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속의 성차별에 관해서
1. 일반적 견해
성경 창세기 1장에서
하나님께서 천지를 만드신 후에 마지막으로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셨는데
남자와 여자로 창조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복을 베푸시고
그들에게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고 하셨습니다.
땅을 정복하고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고 하셨으며
먹을 거리도 주셨습니다.
창세기 2장에서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명의 기운을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명체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사람을 데려다가 에덴동산에 두시고
그곳을 돌보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동산의 모든 나무 열매는 네가 먹고 싶은대로 먹어라.
그러나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만은 먹어서는 안된다.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는 반드시 죽는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남자가 혼자있는 것이 좋지 아니하니
그를 위하여 돕는 짝을 만들어 주겠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남자를 깊이 잠들게 하시고
남자에게서 갈빗대 하나를 뽑고 그 자리는 살로 채우시고
뽑아 낸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시고
그 여자를 남자에게로 이끌어 오시니
그 남자가 "이는 내 뼈중의 뼈요, 살중의 살이라.
이것이 남자에게서 나왔으니
여자라 부르리라" 했습니다.
이것이 성차별로 성경이 씌여졌다는 큰 이유 중의 하나입니다.
창세기 3장에서
선악과를 따먹고 죄를 짓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뱀이 유혹해서 여자가 선악과를 따먹습니다.
남편에게도 주어 먹게 합니다.
범죄 결과 하나님 앞에서 심판을 받습니다.
먼저 아담에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네게 먹지 말라한 그 나무 열매를 네가 먹었느냐?"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 있게 하신 여자,
그가 그 나무 열매를 내게 주므로 내가 먹었습니다"라고 여자에게 책임을 돌립니다.
하나님이 여자에게 "네가 어찌하여 이렇게 하였느냐?"물었습니다.
"뱀이 꾀므로 내가 먹었습니다"하고 뱀에게 책임을 돌립니다.
하나님이 뱀에게 벌을 내리셨습니다.
여자에게는
임신하는 고통과 해산하는 고통을 주시고
남편을 원하고 남편이 너를 다스릴거라고 말했습니다.
아담에게는 땅이 너로 인해 저주를 받고
네 평생에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이 창세기 2장부터 3장까지 나오는 남자와 여자에 대한 이야기의 큰 줄거리인데,
원래 성경에는 여자 이름이 없었습니다.
남자를 만들 때 아담이라고 했습니다.
아담이라는 히브리어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사람이 곧 아담이었습니다.
여자는 이름이 없었습니다.
남자는 이-슈이고, 여자는 이-샤인데,
이걸 종속관계로 사람들은 해석을 했습니다.
이런데서 남녀 성차별의 근거가 나온다는 겁니다.
그리고 아담이 여자에게 하와라고 이름을 지어주는 것은 3장 20절에 가서 나옵니다.
그 이전까지는 이름이 없습니다.
여기서 문제는 뱀과 여자의 관계인데,
왜 뱀은 남자에게로 가지 않고 여자에게로 갔을까요?
이 이야기를 원래 하나님이 여자를 남자보다 못한 존재로,
남자에게 종속되는 관계로 만들었기 때문이다는 쪽으로 믿고,
여자라고 하는 존재는 원래 유혹에 쉽게 빠지도록 만들어졌다는 해석을 하게 됩니다.
또한 구약성경을 보면 남녀차별을 많이 찾아볼 수 있습니다.
출애굽기 12장 37절, 민수기 1장 2절- 3절을 보게 되면,
인구조사하는 이야기가 나오는데,
여자하고 어린아이는 인구조사에서 빠집니다.
사람으로 취급하지 않았다는 겁니다.
예를 몇 가지 더 들어봅시다.
기드온 이야기에서,
기드온은 훌륭한 하나님의 일꾼이었습니다.
사사기 8장 30절을 보게되면
기드온은 아내가 많아서 친아들만 70명이었다는 이야기가 나오는데,
여기서도 딸은 빼놓게 됩니다.
그리고 열왕기상 11장 3절에 보면
예루살렘 성전을 지은 솔로몬 왕은
700명의 후궁과 300명의 첩을 거느리고 있었습니다.
후궁하고 첩을 합해 1000명입니다.
그러고도 훌륭한 왕이 되는 겁니다.
그리고 구약의 공통되게 나오고 십계명에도 나옵니다만,
출애굽기 20장 17절에 '네 이웃의 아내나 소나 나귀나 탐내지 말아라'고 나옵니다.
여자는 소나 나귀나 똑 같은 물건으로 취급했습니다.
신명기 5장 21절에도 '네 이웃의 아내나 집이나 밭이나 소나 나귀나...'라는 식으로 나옵니다.
여자는 소유물입니다.
