 지구가 만들어진 과정이 어떠했는지 등의
고고학적이며 역사적인, 객관적인 정보나 지식을 탐구하실 것이 아니라
그 창조의 목적 뒤의 묵시 속에서 흐르고 있는
하나님의 영원하신 목적과 뜻을 발견하셔야 하는 것입니다.
모세가 이 창세기를 비롯한 모세 오경을 누구에게 읽히기 위해 썼을까요?
이 모세 오경의 제1차 수신자가 누구입니까?
애굽에서 탈출한 이스라엘 백성들입니다.
모세는 ‘애굽에서 나온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은 어떤 분이시기에 애굽을 치시고 이스라엘을 구원 하실 수 있으셨을까?
하나님은 어떤 분이시기에 족장들에게 미리 약속을 하시고
그 약속하신 것을 그대로 이루어 주셨을까?
하나님은 어떤 분이시기에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하셨을 뿐 아니라
계명을 주시면서 그들에게 거룩을 요구하시는가?
이스라엘 민족은 다른 민족들과 무엇이 다른 것인가?’를
설명하기 위해 창세기를 쓴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나오기는 했지만
400년 동안 애굽의 우상을 섬겨 왔기 때문에
그들은 여전히 애굽에서 섬기던 우상들,
태양과 달과 별과 강과 바다와 뱀들을 우상으로 섬겼습니다.
그러한 사람들에게 모세는 ‘사람이 섬길 신은 그런 피조물들이 아니다.
오히려 그런 것들은 너희들에게 다스리라고 주신 것들이다.
사람이 섬길 신은 오직 한 분,
그들을 창조하신 하나님이시다’는 것을 확인시켜 주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오늘날의 성도들이 이 창세기를 읽으면서
‘하나님은 어떤 분이시기에
마귀의 세력을 무장해제시키시고 우리들을 구원하실 수 있으셨을까?
하나님은 어떤 분이시기에 이렇게 태초부터 약속해 놓으신 것들을
완벽하게 이루어 낼 수 있으셨을까?
하나님은 어떤 분이시기에 우리 성도들을 구원하시고
우리에게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거룩한 삶을 살라고 요구하시는 것일까?
구원받은 우리 성도들은 선택받지 못한 다른 사람들과 무엇이 다르기에
우리만 구원을 받게 되었는가?’를 배울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창세기는 하나님의 선택 안에 들어 있는 하나님의 백성들만이
이해할 수 있는 책이지 절대 하나님의 영이 없는 자들이 과학적이며
이지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책이 아닌 것입니다.
창세기를 잘 보시면 하나님께서 처음부터
‘산 자’와 ‘죽은 자’를 가르고 계신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오직 하나님의 택한 자들에 관해서만 관심을 갖고 계십니다.
그래서 성경은 ‘아벨이나 에녹’같은 ‘산 자들’
다른 말로 ‘하나님의 라인’인 인물들의 나이는 정확하게 기록을 하고 있지만
가인의 후손들의 나이는 기록을 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 말은 하나님께서는 선택 밖의 사람들은 모두 ‘죽은 자’로 취급하셨다는 의미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바로 그 ‘산 자’들에게만 성경을 주신 것입니다.
따라서 창세기를 비롯한 성경은 ‘산 자’들의 책이지 ‘죽은 자’들의 책이 아닌 것입니다.
그래서 죽은 자들은 이 책을 고작 현대의 과학이라는 틀에 넣어 난도질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중간 정리를 하자면
창세기는 창조의 기사가 적힌 과학 책도 아니고 역사책도 아니며 위인전도 아닙니다.
창세기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주어지게 될
‘생명의 필요성’에 관해서만 설명하고 있는 책인 것입니다.
그래서 독자들로 하여금 이 책을 통해
그리스도 안에서 참 생명의 회복을 약속하신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순종할 수 있도록 하나님의 택한 자들에게 하나님이 하나님의 생명을 심어서
어떻게 하나님의 아들들로 회복시켜 가시는 지를 그림으로 보여주시는 책인 것입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창세기의 거시적이며 개괄적인 내용에 관해 살펴보았습니다.
이제 좀 더 세밀하고 구체적인 내용으로 들어가 보도록 하겠습니다.
