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에서 드린 기도
고향에 갑니다.
아버지와 누나들이 함께 살았던 그리운 고향으로 갑니다.
잔디와 과일 묘목을 가지고 아버지와 아내가 누워있는 고향 뒷산으로 갑니다.
아들의 휴일날에 아들은 친구를 만나러 해운대로 가고
나는 코란도를 몰고 그동안 생각해 두었던 것을 하려고 고향으로 갑니다.
해마다 잡초가 무성한 묘지로 마음 아파했고 두 분에 대한 미안함 때문입니다.
바로 밑에 있는 묘지와 비교되니 속상하기까지 했습니다.
전에 심어 둔 매실과 자두나무는 많이 죽었으며
품종을 속여 판 묘목상이 밉고 베어 버릴 수도 없고 해서 그냥 두었습니다.
또 매실 3그루, 자두 4그루, 대봉(감) 2그루, 오미자 3그루를
사이 사이 심어 죽은 것을 대치하려 합니다.
지금은 막대기 하나에 불과하지만
자라나 가지가 벌어지고 꽃이 피고 많은 열매가 열릴 것을 소망하며 기쁨으로 심습니다.
우리의 아들들과 손자녀들이 아버지와 할아버지가 살아 생전에 심은 나무라 생각하며
그 열매로 작은 기쁨을 가졌으면 합니다.
2011년 4월 9일(토) 아침은 또 그리움으로 출렁거리기 시작합니다.
'경주'를 벗어나 '안강'을 지나 '기계천'을 지날 때 눈물이 났습니다.
우리 첫째 명철이가 결혼하여 처음으로 할아버지 묘소에 성묘하러 갈 때
'기계천'에 핀 코스모스가 너무 아름다워서 차를 세우고
코스모스를 잘라 귀에 끼우고 웃으며 사진을 찍던 생각이 났습니다.
아내와 함께 찍은 사진 중에서 가장 다정하게 찍은 사진이 그 때 찍은 사진입니다.
이 길은 아내와 함께 수없이 지나 다닌 길이요,
운전 중 심심하고 또 졸린다고
'황수관 박사'의 신앙간증 테이프를 수없이 듣고 다니던 길입니다.
이제는 나 혼자 다녀야 하는 길이기에 더욱 슬픕니다.
더 이상 울지 않으려 했는데 이 길을 지나면 울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손바닥으로 닥아 내기엔 너무 많은 눈물이라 소매로 닥아 냅니다.
'죽장'을 지나 산허리를 감돌아 갑니다.
이 길은 신혼초에 다닐 때는 도로가 너무 좁아 저쪽에서 차가 오는 것이 없을 때
재빨리 진입하여 먼지 날리며 달리던 비포장 길이었습니다.
'한티재'를 넘습니다.
2009년 12월 31일에 갑자기 떠난 아내를 산에 누이고
3일만에 묘를 살펴 보려고 가던 날
도중에 눈이 너무 많이 내려 자동차가 미끄려져서 그냥 돌아 온 길입니다.
묘가 있는 뒷산으로 가는 도로옆에서
자동차 예인선으로 '짐바'를 만들어 잔디 자루를 2개씩 옮겼습니다.
흐르는 눈물을 주체할 수가 없었습니다.
두 분 묘 앞에서 울며 기도 드렸습니다.
"주님, 왔습니다.
긍휼을 베풀어 주옵소서.
불쌍히 여겨 주옵소서.
함께 하여 주옵소서
위로가 되어 주옵소서."
묘소 경사면에 작은 구덩이를 파고
흙을 부수어서 고르며 정성스럽게 잔디를 심었습니다.
얼마 후에는 이 경사면이 잔디로 아름답게 되리라 믿고 심었습니다.
가져 온 물도 바닥나고 입술도 마르고 또 목이 찬 기운에 부어 올랐습니다.
봉분의 잡초를 호미로 캐내고 난 뒤에 늦은 점심 식사를 했습니다.
'문거재'의 셀프 식당에서 했습니다.
먹고 싶은 마음은 없었는데, 일을 하기 위한 힘을 얻기 위해
닭개장과 미나리 무침과 상추쌈으로 마지못해 먹었습니다.
숭늉을 먹고 싶었는데 그날 따라 없었습니다.
식사로 힘을 얻어 부지런히 심었으나 결국 일을 끝내지 못했습니다.
남은 잔디 자루에 삽과 보릿집 모자를 넣어 두고 왔습니다.
주일은 예배드리고 월요일에 갈 것을 생각하며 차에 오르니 오후 6시였습니다.
월요일에 떠나려 하니 아침에 비가 옵니다.
일본의 지진과 쓰나미로 인한 원전사고로 내리는 방사선 비를 피해
결국 화요일로 미루었습니다.
잔디 4평을 더 구입하고 먹을 물도 충분히 준비하고 자동차의 연료도 채웠습니다.