욥기 25장 4절을 보게되면,
여자에서 난 사람이 어찌 순결할 수 있겠느냐?
여자와 같은 불순한 몸에서 나왔으니, 순결할 게 뭐 있겠느냐?
그런 이야기도 나옵니다.
잠언에도 이런 구절이 많이 나옵니다.
유대인들이 지금도 남자들은 매일 세 번씩 회당에 기도하러 갑니다.
그때의 기도문을 보게되면,
'내가 이방사람으로 태어나지 않고 여자로 태어나지 않은 것을 감사드립니다'라고 한답니다.
구약시대가 매우 엄격한 가부장적 사회인 점을 감안하면,
창세기 38장에 나타난 대를 잇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하는 다말의 경우는
가부장적 사회에선 후대의 모범으로까지 남을 만큼 칭찬할 만한 것으로 회자됩니다.
신명기 25장에는
형이 아들 없이 죽으면
동생이 형수와 결혼해서 형의 대를 이어주어야 한다고까지 나옵니다.
성경은 은연중에라도 가부장적 체제를 정당화하는 구실을 하기도 했던 것입니다.
사무엘하 11~13장을 잘 살펴보면
다윗이 밧세바를 취한 것은 여인에게 해를 끼친 죄이기보다
남편 우리아에게 속한 것을 침해한 죄로 얘기되고 있습니다.
물론 이외에도 여성의 존재는
남성에게 속한 것으로 묘사한 구절이나 비유한 언급은 성경에 허다합니다.
신명기 21장 11절에는
전쟁에서 사로잡은 여자를 아내로 맞아도 좋다고 말씀합니다.
게다가 "남자를 안 일이 없는 처녀는
너희를 위하여 살려두라"(민 31:18)고 말씀하십니다.
또한 똑같은 입장에서 딸이 유산을 상속받는 경우는 일반적으로 허락되지 않으며
허락되더라도 매우 특별한 경우에 속하고 있습니다(민 27:8).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아브라함이 자기 아내 사라를 다른 이에게 잠자리를 같이 하라고 내주거나(창 12:10~20, 20:1),
롯은 소돔사람들에게 처녀인 자기 딸을 주겠다고 합니다(창 19:4~9).
한 레위인은 기브아에서 자기 첩을 무뢰배들에게 내주기도 하는데,
매우 서글픈 사실은 그 여자는 밤새 욕보임을 당하고선 결국 죽고 말았다는 점입니다(삿 19).
성경에 따르면
여성의 종속을 정당화할 수 있는 여지가 많습니다.
예컨대 하와가 아담의 갈비뼈에서 나온 것을 두고서 그렇게 해석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특히 창세기 3장 16절의 "남편은 여자를 다스릴 것이라"고 말한 구절은
오랫동안 여성을 남성의 종속된 존재로 정당화해 주는 구실을 해왔습니다.
뿐만 아니라 가부장적 기독교의 역사에선 여성은 종종 '악의 근원'으로 취급됩니다.
즉, 죄의 근원은 결국 하와에서 비롯됐다는 것입니다.
결혼은 원래 양편이 순결을 지켜야 함에도
성경도 종종 남자보다는 여성의 순결을 더 강조하거나
일부다처제의 모습을 이미 정당화하는 구절을 많이 보여주곤 합니다.
신명기 21장 15~17절을 보면
사랑 받는 아내와 미움 받는 아내를 얘기하지만 적어도 두 아내를 인정하고 있습니다.
결혼하면 남자는 여자에게 이혼을 요구할 수 있지만(신 24:1) 여자는 그럴 수 있는 규정이 없습니다.
슬프게도 결혼한 여자가 처녀가 아니었다고 고발당하면
그 아버지는 자기 딸이 처녀였음을 증명해야 하고,
입증되지 않으면 그 여자를 아비의 집문 앞에서
친정이 있는 성읍 사람들이 돌로 쳐 죽이라는 놀라운 규정도 성경에 있습니다(신 22:13~21).
물론 간음할 경우 남자든 여자든 둘 다 죽일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여기서의 결정적 문제는 남자는 여자처럼 순결함을 증명해야 한다거나
총각이 아니었다고 돌로 쳐 죽이라는 그런 규정은 성경 어디에도 없다는 사실입니다.
정확하게 말해서 그것은 형평성을 잃은 것입니다.
성경은 여성을 부정하고 더러운 존재로 묘사하기도 합니다.
즉, 여자가 태어나면 남자보다 두 배의 날 수로 정결 의례의 규정을 지켜야 합니다(레 12:2~5).
이러한 점은 성경 역시 생물학적 차이를 성차별로서 의례화한 사례에 속합니다.
또한 레위기 15장 19절 이하를 보면,
여성의 생리현상도 매우 부정한 것으로 얘기되는데,
그 여자가 앉았던 자리뿐 아니라 그 자리에 앉았던 사람까지도 부정한 것으로 말씀되고 있습니다.