오늘 본문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에서 보시는 것처럼 천지와 만물은 창조된 것입니다.
여러분은 그것을 믿나요? 물론 믿으실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학교에 다니실 때 모두 진화론을 공부했습니다.
그래서 창조를 믿는다고 하면서도 삶은 진화론적 사고를 바탕으로사시는 분들이 많이 있습니다.
진화론은 단순히 모든 만물은 진화한다는 학설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생활 깊숙한 곳에 하나의 원리로 자리를 잡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오늘날 교회를 통째로 삼켜버린 인본주의나 유물론, 물질주의 등이 진화론의 산물입니다.
진화론은 초월을 부정하고 유물론적 이해로 세상을 바라보는 것이기 때문에
그들에게는 이 세상이 전부일 뿐입니다.
그리고 그들에게는 ‘죄’의 개념도 없습니다.
그들에게 있어서 ‘죄’는 아직 온전히 진화되지 못 한 ‘미숙함’일 뿐이지 ‘죄’가 아닌 것입니다.
그렇게 이 세상만이 전부라고 믿으며 ‘죄’의 개념도 없는 그들은
이 세상의 힘을 추구하여 높은 곳에 올라가는 것을 최고의 목표로 삼습니다.
그게 진화론적 삶입니다.
오늘날 기독교가 창조론을 믿는다고 하면서 삶은 진화론적으로 살고 있는 것을 보면
그 진화론이 우리의 삶을 얼마나 깊이 잠식하고 있는지 잘 아시겠지요?
창세기는 바로 그러한 신비주의와 기복주의, 인본주의를 낳은 진화론을
정면으로 공격하여 깨 버릴 수 있는 책입니다.
부디 우리들은 이 창세기를 공부하면서 그 진화론적 사고방식을 모두 깨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진화론이라는 것은 1859년에 찰스 다윈이 종의 기원이라는 책을 출판함으로써
유력한 학설로 부각이 되었지만
사실 그 전부터 진화론은 항상 있어왔던 학설이었습니다.
고대 헬라의 탈레스나 에피쿠로스, 아리스토텔레스 등이
이미 ‘자연은 진화에 의해 완성이 된다.’라는 원시 진화론을 주장했었고
근대에는 프란시스 베이컨이나 데카르트, 임마누엘 칸트 등이 진화론을 주장했었습니다.
진화론을 주장했었습니다.
그러다가 진화론을 하나의 학문으로 정립을 한 최초의 생물학자가 나타났는데
그 사람의 찰스 다윈의 할아버지인 에라스무스 다윈입니다.
그후 용불용설로 유명한 라마르크에 의해 더욱 발전된 진화론이
찰스 다윈 때 와서 전 세계적으로 알려지게 된 것입니다.
그 진화론에 따르면
인간의 기원은 우연적인 원자 결합물의 산물입니다.
무기물질이 우연하게 유기물질화 되어서
그것이 아메바를 거쳐 어류로 어류가 양서류로 양서류가 파충류로 파충류가
포유류로 그리고 드디어 인간으로 진화를 했다는 것이 진화론자들의 주장입니다.
그러니까 진화론자들의 주장에 의하면
이 지구상에 존재하는 200만 종이 넘는 수많은 생물들은
처음부터 특이한 형태를 따라 종류대로 창조된 것이 아니라
하나의 공통된 조상으로부터 수십 억 년의 오랜 기간 동안
서서히 진화되어 오늘날에 이른 것이기 때문에
앞으로 인간을 비롯한 만물들은
어떤 다른 모양으로 바뀔지 모른다는 결론이 나오는 것입니다.
정말 그럴까요?
그러나 창조론은
종의 발생 기원은 하나님의 창조에 의해 처음부터 독립적이고 완전하며
변이는 그 같은 종 내에서만 일어나고
종에서 종으로 바뀌는 대진화(양서류에서 파충류로 파충류에서 포유류로의 진화)는
일어나지 않는다고 보는 것입니다.
실제로 1980년 10월 시카고에서 열렸던 세계 진화론자 학회에서도
작은 진화(소진화)의 증거가 대진화의 증거가 될 수 없다는 결론을 내린 바가 있습니다.