카메라와 비디오 촬영 준비도 했습니다.
지훈이를 회사에 실어다 주고 8시에 출발했습니다.
이 길은 결혼 후 고향에 계신 아버지에게로 가던 길이요,
처가의 장모를 뵙기 위해 다니던 길입니다.
현서고등학교 5년과 부계중학교 2년,
모두 7년을 주말마다 오고 가고 하던 길입니다.
아버지를 산에 누이고 아내와 아들들과 함께 다니던 길입니다.
이제는 아내마져 누이고 눈물로 다니는 길이 되었습니다.
언젠가 내가 아버지와 아내 사이에 누으면 아들들이 다녀야 할 길입니다.
도착 후 잔디를 정성스럽게 심었습니다.
덩치 큰 개나리꽃을 캐어 분주하여 묘소 위 둘레에 나누어 심었고
두 분의 봉분 위의 잡풀을 다시 한번 뽑아 내었습니다.
묘지 주변의 잡목을 베어 눕히고 도랑을 치고 심어놓은 묘목 주변을 정리했습니다.
때늦은 점심 식사를 했는데 된장국과 콩나물 무침과 상추쌈이 좋았습니다.
이번에는 숭늉이 마련되어 두 번이나 마셨습니다.
작업 도구를 차에 실어 두고 카메라와 비디오 카메라를 들고 다시 산에 올랐습니다.
산 아래에 펼쳐진 광경을 촬영했습니다.
내려다 보이는 광경은 내 어린 시절에는 어둡고 칙칙했는데
지금은 밝고 색깔있는 건물이 햇빛에 반사되어 밝게 빛났습니다.
과수원도 키 작은 나무로 잘 정리되어 있고 제법 큰 건물도 보입니다.
이곳 고향에서
어린시절 보리밥과 좁쌀밥 먹은 생각이 납니다.
주일날 교회 갔다와서 누나가 밥 담는 통에 담아 아랫목 이불 속에 넣어 둔 밥을
뒤안간 땅에 묻어 둔 독에서 김치를 꺼내어
손으로 찢어서 밥위에 걸쳐 먹던 생각이 납니다.
좁쌀의 구수한 냄새가 생각납니다.
또 춘궁기에는 쑥떡을 먹고 찢어진 경우도 있고
소나무 껍질 속살로 만든 떡(송구떡)도 먹었습니다.
그것은 가난이 아니고 일상이었습니다.
우리만 그런 것이 아니고 이웃도 그랬습니다.
집으로 가기 전에 소리내어 울면서 기도를 드렸습니다.
"주님, 저를 이곳에서 태어나게 하시고
두 누나를 엄마 삼아 어린 시절을 보내게 하시고
아버지의 믿음을 따라 하나님 섬기며 살게 하신 것 감사합니다.
아버지를 따라 새벽기도에 참석하며
신앙의 기초를 쌓게 하신 것 감사합니다.
이제 세월이 흘러 두 분을 산에 누이고
이렇게 슬퍼하면서 눈물을 흘립니다.
주님, 긍휼을 베풀어 주옵소서.
이제는 눈물을 그치고 소망가운데 살게 하옵소서.
주님, '그날'이 오면...
'그날'은 아무도 모른다고 하셨습니다만
우리 믿는 자들을 위해 징조를 알려 주셨지요?
나름대로 성경말씀을 따라 계산해보니 아들들의 나이가 70세 쯤 될 때입니다.
천사장의 나팔 소리와 주님의 호령으로 '그날'이 임하리니
주안에서 죽은 자가 먼저 일어나고 그 다음에 산 자도 변화되어
구름 위로 이끌리어 주를 만나는 날이 정녕 있으리니 그 때가 바로 '그날'이라고 하셨지요!
세 아들 주셨사오니 금보다 귀한 믿음 잃지 않고
주님을 주님으로 잘 섬기게 하옵소서.
먼 훗날 엉뚱한 곳에서 바라보며 우는 아들이 없게 하소서"
하면서 소리내어 기도를 드렸습니다
며느리 지영이와 손녀 혜원이도 천국백성이오니
하나님 잘 섬겨 어머니와 할머니를 다시 만나게 해달라고 기도 드렸습니다.
아직 가정을 이루지 못한 두 아들도
믿음 좋은 아내를 맞이하고 그 자녀들도 하나님 잘 섬겨
하늘나라 천국에서 다시 만나게 해달라고 기도 드렸습니다.
앞으로 세 아들의 아들 딸도 많이 태어날텐데
그들도 하나님 잘 섬기는 천국 백성되게 해달라고 기도 드렸습니다.
이 세상의 많은 일 중에서
가장 귀하고 중요한 일이 천국백성이 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소리내어 울면서 기도 드렸습니다.
기도를 마치니 오후 4시였습니다.
다시 만날 어머니와 할아버지
2011. 4. 13(수)
이우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