또한 월경이 아닌 하혈의 경우도 마찬가지로 부정합니다(레15:25).
또 성경은 여성을 남성보다 열등한 존재로도 종종 얘기하곤 합니다.
전도서 기자는 남녀를 비교하면서
"해답을 찾는 남자는 천에 하나 있을까 말까 하지만
여자들 가운데는 하나도 없다"(전 7:28)고 말합니다.
레위기 27장 1절 이하를 보면,
남자와 여자를 서약예물의 값으로 환산할 때
똑같이 공평하게 정해주지 않고,
여자는 남자의 거의 절반 값으로 정해놓고 있습니다.
이 역시 생물학적 차이를 성차별로서 정당화하고 있는 사례에 해당합니다.
민수기 12장 1~15절을 보면,
아론과 미리암은 똑같이 모세를 비판했음에도
여자인 미리암만 문둥병에 걸리는 것으로 나옵니다.
민수기 5장 11~13절을 보면,
질투문제를 처리하는데 있어서 고발당한 여자에게만 가혹하고
여자가 질투한 것이 아닌 경우에도 고발한 남자는 처벌받지 않습니다.
구약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신약에 이르러서도 가부장적 한계는 여전합니다.
이미 잘 알다시피 성서 기자조차 여성은 사람 수에 넣질 않고 있습니다(막 6:44).
유명한 사도 바울의 언급에도 여성에 대한 차별적인 구절이 있습니다.
그는 말하길 "남자의 머리는 그리스도요, 아내의 머리는 남자"(고전 11:3)라고 말합니다.
적어도 이것은 남녀의 관계가 수직적 차원도 있음을 의미한다고 하겠습니다.
이 수직적 복종관계는 에베소서 5장 21절 이하에서도 또 얘기되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바울은
남자는 머리에 무엇을 쓰지 말라고 말하지만 여성에게는 머리에 무엇을 쓰라고 말합니다.
(고전 11:4~6).
그 잔재인지 오늘날 가톨릭은 여성에게 너울을 쓰고서 예배를 드립니다.
공평한 처사라고 하기엔 이해하기 힘듭니다.
이외에도 바울은 여성에 대한 권리 제한을 몇 가지 더 말하고 있는데,
여성은 교회에서는 말할 권리가 없고 남자에게 복종해야 하며,
알고 싶은 게 있으면 집에 가서 남편한테 물어보라고 말합니다(고전 14:34~36).
여자는 남을 가르치거나 남자를 지배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며,
침묵을 지켜야 한다(딤전 2:11~12)는 것입니다.
적어도 사도 바울에게서는
"남자는 하나님의 영광이지만 여자는 남자의 영광"(고전 11:7)으로 여겨지고 있습니다.
물론 바울을 좋게 해석할 경우
윗 구절도 당시 고린도교회의 상황과 관련하여
바울은 본래 평등관계를 말한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특히 저 유명한 갈라디아서 3장 28절의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그리스도 안에서는 아무런 차별이 없습니다"는
이 구절은 바울을 매우 돋보이게 하는 레퍼토리로 종종 얘기됩니다.
성경에 쓰인 여성 차별은 이뿐만이 아닙니다.
계약의 증표인 할례는 남자에게만 해당합니다.
또한 남자만 절기를 지키도록 규정되고 있다(신 16:16).
성경 어디에도 여자 제사장 기사는 찾아봐도 없습니다.
그 뿐인가. 예수의 열 두 제자들 가운데 여성은 하나도 없습니다.
사실상 예수의 공생애를 자세히 살펴보면,
예수는 언제나 여성과 가까이 있었고(눅 8:1~3, 막 15:41),
여성은 주의 십자가 현장에까지 끝까지 남아 있었을 뿐더러(막 15:40~41),
사실상 부활의 첫 증인이기도 합니다(막 16:1~8, 요 20:18).
예수는 힘없는 약자인 여성을 남자들보다 더 사랑했지 않을까 하는 것입니다.
그 당시 유대사회는 여성과 6세 미만의 어린이들과 얘기하는 것을
매우 수치스럽게 생각했을 정도인데,
그런 면에서 예수의 모습들(막10:1~12, 마 18:1~5)은
당시로선 매우 신선한 혁명이었을 뿐더러
당연히 많은 유대 랍비들을 매우 혼란스럽고 불편스럽게 만들었을 것으로 보입니다.
교부신학자 제롬은
여성이 성을 포기하고 처녀나 과부로 지내면서 금욕생활을 하면 찬양을 받게 된다고 했습니다.
당시로선 육체적인 세계가 영적인 새로운 창조로 변형될 것으로 여겨서
동정녀는 사람뿐만 아니라 우주를 깨끗한 하늘나라로 만드는 지름길로 보았습니다.
