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관점
과학자들의 말에 의하면 우주의 반지름이 대략 600억 광년이라 한다.
우리가 상상하기 힘든 넓은 곳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곳은 대우주 속에 있는, 은하군, 우리은하, 태양계, 지구, 한반도의 대한민국이다.
전체 우주에 비하면 지구는 한 점에 불과하다.
인간이 측량할 수 없는 우주를 창조하시고 관장하고 계시는 분이 하나님이시다.
하나님께서는 우주가운데 한 점에 불과한 지구라는 곳에 인간 역사를 펼치시고
그 처음과 끝을 관리하고 계신다.
과연 하나님께서는 이 넓은 우주 가운데 한 점에 불과한 지구에만 관심을 가시실까?
그것은 인간이 자기 중심으로 생각하는 경우이고
하나님의 계획과 섭리와 관점은 다를 수가 있는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우주를 관장하고 계실까?
우리 인간과는 차원이 다른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신 신이시기에 가능한 일이고
피창조된 우리 인간은 알 수가 없다.
우주는 존재하니까 관장하시는 분이 있어야 함은 마땅하고
그 자세한 것은 인간의 지혜로는 알 길이 없다.
알려고 하는 것은 무리이고 신에 대한 도전이고 불가능한 일이다.
우리 인간은 우주의 크기가 얼마인지도 모른다.
미국의 최대의 만원경 '허블'이 인공위성에 실려 우주를 관측하지만
우주의 크기와 끝자락이 어디 있는지 모른다.
광년이란 단위를 만들어 숫자로 표현하지만 어림수이며 가설일 뿐이다.
그런 무지한 인간이 자신의 죽음도 예상 못하는 주제에 신의 존재를 왈가왈부하는 것은
신의 관점에서는 가소로운 일이다.
도대체 나는 누구이며 뭣 때문에 이 세상에 태어났으며 죽으면 어떻게 되는 것일까?
생각해 보아야 할 일이다.
성경에 의하면 나는 태초에 하나님의 의도하에 존재가 확정되어 이 세상의 부모를 통해 이 땅에,
이 시대에, 나타난 것이다. 한마디로 말하면 하나님께서 나를 조성한 것이다.
나의 존재 이유는 무엇인가? 사람들이 필요에 의해 물건을 만들듯이
하나님께서도 인간들을 하나님의 필요에 의해 만드셨다.
성경에 의하면 인간은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 분을 찬양하라고 만드셨다.
그런데 신이 존재하느니 존재하지 않느니 말하는 것은 신에 대한 가장 무례한 일이며
신이 그가 택한 백성에게 내리신 '10 계명' 중에서 첫째로 싫어 하는 경우이다.
신은 인간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해서 존재 안 하실 분도 아니시다.
신은 인간에 의해 영향을 받으실 분이 아니시다.
분명히 존재하시는데도 불구하고 존재하지 않는다고 하거나
거부하거나 무시할 때는 응당의 벌을 받아야 할 것이다.
그 분의 생각과 뜻은 성경에 나타나 있다. 그래서 성경은 책중의 책이요.
인간 필독도서이다.
거기에는 인간 역사의 시작이 언급되어 있고 끝이 언급되어 있다.
또 우리 인간이 무엇을 위해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도 언급되어 있다.
신은 인간에게 자유의지(自由意志)를 주셔서 생각하고 행동하게 하셨다.
어떤 일을 하고 안하고는 개인의 의지에 달려 있으므로
그 결과와 책임은 각 개인에 있는 것이다.
인간은 죄 가운데 태어났고 공중권세 잡은 사탄에 의하여 매일 죄를 짓고 산다.
죄란 무엇인가? 모든 불의가 죄이며 모든 불법이 죄이며 믿음으로 따라하지 않는 것이 죄이며
선한 일인 줄 알면서도 행치 않는 것이 죄이다. 죄가 없는 사람은 없다.
그리고 죄의 값은 사망이다. 그래서 인간은 죽는 것이다.
첫째는 육체의 죽음이요, 둘째는 영혼의 죽음이다.
그리고 영혼의 죽음은 소멸되는 것이 아니고
영원한 고통이 바로 둘째 사망인 것이다
신이 인간으로 하여금 아예 죄가 없도록 하여 모두 천국 백성으로 삼으시면
인간의 관점에서는 좋을지 모르지만 신의 뜻은 아니다.
신은 원래 인간을 선하게 만드셔서 에덴 동산에서 살게 하셨다.
신은 그의 뜻으로 그의 백성이 되기 위한 통과의례를 만드셨다.
그것이 바로 '선악과 사건'이다.
따 먹지 말라 했을 때 따먹지 않겠다는 마음의 결심은 각 개인의 자유의지인 것이다.
자유의지도 없는 인간은 인간이 아니라 로버트인 것이다.
하나님은 인간을 로버트로 만들지 않으시고 자유의지를 가진 인격체로 만드신 것이다.
천국은 이 세상에서 선한 일을 많이 한다고 해서 가는 곳이 아니다.
믿지 않는 자들이 크게 착각하는 점이다.
하나님의 계심과 그 분의 아들 예수그리스도가 우리의 구세주라는 사실을 믿어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사실은 우리가 믿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택해 주셔야 하는 것이다.