진화론자들도 대진화를 인정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현대인들이 좋아하는 이성과 합리를 근거로 왜 창조론이 맞는지 설명을 해 드리겠습니다.
그러나 과학적으로 증명을 해 드릴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진화론이나 창조론 모두 과학적인 사실 입증이 불가능한 학설이기 때문입니다.
어차피 진화론이라는 것도 하나의 가설일 뿐이지 실험을 거친 ‘사실’이나 ‘법칙’이 아닙니다.
찰스 다윈의 ‘종의 기원’이라는 논문도
과학계로부터 사실이요 법칙으로 인정을 받지 못했다는 것을 잊지 마세요.
인간이 어떤 사실을 과학적으로 증명하여
그것을 원칙으로 받아들이고 사실로 인정하는 과학적인 방법에는 여섯 단계가 있습니다.
첫 단계가 그 사람이 사실로 증명하고자 하는 현상을 ‘관찰’하는 단계입니다.
두 번째 단계는 그 관찰한 현상의 원인을 알아보려는 ‘의문’의 단계,
다른 말로 ‘왜 이런 일이 일어날까?’하는 ‘문제제기’의 단계로 넘어갑니다.
세 번째 단계는 그 의문에 관한 ‘추리’를 하는 단계입니다.
다른 말로 ‘가정’의 단계입니다.
그러니까 과학도 결국엔 의문과 추리, 가정에서 출발하는 것입니다.
네 번째 단계가 그 가정을 ‘이론화’하는 단계입니다.
그리고 다섯 번째 단계가 그 이론화된 가정이
사실인지의 여부를 알아보기 위해 실험을 하는 ‘실험’의 단계입니다.
그렇게 같은 실험을 여러 번 반복해서 누가 언제 어디서 해도 똑같은 결과를 얻게 되면
그 이론은 비로소 과학적 사실이나 법칙으로 인정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어떤 것이 과학적 사실이나 법칙으로 인정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실험’의 단계까지 통과를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진화론이나 창조론 모두 네 번째 단계,
그 이론을 ‘이론화’하는 데까지는 가능하지만
다섯 번째 단계인 실험의 단계로는 넘어갈 수가 없습니다.
진화론을 실험하기 위해서는
누군가가 수백만 년이나 수 십 억 년을 살아있어야 하는데 그럴 수가 없지요?
진화론자들의 주장에 따르면 진화는 수 백 만 년에서 수 십 억년에 걸쳐 일어난다고 하니까요?
창조론도 만물이 창조되는 순간을 관측할 수 있는 사람이 없기 때문에
과학적으로 그 이론이 사실임을 증명해 낼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이미 과학적 방법인 여섯 단계를 모두 통과해서 사실이며
법칙으로 인정된 것들이 있습니다.
그 법칙을 근거로 왜 창조론이 맞을 수밖에 없는가를 살펴보자는 것입니다.
먼저 과학적으로 증명이 된 생명의 발생설을 근거로
진화론과 창조론을 비교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과학자들이 진화론에 힘입어 생명이 자연적으로 생길 수 있다는 가정하에
지금까지 무수한 실험을 해 왔습니다.
그러나 그 어떤 실험도 무생물에서 생물이 생겼다는 보고를 하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이태리의 ‘레디’나 프랑스의 ‘파스퇴르’같은 학자에 의해
생명체는 반드시 그 생물의 모체에서만 생겨난다는 사실이 실험으로 입증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현대 과학은 실험에 의해서 생물의 자연 발생설이 틀렸다는 것을 입증했고
생명은 생명에 의해서만 생겨난다는 생물 발생설을 과학적인 상식으로 인정했습니다.
그러니까 현대 과학은 자체 내에서 모순을 갖고 있는 것입니다.
전통적으로 진화론을 지지하면서 생명의 발생설은
자연 발생설이 아닌 창조론을 뒷받침하는 생명 발생설을 정설로 인정하고 있는 것입니다.