이런 전통은 마리아 숭배로 발전되어
A.D. 649년에는 '마리아 영구 처녀성'을 선언하게 됩니다.
우리가 스콜라 시대의 위대한 신학자로 알고 있는 어거스틴은
다음과 같이 얘기한 바 있는데,
남성만이 온전히 하나님의 형상이며
여성은 남편에게 종속되는 것이 자연의 질서입니다.
여성의 본질은 육이고 남성의 본질은 정신이기에
자연의 질서 속에서 육체가 정신에게 복종하듯
여성이 남성에게 복종하는 것이 당연한 것이라고 보았습니다.
또 다른 중세의 대표적 신학자인 토마스 아퀴나스는,
모든 수태는 남성만을 생산하도록 되어있는데
어떤 우연에 의해 남성 형상이 파괴되어 여성을 생산하게 되었고,
불완전한 여성은 본성전체가 열등하며
여성은 단지 번식을 위한 필요악으로서의 가치만 있을 뿐이라고 얘기했습니다.
그는 어이없게도 남성은 똑똑하리만큼 지적이지만
여성은 육체적이고 성적이며,
무덤에서 마리아가 예수의 부활을 알아보지 못한 것은
이해력이 둔해서라고 보았습니다.
하지만 아마도 오늘날 이런 주장에 대해 동의할 사람은 아무도 없으리라 봅니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종교개혁 시대에 이르면,
중세에 비해 여성 혐오나 결혼 기피는 조금 완화되지만
여기에도 여전히 성차별적인 성향은 이어져 오고 있습니다.
루터는 하나님으로부터 부여받은 여성의 소명을 가사노동과 결부시켰습니다.
이는 저 유명한「기독교 강요」를 썼던 칼빈도 마찬가지인데,
게다가 그는 부인에 대한 남편의 법적인 권리를 육체적인 권리에까지 허용하였던 입장이었습니다.
현대신학에 이르러서도 유명한 신학자 칼 바르트는
「교회교의학」에서 그리스도 안에서 주종관계는 구조적이며,
여자는 남자에게 순종함으로써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고,
여자의 신앙적 응답은 자기의 합당한 위치를 지키고 남자의 선도를 따르는 데 있다고 얘기합니다.
그는 말하기를,
여자가 진정으로 해방되기 위해서는 반항하지 말아야 하며,
그러한 여자의 반항은 하나님의 질서에 대해 모독하는 것이라고 보았습니다.
본회퍼라는 신학자 역시 그의「옥중서간」에서 여자는 그의 남편에게 종속되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물론 기독교 역사상의 유명한 신학자들이 이러한 성차별적 과오를 범했다고 해서
그들의 신학적 업적 역시 폄하되어야 할 것은 아니지만,
종종 이들에 대한 신뢰나 권위가 지나치게 과잉하여
저들의 성차별에 대한 과오마저 묵인되거나 암묵적으로 간과되어서도 안 됩니다.
다시 말해 알게 모르게 저질러 온 기독교 역사의 성차별적 발언들이
기존 기독교의 가부장적 체제를 더욱 고착화시키는 치명성을 인지한다면
이 또한 결코 방관할 수만은 없기 때문입니다.
한국 사회의 가부장적 질서와 결합되어
교회 및 사회의 여성 활동에 대해 부정적이고 제한적인 인식을 가지고 있는 것이
오늘날 우리 사회의 현실입니다.
실제로 기업체 내지는 모든 직장에서 여성의 활동이 두드러지고
한국 교회 부흥의 주역이 여성들임에도 불구하고
상호이해와 협조에 대한 바른 인식의 부족으로 인하여
남존여비의 전통을 굳혀 가고 있는 것입니다.
더군다나 이러한 현상은 남아를 선호하는 등
잘못된 인식에 사로잡혀 있는 많은 여성들에 의하여 더욱 심화되고 있습니다.
2. 전통적 견해
1) 주장
남녀간의 관계에 있어서 전통적인 견해는
남성의 우월함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보통 '남성우월주의' 라고 불립니다.
이들의 주장은 여자는 남자보다 열등하며 단지 남자를 보조하는 역할에 그친다고 주장합니다.
동양의 가부장적 사회제도는 여성을 천시하는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서구에 있어서 이러한 사고는 아이러니컬하게도 성경에 그 근거를 두고 있으며,
교회의 강력한 지지를 받고 있습니다.
교회에서는 "여자의 머리는 남자요"(고전11:3),
"여자는 교회에서 잠잠하라"(고전14:34)는 바울의 구절들이 언급되면서
남성에 대한 복종이 바람직한 여성의 자세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여성의 창조는 남성의 신체 일부를 제공받아 된 것이므로
여성은 남성에게 종속된다는 것입니다.
