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촌 형님의 생각
지난 2009년 8월 8일(토)에 사촌형님이 돌아가셨다.
82세의 나이로 돌아 가셨다. 청송도평교회의 집사님이셨고
보행이 어려워 최근 몇 년 동안은 교회에 출석하시지 못하셨다.
집에서 TV 방송 예배에 참석하시고 늘 기도하시며 하나님을 찬양하셨다.
자주 찾아 뵈옵지 못하고 겨우 명절에만 찾아 뵈옵고 문안드린 것이 죄스러웠다.
옛날 담 하나를 사이에 두고 살 때가 생각난다.
형님께서는 인정이 많으셨다. 특히 나에 대한 애정이 크셨다.
아버지께서 조카를 위해 많은 기도를 하셨다.
덕분으로 결국 조카도 하나님을 믿게 되었다.
소천했다는 통보를 받고 즉시 청송의료원에 가서 4일장의 장례를 도와 드렸다.
그 동안 한번 찾아뵈옵고 하나님 계심을 재확인(?) 시켜드리고
살아 계실 때의 모습을 영상으로 남겨
자손들이 볼 수 있도록 해야겠다 고 생각했는데
그만 돌아가시게 되어 정말 후회스러웠다.
무슨 일이든지 생각날 때 미루지 말고 실천해야 한다는 것을 실감했다.
이번 장례에 두 가지 감동적인 일이 있었다.
하나는 형님의 아들인 '상일' 조카가 식사 중에 기도드리는 모습에
마음이 아려오고 너무나도 기뻤다.
전에는 하나님 얘기 나오면 웃기만 하던 그가 기도드리는 모습에 감격하여
내가 목이 메여 눈물을 흘리며 친척들 앞에서 그를 칭찬했다.
명예권사인 형수님과 조카 아내의 믿음 덕분이라 여겨진다.
또 하나는 장례식에 참석한 6촌 형님의 생각에 감동했다.
6촌 형님은 대구 모 교회의 은퇴 장로님이시고 그의 두 동생은 목사님이시다.
한 동생은 네델란드에 이민을 가서 그 곳 교민들을 위해 말씀을 전하고
또 한분은 의정부에 있는 조그만 농촌교회에서 목회하고 있다.
그런데 네델란드에 계시는 목사형님이 자기 형님 내외분을 초청하셨다.
목사형님 내외분이 한국에 나오신 김에
같이 네델란드로 데리고 가서 관광시킨 후에
한국에 오는 비행기를 태워주면 되는 것이었다.
그런데 장로이신 형님은 그 초청을 거절하셨다.
이유는 동생에게 지우는 재정적 부담 때문이 아니고
형님의 아버지께서는 포항 죽장면에서 태어나
면지역을 벗어나 다른 곳에 한번도 가시지 않고
평생을 자식들을 위해 농사일을 하시다가 돌아 가셨는데
내가 무슨 염치로 관광 그것도 이역만리 외국으로 다녀와야 한단 말인가.
도저히 양심상 그럴 수 없다하여
거절하고 형수만 관광보냈다고 하는 말을 듣고 감동받았다.
보통 사람은 웬일이야! 하고 얼른 갔을 텐데, 형님은 거절하셨다.
구시대적 발상이며 우물안 개구리의 생각이라고 비하할지 모르나
나는 형님의 말을 듣고 그 속마음을 생각해 보았다.
그것은 가난에 찌들여 온 형님의 절약 정신에서 나온 생각이 아니었다.
지금은 그 형님의 4아들이 모두 결혼하여 직장을 가졌고
해외여행 갔다 올 만큼의 여유는 있지만
그래도 극구 사양함은 아버지를 사랑하는 그의 마음이라 생각되었다.
우리 믿는 사람들은 죽기 전에 빚을 내서라도 성지순례는 꼭 하고 싶어 한다.
말로만 들어 왔던 예수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계실 때 천국 복음을 가르치시고
많은 병자들을 고쳐 주셨던 현장을 둘러 보는 것은
일생 일대의 뜻있는 일임에는 틀림없다.
그러나 요즘 같이 살아가기에 어려운 시기에
성지순례를 하는 것은 일종의 사치이며
그렇지 못한 사람들에 대한 배려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여유가 있다면 다녀올만 하다.
그리고 경제 사정이 여의치 못한 사람들에게는 나름대로 위안이 필요하다.
인터넷이 발달하여 어지간한 곳은 인터넷으로 구경할 수 있으며
방송국에서 제작한 영상을 구입하면 몇 번이고 마음대로 구경할 수가 있다.
집 떠나면 고생이고 요즘처럼 무서운 신종 인프루엔자가 창궐하는 이 마당에
사서 모험을 할 필요는 없다고 본다.
그리고 갔다 온다고 해서 믿음 생활이 더 착실해진다는 보장도 없고 하니
늘 하던대로 최선을 다해 살아가면 된다.
그리고 하나님께 제대로 바치지도 못한 내가
성지순레를 명목으로 관광한다는 것은
어딘가 떳떳하지 못할 것 같은 생각이 든다.
어제 벗어 놓은 신발을 오늘도 신게 된 것을 감사히 여기며
늘 하나님을 기쁘시게 살아가도록 노력해야 하겠다.
2009.9.20 주일오후 4시45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