진화론자들은 우주에 존재하던 무기 물질이 어떤 화학 작용에 의해서 아미노산이 되었고
그 아미노산이 생명체를 이루는 단백질이 되었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아미노산이 단백질이 되기 위해서는
수많은 아미노산이 규칙적이고 질서있게 배열이 되어야 단백질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단백질은 20종류의 아미노산 500개 이상이
규칙적으로 순서적으로 일정하게 연결이 되어 있어야 비로소 단백질의 기능을 할 수 있고
그것도 아미노산이 적당히 접혀져서 연결이 되어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복잡한 단백질이 2800종이 모여서 겨우 만들 수 있는 것이
대장균과 같은 단세포 박테리아입니다.
과학자들은 고도의 지적인 존재가 개입해서 아미노산을 규칙적이고 질서 있게 배열을 하지 않는 이상
아미노산이 저절로 단백질이 될 수 있는 확률은 10의 20,000승 분의 1이라고 인정하고 있습니다.
10의 20,000승 분의 1이라고 인정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보통 수학에서 10의 50 승 분의 1 이하의 확률은 일어날 수 없는 것이라고 배웠지요?
그러니까 10의 20,000승 분의 1이라는 확률은 0 이라는 소리인 것입니다.
그 말은 생명이 절대 우연히 발생할 수 없다는 말인 것이지요.
그렇게 현대 과학은 스스로 생명이 절대 우연히 발생할 수 없음을 증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아울러 생물의 재생산 체계 또한 자연적으로 만들어 질 수 없는 정교한 창조물입니다.
유전물질인 DNA도 뉴클레오티드로 구성이 되어 있는데
이것도 어떤 고도의 지적인 존재의 개입이 없이는
도저히 우연히 생겨날 수 없는 일정한 순서와 연결과 배열, 그리고 아주 복잡한 구조를 가지고 있습니다.
게다가 이렇게 복잡하고 질서 있는 단백질과 DNA가 함께 있어야만 생명 현상이 유지가 됩니다.
이게 우연히 일어날 수 있다는 것입니까?
이러한 단백질과 DNA가 반드시 함께 있어야만 생명 현상이 유지된다는 것은
생명은 인간이 감히 상상할 수도 없는 어떤 지적인 존재에 의해 만들어졌다는 증거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미국의 과학자인 W.F Bruce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진정한 과학자치고 무신론자가 있다면 그는 과학자가 아니던지 정신병자이다.
과학자들이 인간의 단백질이나 DNA, 세포 등을 연구하면 할수록
생명이라는 것은 고도의 지적인 존재의 개입이 없이는 절대 우연히 발생할 수도 없을 뿐 아니라
지구상에서 가장 명석한 두뇌를 가진 인간 1만 명을 모아도
그러한 생명 발생의 실험은 성공할 수 없다는 것을발견할 뿐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이렇게 과학에 의해 증명이 된 생명 발생설 (생명은 생명에 의해서만 발생할 수 있다)이
현대 과학이 실험하여 증명한 법칙이라면
이 땅에 존재하는 생명은 모두 그 선대에 존재했던 생명으로부터 나왔다는 결론이 되는데
그럼 최초의 생명은 어디서 생겼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것이지요.
두 번째로 열역학의 법칙에 의해 진화론과 창조론을 비교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열역학이라는 것은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모든 반응에 관련된 에너지의 양과 형태의 변화, 일과 열의 상호 관계를 다루는 학문입니다.
열역학 제 1의 법칙이 뭐지요? 에너지 보존의 법칙입니다.
이 법칙은 에너지는 자연적으로 생성될 수도 없고, 소멸될 수도 없음을 뜻하는 것입니다.
그 말은 에너지의 형태는 변할 수 있지만
그 에너지의 총량은 항상 불변하다는 것을 뜻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나무는 불에 태우면 연기와 재가 되어서 사라지는 것 같지만
사실은 사라지는 것이 아니고
탈 때 발생하는 에너지로 바뀌는 것뿐이라는 것이지요.
그러므로 만일 연기와 재에다가 그 나무가 탈 때
사라진 에너지를 다시 더하면서
어떤 창조적인 조작을 한다면 다시 나무가 될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게 에너지 보존의 법칙인 것입니다.
원자 폭탄이 바로 이 원리를 이용한 것이지요.