창조의 목적에 있어서도 여성은 남성의 '돕는 자'로서,
나아가 여성은 인류 타락의 원인 제공자로서
책임과 연약함을 가지고 있음을 분명하게 보여 주었습니다.
2) 문제점
위와 같은 주장은 과연 성경적으로 타당성을 가지는가?
여성의 위치에 대한 바울의 언급들은 원리적인 말씀으로 보아야 하는가?
오히려 그것은 당시 교회의 현실적인 상황에 대한 표현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는 주장이 있습니다.
십자가 아래서 모든 인류는 동등한 것이다(갈3:28).
죄로 인하여 남자는 여자를 다스리고
여자는 언제나 다스림의 위치를 빼앗으려고 하는 대립의 관계로 나아가게 되었지만(창3:16)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모든 갈등과 대립을 회복하고 참다운 창조질서를 확립하였습니다.
단지 초대교회의 정리되지 아니한 모습들에서
노예의 문제, 이방인들의 문제와 더불어
여성의 지위 또한 전통적인 관점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복음이 점차 확산되고 시간이 지나면서
여성의 역할이 교회 내에서 두드러지고 권리가 회복되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3. 여성해방론자들의 견해
1) 주장
남성우월론의 계속적인 득세에 반발하고 일어난 것이 소위 '여성해방 운동'입니다.
이들은 이제껏 남성의 지배 아래서 억압받고 지내왔던 여성이 거기서 탈피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그들은 더 나아가 남성과 여성은 동등하며 결코 여성이 열등하지 않다고 주장합니다.
이들의 사상은 신학에도 영향을 미쳐 '여성(해방)신학'을 형성했습니다.
이들 교회 안의 진보적인 집단은 남녀간의 관계에 있어서
여성은 남자와 동등하며 때로 우월하기도 하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이들 주장의 근거가 되는 성경은 갈3:28과 고전11:11,12입니다.
즉 여자와 남자는 원래 동등했으며,
어떤 면에서 보면 남자가 여자에게서 나왔기 때문에 여자가 더 위대하다는 것입니다.
2) 문제점
이들의 여성해방론은 다분히 전통적인 남성우월관에 대한 반작용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그런데 이들은 남녀평등의 주장에서 더 나아가
여성우월 내지는 남녀간의 성 구별을 모호하게 하는 데까지 나아갑니다.
즉 남성이 하는 모든 사회·경제적 활동을 여성이 동등하게 수행함으로써
남성의 영역주장을 무색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참된 여성의 해방이
곧 여성의 고유한 역할을 포기함으로써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점은 분명히 지적되어야 합니다.
4. 성경의 가르침
1) 고유한 역할
성경에는 많은 여성들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들은 그들에게 맡겨진 일들을 때로 남성들보다 더 지혜롭고 훌륭하게 감당하기도 하였습니다.
예를 들어 여자들은 잠잠하라고 가르쳤던 바울도
그의 초기 선교 사역에 여성들이 매우 큰 역할을 감당하고 있으며,
특히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는 부부로서 바울의 신실한 동역자가 되었습니다(롬16:3).
브리스길라는 여자의 몸으로 남자를 가르치는 일을 하기도 하였습니다(행18:26).
이것은 바울의 가르침이
현재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것과는 다른 의미를 가졌을 것임을 시사합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강하고 선이 굵은 남성들을 통하여 역사하시기도 하지만
섬세하고 부드러운 여성들을 통해서도 큰 일을 이루십니다.
2) 창조의 질서
성경은 남녀 동등(同等)을 가르칩니다.
이것은 평등(平等)과는 다른 개념입니다.
평등이란 말 속에는 '똑같다'는 의미가 강하게 내포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남녀를 똑같게 만들지 않으셨습니다.
남자와 여자는 결코 똑같을 수 없습니다.
기능과 구조뿐만 아니라 그 특성도 다릅니다.
그러나 남자와 여자는 한 인간으로 동등하며 그 누가 더 우월하고 열등한 것은 없습니다.
또한 성경은 남녀간의 질서가 있음을 분명하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인간의 창조 순서에서 남성이 여성보다 우선합니다.
그러나 이것이 남성의 우월함과 여성의 열등함을 가리키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신체구조와 정서에 맞는 기능을 상호간에 나타냄으로 사회의 균형을 이루어 냅니다.
그러나 교회의 머리인 그리스도가 교회를 사랑하고,
교회는 그리스도에게 순종하듯이,
가정의 머리는 남편이므로 아내를 사랑하고
아내는 남편을 섬김으로 창조시 부여된 가정의 질서를 이룰 수 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가정과 사회의 질서유지를 위한 위계를 허락하셨고,
이것이 성경의 원리입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무시될 수 없으며,
또 그것이 '성차별'이라는 잘못된 방향으로 오도되어서도 안 됩니다.