우리는 그것을 '신의 은총' 또는 '은혜'라고 부른다.
택하고 택하지 않는 것은 신의 뜻이지 우리 인간 마음대로 되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선한 일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면 마땅히 하게 되어 있다.
간단히 말하면 선한 일을 많이 했다고 천국 가는 것이 아니고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이심과 인간의 죄를 위해 대신 십지가를 지심으로
죄사함을 얻고 영생을 선물로 받는다는 사실을 믿어야 하는 것이다.
선한 일은 그를 믿는 자는 당연히 하게 되어 있다.
성경에 심오한 진리가 있는 것이다. 그 속에 하나님의 뜻이 있는 것이다.
믿음은 들음에서 나기 때문에 들려 줘야 한다.
이 비밀스런, 값진 이야기를 먼저 아는 자가 들려 줘야 한다.
들어도 깨닫지 못하는 자가 있고 받아 들이지 않는 자가 있다.
그들은 불행한 사람들이다. 살아 움직이고 있으나 실은 죽은 자들이다.
이렇게 말해도 그 의미를 모르는 자들이 많다. 불쌍한 사람들이다.
인간은 소유(所有)라는 제도하에 살고 있다.
소유라는 제도가 있으므로 안정된 삶을 누릴 수 있고
소유하려는 욕구에 의하여 노력하며 살려는 마음이 생겨나며
그것이 인간 존재 이유라고 착각하며 살고 있는지도 모른다.
소유란 무엇인가. 맨 처음에 하나님이 땅과 바다를 만드셨고 인간을 만드시사 에덴에 살게 하셨다.
그후 사람의 수가 증가함에 따라 그 관계속에서 땅, 강, 짐승, 곡식, 과일, 채소,
그들의 거처 등의 소유을 서로 인정하게 되었다.
나아가 씨족 또는 부족사회가 서로 소유를 인정하게 되었다.
왕이나 제후가 토지를 소유하게 되고 결국 국가가 관여하여 소유권를 결정하고
소유권의 등록 및 정리를 하게 된다.
요즘은 소유권이 동산, 부동산, 지적재산권 등으로 세분되어 있다.
부동산의 경우 땅의 경계를 만들고 법적으로 보호 받기 위해 측량하고 등록한다.
국가간에도 국경 때문에 전쟁을 치르기도 하고 남의 것이 탐이나 침략하기도 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소유권이 많은 사람을 행복한 사람이라 여긴다.
또 소유권은 상속되어 다같이 인간으로 태어났으나 상속 받는 소유권 때문에
출발부터가 달라지는 경우를 두고 불합리 내지 부조리라 여기는 사람도 있다.
그리고 무소유의 기쁨을 노래하는 성직자도 더러 있다.
소유가 많으면 생활에 도움이 되고 편리한 것은 사실이다.
많은 소유 때문에 불행을 초래하는 경우도 있다.
인간의 삶 중에서 재산의 재 분배. 소득의 재분배가 잘 이루어져야 다같이 잘 사는 나라가 되는데
사실 그것이 어렵다.
초대교회의 성도들은 가장 이상적인 소유를 실천한 사람들이다.
성경에는 소유 때문에 고민한 부자 청년의 이야기도 있고
또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기 어렵다고 말하고 있다.
소유는 가진 자의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것인데
내가 이 세상 살아 있을 때 소유를 관리하는 청지기일 뿐이다라는 것이
소유에 관한 가장 확실한 정의이며 올바른 관점이다.
그리고 예수그리스도께서는 소유(보물)를 이 땅에 쌓지 말고 하늘나라에 쌓으라고 말씀하셨다.
이 땅은 우리가 영원히 살 곳이 아니다.
오늘 저녁에라도 오라면 모든 것을 두고 가야할 판이다.
그런 나에게 이 땅에서의 소유가 무슨 의미가 있는가?
내가 부유하게 된 것은 가난한 자를 도우라는 신의 뜻이 있는데
마치 운이 좋거나 내가 머리가 좋아서 그렇게 된 줄로 착각하는 경우가 많으며
특히 큰 재산을 상속받은 자는 따로 생각해야 할 바가 크다.
예수께서는 가난하고 억울하고 병들고 어려운 가운데 사는 사람들을 돕는 것이
곧 그리스도께 하는 일이라고 말씀하셨다.
끼니를 굶는 사람을 도운 적 있는가? 억울한 일을 당한 사람의 편에 서서
그를 옹호한 적이 있는가? 병든 사람을 애석하게 여기고
그를 돕는 성금을 내 본 적이 있는가?
어렵게 사는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며 그들을 구체적으로 도운 일 있는가?
그런 일이 없거나 생각이 잘 나지 않으면
당신은 진정 소유한 사람이 아니며 부자도 아니다.
더군다나 '천국백성'은 더욱 아니다.
질문을 하는 필자도 이 속에 포함시키고 하는 말이다.
우리 인간은 어제 벗어놓은 신발을 다시 신게 된 것을 감사히 여기며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사는 것이 가장 행복한 삶이라는 것을 깨달아야 할 것이다.
2009년 9월 11일 밤 10시57분 이우길 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