원자의 핵이 분열할 때 엄청난 에너지가 방출되는 것을 이용해서
큰 폭발력을 얻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열역학 제 1법칙에 의하면 물질 자체가 곧 에너지인 것입니다.
그런데 단세포 생물이 다세포 생물이 되고
다세포 생물이 어류가 되고
어류가 양서류가 되는 식의 진화론은
이 열역학 제 1의 법칙인 에너지 보존의 법칙에 위배되는 것입니다.
어떤 물질이 커지고 진화한다는 것은 에너지가 늘어난다는 말이니까요.
그러면 이런 반론이 나오겠지요?
‘그럼 무(無)에서 창조된 만물은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우리는 그러한 질문에 ‘그래서 물질이라는 것이 생길 때는
외부에서 어떤 힘이 개입되어야 하는 것이며
물질이 창조될 때 외부에서 강력한 에너지가 투입이 되었는데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능력 이며
바로 그 하나님의 힘이 에너지로, 힘으로 작용한 것이다.’라는 대답을
할 수가 있는 것이지요.
그게 창조론입니다.
열역학 제 2의 법칙도 있지요?
열역학 제2의 법칙은
자연적으로 발생하는 모든 현상은 그 에너지를
가장 낮은 상태로 유지하는 쪽으로 진행한다는 법칙인 것 입니다.
예를 들어 돌아가는 팽이를 계속해서 돌게 하기 위해서는
외부에서 ‘팽이채’라는 운동 에너지가 계속 공급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팽이에서 팽이채를 떼는 순간 팽이는
운동에너지를 마찰에너지로 바꾸게 되고
점점 낮은 운동에너지 상태가 되다가 결국 안정된 상태,
즉 가장 낮은 에너지 상태인 누운 상태로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과학이 실험을 통해 증명해 낸 법칙입니다.
동물이나 식물도 마찬가지입니다.
동물이나 식물은 원자들이 모여서 특별한 구조를 갖는 물질이 된 것인데
그렇게 질서도가 높은 상태에서 세월이 흘러 나이가 들게 되어
늙거나 죽어 부패하게 되면
그 동물이나 식물은 원자 또는 분자 단위로 분해되어서 주위에 흩어지므로
무질서한 상태로 흩어지는 것이 자연의 법칙인 것입니다.
그것을 성경은 ‘썩어짐의 종노릇’이라고 표현을 합니다.
즉 열역학 제 2법칙에 따르면 물질이란 자연적으로 놔두면
결코 스스로 질서 있게 정렬을 하거나
스스로 에너지를 발생시킬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에너지를 가장 낮은 상태로 유지하는 쪽으로 진행하게 되고
무질서한 상태로 변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게 과학입니다.
그런데 진화론은 간단한 것들이
점점 복잡하고 질서 있는 것으로 바뀌어 진화를 한다는 것인데
이것은 열역학 제 2법칙에 명백하게 위배되는 이론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진화론은 과학적으로도 너무나 많은 허점을 갖고 있는
‘가설’에 불과한 것입니다.
물론 창조론도 과학적으로 증명을 하자면
설명이 안 되는 부분이 너무나 많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진화론자들에게는 없는 ‘믿음’이라는 것이 있어서
그러한 불합리한 점들이나 설명이 안 되는 부분들이
그냥 믿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만물은 창조된 것입니다.
아울러 기독교의 역사관은 직선적 역사관입니다.
창조로 시작이 되어 언젠가 끝이 나게 될 역사관이
바로 직선적 역사관인 것입니다.
시작하신 분께서 언젠가 끝을 내신다는 것을 우리는 믿고 있습니다.
작은 시계 하나가 조립되어 완성이 될 때에도
시계 조립공이라는 외부의 힘,
에너지가 부품을 가지고 순서에 따라 질서 있게 조립을 하는 일을 해야
‘시계’라는 것이 탄생이 되는 것입니다.
설사 시계의 부품들이 자생적이며 우발적으로 생겨났다 하더라도
누군가 지적인 존재가 그것을 질서 있게 순서에 따라 조립을 하는 일,
다른 말로 ‘밖으로부터의 에너지’를 부어 넣지 않으면
시계는 저절로 시계가 될 수 없는 것입니다.