남자와 여자는 모두다 하나님에 의해서 지음받은 '하나님의 형상보유'입니다.
성경은 이 둘을 모두 '사람'이라고 부르며 그들 사이에 차별을 두지 않으셨습니다.
성경이 성차별을 가르친다는 기존의 주장은 잘못된 성경해석에 근거한 것입니다.
성경은 남녀의 '동등'을 가르치며 동시에 남녀 사이의 '질서'를 가르칩니다.
우리는 이 2가지 원리(동등과 질서)를 균형있게 잡음으로
'남존여비'나 '여성우월' 등의 극단적인 사상에 빠지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남녀는 서로 협력하여 하나님이 허락하신 사역을 조화롭게 감당해야 하는 것입니다.
3) 성서에서 남녀 관계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실 때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으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셨고,
그들이 창조되던 날에 그들에게 복을 주시고
그들의 이름을 사람이라 일컬으셨더라"(창5:1,2).
그러므로 태초에 인간의 종족이 두 부분,
즉 두 개의 성으로 갈라진 상태를 의미하는 라틴어 secare에서 따온 말로
그 뜻은 '자르다', '나누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인간 관계에서 남성 또는 여성으로 각각 존재한다는 뜻으로
여성종속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특별히 신약성서에서 남편에 대한 아내의 역할과 의무에 관한 구절,
즉 고전11:11,12에 나타난 바울의 설명에서 결혼은
남녀의 동등한 위치에서의 하나의 결합임을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또한 갈3:28에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자나 남자나 여자나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고 했습니다.
따라서 기독교 신앙은 남녀의 성을 서로 갈라놓고 보거나
두 개의 성에서 어느 하나의 성이 다른 것보다 우월하다든가 또는 열등하다고 보지 않았습니다.
오직 모든 인간(남성과 여성)은 하나님 앞에서 다같이 부족한 존재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동등하게 받는다는 예수의 메시지가
여성들에게는 더욱 기쁜 소식으로 생각되었습니다.
4) 남녀의 창조의 동일성
하나님은 창2:21,22에서 "아담을 깊이 잠들게 하고
그의 갈빗대 하나를 취하여 그것으로 여자를 만들었더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에 많은 사람들은 여자가 남자의 옆구리에서 취해졌으니
남자와 동등한 존재가 될 수 없으며
남자의 심장 부분에서 취하였으니 남자의 사랑을 받는 종속적인 존재로 보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나 보다 어원적인 뜻으로 본다면 갈빗대(rib)라는 말은 생명(life)이라는 말과 관계됩니다.
왜냐하면 아담과 하와는 똑같은 생명을 나누었기 때문입니다.
즉 그들은 각기 다른 두 쪽이 아니고 한 몸(one flesh)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하와를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로 지으셨습니다(창2:18,20),
이 말을 번역한 영어성경 KJV는 여성의 역할에 대한 많은 생각들이 함축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ezer란 도움(help) 또는 돕는 자(helper)라는 뜻의 명사로서
이 말은 구약에서 21번 나온다고 합니다.
16번에 걸쳐서 종속적인 위치에서가 아닌 초능력자인 위치에서 돕는자로 나타난다고 합니다.
예를 들어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꼬 나의 도움이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로다"
(시121:1,2)에서 잘 나타나 있습니다.
그러므로 여자는 모든 면에서 남자와 동등하게 창조되었고,
남자와 같은 모든 존재의 위치에서 서로 관계를 맺게 됩니다.
아담이 잠에서 깨어났을 때 그는 하와를 자신의 종속적인 사람으로 보지 않고
자기와 똑같은 존재로 보았습니다.
5) 예수와 여자
예수는 본래 남성으로서가 아니라 한 인간으로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는 여성들을 인간으로 대우하셨습니다.
또 감성적이거나 연약함으로서 아니라,
그들이 회개하고 사랑하도록 한 인격으로서 대우하셨습니다.
특히 예수는 혼인잔치, 잃어버린 동전, 맷돌을 돌리는 것, 빵에 누룩을 넣는 것 등
모두 여성의 역할을 통하여 그의 가르침에 사용하였습니다.
여성이나 여성적인 것에 대하여 조롱하거나 비난한 적은 결코 없었습니다.
또한 예수는 여자들에 대해서 말씀만 하신 것이 아니라 공공연히 그들과 접촉하시기까지 하셨습니다.
이것은 유대사회에서 보기 힘든 것으로,
유대사회에서는 여자들과 접촉을 꺼려하여 거스름 돈을 받을 때도
여자로부터 손으로 받는 것을 허용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반면 예수께서는 18년 동안 혈루병 앓던 여인이 자신의 옷자락을 만짐으로 고침을 받을 때
이를 책망하지 않으셨으며,
마리아가 예수에게 향유를 붓고 그의 발에 입맞추는 것을 허락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박히시던 때 제자들이 예수를 부인하고 다 도망하였지만
여인들은 예수를 끝까지 따랐으며,
안식 후 첫날 예수의 무덤에 맨 처음 간 사람도 여인들이었습니다.
이 모든 것들이 우연한 사건이라고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하나님이 배려한 행위였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예수의 지상 생활은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여성에게 있어 제일 친한 친구로 등장했습니다.
6) 남녀의 결혼
결혼은 남녀의 성차별이 아닌 존경, 의무, 권위, 순종 및 역할 차이를 말합니다.
오늘날에는
동료의식, 애정, 자기 실현, 성장, 남녀 동등권을 강조하는 결혼관을 중요시하고 있습니다.
이런 결혼에서는
서로를 각자의 역할이나 이성간으로 보기보다는 하나의 인격체로서 인정합니다.
각자는 필요와 능력을 특별한 개인적 자산을 가지고 결혼이라는 구성체에 힘을 솟습니다.
이런 것들은 가정 생활 양식에 창조성, 융통성, 문제 해결 능력의 여유를 주며,
협력의 아름다움을 제공해 줍니다.
이 결혼의 공동체 안에
각자 특유한 재질과 관심을 개발해 나갈 수 있는 최대한의 여유를 가지고 있습니다.
따라서 결혼은 남녀의 동등을 의미하는 협력 공동체입니다.
5. 한국교계의 현실
아직까지도 여성안수를 반대하고 이 문제를 첨예한 것으로 여기는 교단도 여전히 많습니다.
소위 기저귀 찬 여자들은 강대상에 올라가선 안 된다고 주장하는 자들의 발언들은
그들 보수 진영에서는 매우 자연스러운 얘기들로 보입니다.
즉, 이들이 여성안수를 반대하는 그 근거 역시 성경에 기인하고 있다는 점을
결코 간과해선 안 됩니다.
여성안수제도에 대한 정착은 이전에 비하면 꾸준히 나아지고 있긴 하지만,
여성목사 안수가 가능한 진보 교단조차도
실제적인 목회현장에선 여성 목회자는 불러주질 않고 있는 실정이라
여전히 심각한 문제입니다.
* 여성목사의 성경적 근거
제사장은 족장 제사장, 레위지파 제사장, 나실인 제사장, 만인 제사장(평신도)으로 나누어 지며
원래 제사장은 30세에서 50세 사이에서 뽑았는데 사람이 부족하여
연령을 25세, 20세로 낮추어도 인원이 부족하여 나실인 가운데서 제사장을 뽑기에 이르렀습니다.
이 나실인 제사장이 현재의 목사입니다.
나실인은 남자도 여자도 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기독교대한감리회는 국내에서는 처음으로 1931년에 여성목사를 인정했으며
한국기독교장로회(기장)는 1955년에 여성장로 제도를 채택한 후
1974년에 여성목사 제도를 받아들였습니다.
그 외에도 많은 교단들이 여성목사 제도를 받아들였습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실제로 여자 제사장이 없었다는 근거로
예장합동, 기침, 예장고신, 예장합신, 예장대신은 아직도 인정하지 않고 있는 실정입니다.
또한 여성을 남성보다 못한 존재로 여기는 설교는
우리 주변에서 어렵지 않게 접할 수 있습니다.
'여자는 남자의 갈빗대로 만들어졌습니다',
'여자는 교회에서 잠잠하라',
'여자는 남자에게 복종해야 한다' 등의 말들이
성경을 근거로 설득력 있게 선포됩니다.
이러한 주장들에 대해 한국염 목사(청암교회)는
성경을 일방적이고 편협하게 해석한 신학적 무지로 보고 있습니다.
한 목사는 갈빗대는 동등성과 연대성을 상징하는 것으로 읽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또 고린도전서 14장 34절에서
여성에게 잠잠하라고 말한 것만 인용해 이를 여성 억압의 근거로 사용하는데,
바울은 바로 39절에서
여성들이 방언하고 예언하는 것을 막지 말라는 말로 끝내고 있다고 반박합니다.
한 목사는 '성경을 보면 아내는 남편에게 순종하라고 하면서
남편도 아내를 사랑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교회에서 강조되는 것은 아내의 순종이다'고 말했습니다.
사실 많은 목회자들이 강단에서 노골적으로 여성을 비하하는 설교를 하고 있습니다.
이광복 목사(목양교회)는 '하와 때문에 아담이 범죄 했습니다.
이세벨 때문에 아합왕이 범죄 했습니다.