그게 과학의 원리입니다.
일도 그냥 아무렇게나 해서는 안 됩니다.
고도의 지적인 존재가 개입을 해서 일을 해야
상품이나 작품이 생기는 것입니다.
시계 부품을 통 속에 모두 쏟아 넣고 막 흔들면 저절로 시계가 되지 않듯이
상품이나 작품이라는 것은 고도의 지적인 존재가 정확한 설계와 계획에 따라
에너지를 가해야 생겨나는 것입니다.
하물며 생명체의 탄생이 저절로 우발적으로 될 수 있다니요.
이게 어떻게 말이 됩니까?
이렇게 생명체의 발생도 미리 설계된 가운데서
어떤 외부의 조작자가 의도적으로
질서를 증가시키는 방향으로 작용하지 않는다면
절대로 우발적으로 일어날 수 없는 것입니다.
창조론이 옳다는 것은 진화론 자체의 모순으로도 증명이 됩니다.
진화론에는 ‘적자생존, 우성유전의 법칙, 용불용설’이 중요한 기둥입니다.
‘기린은 높은 데 있는 먹이를 잘 먹기 위해 목이 길어졌다.
낙타는 사막에서 갈증을 이길 수 있도록 등에 혹이 생겼다.’
이런 것이 적자생존, 우성 유전의 법칙, 용불용설입니다.
그러면 모든 생물들의 신체가 전부 자기가 쓰기에 편리한 쪽으로 진화를 해야 옳습니다.
그러면 한 가지만 예로 들어볼까요?
꿀벌의 침을 한번 생각해 보세요.
꿀벌의 꽁무니에 달린 침의 모양은 미끈한 것이 아니라
낚시 바늘과 같이 톱날 같은 갈고리가 되어 있어서
그 침이 빠지면 복부 전체가 떨어져 나가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벌은 한번 침을 쏘면 그것을 다시 뺄 수가 없어서 자기도 죽게 됩니다.
그렇다면 벌의 침은 적자생존, 우성유전의 법칙,용불용설에 의해
진화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 명백하지요?
만일 꿀벌이 진화에 의해 존재하게 된 것이라면
꿀벌은 불편한 쪽으로 진화를 한 것이 됩니다.
그러면 어떤 생물은 자기가 편리한 쪽으로 진화를 하고
어떤 생물은 오히려 불편한 쪽으로 진화를 하고 그런 건가요?
아닙니다. 기린이나 낙타, 꿀벌은 원래 창조될 때
그런 모양으로 그렇게 창조 된 것입니다.
그 모든 것 안에는 하나님의 지혜가 담겨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진화론에 의하면
생물들은 수 백 만 년, 혹은 수십 억 년에 걸쳐 진화를 한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지금도 중간 단계의 생물들이 존재해야 하고
그러한 중간 단계의 생물들의 화석들이 존재해야 합니다.
그런데 진화의 중간 단계에 있는 생물의 화석이나
그러한 중간 단계의 생물을 현대 과학은 발견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모든 생물은 처음부터 독립적으로 완전하게
그 종류대로 창조된 것이기 때문에
절대 그런 중간 단계의 생물이 존재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정말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창조하셨다는 것을 믿고 있습니까?
그렇다면 무(無)에서 말씀으로 만물을 창조하신 그 하나님께서
절대 불가능 할 것 같이 느껴지는 여러분 안에서 이루고 계신 새 창조도
반드시 완성하실 분이라는 것도 믿으십니까?
그래서 우리 성도에게는 창조가 사활을 걸 만큼 중요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혼돈(formless)과 공허(empty) 즉,
무(無)에서 모든 피조물을 만들어 내신 것처럼
도저히 불가능한 혼돈과 공허 뿐인 우리 안에 들어오셔서
우리를 새로운 창조물로 완성해 내실 것입니다.
우리는 그러한 능력의 하나님, 창조의 하나님을 믿고 있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히브리서 11장 3절을 결론으로 읽고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히11:3)
믿음으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이 세상을 창조하셨다는 것,
곧 보이는 것은 나타나 있는 것에서 생기지 않았음을 깨닫습니다.
2014.1.12 주일 오후 8:35
이우길 집사 정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