여자 때문에 다윗도 범죄 했습니다'고 설교했습니다.
여자 때문에 남자가 죄를 지었다는 것입니다.
사석에서나 할 법한 천박한 말들이 설교에서 하나님의 말씀으로 둔갑합니다.
곽선희 목사(소망교회)는 여성을 '부드럽지만 맹한 데가 있다'고 표현했고,
고훈 목사(안산제일교회)역시
'여자들이 손톱을 기르고 색깔을 칠하는 것을 보면
호랑이 손톱 같고, 마귀할멈 손톱 같다'고 말했습니다.
그냥 웃어넘기기 어려운 이런 말들은
방송을 타고 설교집으로 출판되기도 하면서
교회 담을 넘어 일반인들에게도 전달됩니다.
방송설교를 모니터링하고 있는 김혜원 권사(새문안교회)는
'방송설교의 수준이 전반적으로 낮을 뿐 아니라
여성을 비하하고 반공논리, 기복신앙을 강요하는 경우도 있다'고 평가하면서
'선교를 위한 도구로 사용되는 방송설교가
오히려 청취자들이 교회와 기독교인들을 멀리하는 이유가 될 것 같아
얼굴이 화끈거릴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고 토로했습니다.
여성을 차별하는 일은 설교로만 머물지 않고 교회 이곳저곳에 깊게 퍼져있습니다.
가장 진보적인 교단으로 손꼽히는 한국기독교장로회(기장)도
여성에 대해서는 상당한 차별이 존재합니다.
기장은 1974년에 여성안수 제도를 통과시켰지만
아직도 여성 목사는 전체의 10%를 넘지 못합니다.
여성 신도가 70%를 넘는 것에 비하면 상당히 낮은 수치입니다.
장로의 경우는 더 심합니다.
여성 장로는 전체의 1%에도 미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집사는 여성이 배나 많습니다.
결국 진보와 보수를 막론하고
대부분 교회에서 극소수의 여성만이 정책을 결의하는 과정에 참여할 뿐,
대다수 여성들은 주방일과 청소같은 궂은 일을 도맡아 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이뿐 아니라 탁아 등 가사노동은 교회에서도 당연히 여성의 몫으로 인식되고 있습니다.
행사 때도 준비는 여성들이 하지만 정작 주인은 남성들 차지입니다.
여성들은 그저 안내나 하다가 '어른'들에게 꽃을 달아주는 것에 만족해야 합니다.
이러한 불균형의 절정이 바로 교단총회입니다.
여성총대는 아예 없거나 있어도 5%를 넘지 못합니다.
그러나 또 다른 여성들은 한복차림으로 예배당 밖에서 안내를 하다가
새로 선출되는 임원들에게 꽃다발을 전달하기 위해서 겨우 안으로 들어올 뿐입니다.
여신도들은 자신들이 하고 있는 일에 대해 불평등하다고 느끼고 있으며
자유롭게 선택할 경우,
대다수가 그 일을 하고 싶지 않다고 답했습니다.
2001년 발표된 '교회여성의 여성·사회의식 심층조사 보고'에 따르면,
여성 응답자의 45%가 주방일, 청소, 안내, 남자 목회자나 장로의 시중을 드는 일이
하기 싫다고 대답했습니다.
또 다른 조사에서는
현재 교회에서 하고 있는 일로 청소와 음식 만들기를 선택한 여성이 51%였지만,
하고 싶은 일로 이 항목을 꼽은 것은 불과 0.3%에 불과했습니다.
결국 여성들은 교회 구조에서 불평등을 경험하고 설교를 들으면서
다시 그런 불평등 구조를 정당화하고
자신들이 열등한 존재임을 가르치는 신앙을 주입 받고 있는 실정입니다.
이인경 교수(연세대)는
'여성의 희생과 교회의 폭력에 대한 여성신학적 분석'이라는 글에서
'현실을 변화시키기 위해서는 의식과 제도가 같이 변해야 한다'고 지적했습니다.
이 교수는 '제도개혁의 측면에서 30% 여성 할당제를 적극적으로 시행하고,
여성의 희생을 신학적으로 정당화하는 것을 폭력으로 인식하는 교육이 필요하다'고 주장했습니다.
이수인 교수(한신대)도
'교회 내 남녀불평등 현상이 교회에 미치는 영향'이라는 글에서,
교회 내에서 남녀평등을 고양하기 위해
△ 교회의 직제 개선
△ 여성 평신도들의 자각
△ 목회자들의 성서해석 관점 변화가 필요하다고 주장했습니다.
이러한 변화를 이루지 못할 경우,
교회의 권위주의적인 규범과 관행에 반감을 갖고 있는 젊은 층이
교회를 떠나게 될 것이라고 이 교수는 경고했습니다.
2012.8.28
이우길 집사 정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