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국백성 2009. 4. 18. 20:24

 

 

일본 여행

 

(日本 旅行)

 

 

  작년의 베트남 '하롱베이'에 이어 금년 봄방학에는

일본의 '홋까이도'을 방문하기로 했다.

내년에는 유럽으로 갈 예정이다.

일본은 이번이 3번째이다.

비행기 탑승 중 이륙할 때가 가장 위험하다 하여 늘 걱정이 되었다.

왜냐하면 연료를 가득 실은 상태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륙하다가 사고 났을 때 살아남은 자가 없기 때문이다.

우리를 실은 비행기가 주활주로에 도착하여 엔진을 가속하자

곧 구름 위로 솟았다. 구름 위는 아름다웠다.

름 아래에는 비와 눈이 내리고 바람이 분다.

그리고 인간들의 욕심과 다툼과 미움이 있지만 구름 위는 그렇지 않다.

멀리 멀리 펼쳐진 뭉게 구름바다 위엔 오직 밝은 빛만이 있고 평화만 있었다.

이곳은 우주를 다스리는 하나님만이 내려다보시며 상황을 바꿀 수 있는 곳이다.

 

 

 

  

  얼마의 시간이 흐르니 구름사이로 일본 땅이 보이고

한참을 지나니 구름사이로 푸른 바다만 보였다.

바다와 하늘의 색은 거의 분간이 안 되고

비행기의 자세로 바다와 하늘을 추측할 뿐이다.

영국 어학연수 갔을 때 처음 비행기를 타게 되었고

제주도에 2, 일본에 3번이니 얼마나 검소한가.

물론 돈이 없어서 그랬겠지만... 기내식과 음료수가 동시에 나왔다.

치토세 국제공항에 도착한다는 기장의 방송이 있었고

하강하기 시작했는데 귀가 멍했다.

나는 다른 사람과 달리 귀가 많이 아픈데 왜 일까?

 

 

 

  

 김해공항보다 크지 않은 공항이었으나 깨끗해 보였다.

가이드의 안내에 따라 입국 수속을 마치고 버스에 올랐다.

버스는 영국의 2층 버스처럼 좌석이 높은 데 있었다.

관광을 고려한 버스의 설계인 듯하다.

버스를 타고 공항을 벗어 났는데 눈이 와서 온통 천지가 하얗다.

한참을 달려 시라오이(白老)로 이동했는데

이곳은 북해도 원주민인 아이누족에 관한 최대의 민속촌이 있는 곳이다.

큰 수호신인 원숭이 상 앞에서 일행 22명 전원이 들어가는

기념사진을 찍자고 내가 제안하여 찍었다.

그리고 건물 속에 들어갔는데 원주민 후예처럼 보이는 사람 4명이

전통복을 입고 맞이해 주었다.

건물 속에 들어가니 오두막 같이 생긴 천정에 불을 피운 관계로 그을려 있었고

한 가운데는 모닥불을 피우고 있었다.

연어를 훈제한다고 하였으며 밖에도 연어를 많이 말리고 있었다.

조금 있으니 중국인 관광객들도 와서 한방 가득했다.

잘 생긴 키 큰 남자가 나와서 한국말을 섞어가며 재미있게 설명했다.

 

 

 

 

 조금 있으니 여자 소개자가 나와서 다른 여자의 공연 소개를 하였는데

입에다 대나무 껍질 같은 것을 대고 손으로 두들기며 불었는데

아름다운 소리가 들렸다.

울리는 소리였으며 정말 아름답게 들렸다.

처음부터 끝까지 비디오로 촬영했다.

그 다음 한 여자가 나와서 거문고 같은 것을 어깨에 걸쳐 땅에 대고 두 손으로 연주하였다.

그 다음 7명이 나와 박수를 치며 모닥불 주위를 돌면서 노래를 불렀다.

그 중 한 사람은 칼을 들고 춤을 추었는데 아까 재미있게 설명한 잘 생긴 그 남자였다.

점심 식사는 현지식이었는데 어릴 적에 담벼락 밑에서 소꿈장난하는 식사같았고 맛도 없었다.

반찬도 조금씩이었고 싱거웠다.

 

그 다음 노보리베츠(登別)의 지옥곡으로 갔다.

용암이 솟아 북적대며 유황 냄새와 연기가 자욱할 줄 알았는데

벌거숭이 산 곳곳에서 수증기가 솟아 오르고 까마귀들이

여기저기서 울어 대고 해서 약간은 음산했다.

여기서도 비디오로 촬영했다. 지옥 같지는 않았다.

별로였다. 그러나 한국에도 이런 곳이 있다면 좋은 관광지가 될텐데....

 

 

 

 

그 다음에는 노보리베츠 지다이무라(登別 時代村)로 갔다.

영화 촬영장 같았고 일본 고유의 건물로 꾸며진 곳이었다.

일본 가옥과 연극을 중심으로 에도 시대를 재현하고 있었는데

건물 속 공연장에서는 고급 기생과

에도시대의 장군과의 만남에 관한 내용의 연극을 했고

연극이 끝나면 돈을 싸서 던지라고 문종이 같은 종이를 입장할 때 나누어 주었다.

나는 조금 보다가 밖의 경치를 촬영하러 나갔다.

눈 쌓인 경치가 정말 아름다웠다.

또 건물을 바꾸어 다른 곳에 입장했는데 조명은 어둡고

무사들이 나와서 칼싸움 하는 장면들이 많았는데 실감나게 싸웠다.

또 입장할 때 종이를 나누어 주었다.

그곳에다가 동전을 싸서 던지라고 했다.

 

 

 

 

  밖에서 기념 촬영했는데 눈 덮힌 지붕과 처마선의 아름다움과

역광에서 빚어진 광선의 조화와 어울려 멋진 사진이 나왔다.

Miyabitei Hotel(雅亭)(전화 0143-84-2335)에 여장을 풀었다.

박준하 선생님과 함께 511호에 묵었다.

다다미방이었는데 별로 깨끗지는 못했다.

일본식 전통 잠옷을 입고 호텔 내에서 돌아다니는 것이 허용됐고

온천탕에 갈 때도 입었다.

모두 모여 복도에서 기념 촬영도 했다.

식사 전에 온천욕을 했는데 물이 좋았다.

그런데 탈의실에서 옷을 벗은 채로 계단을 한참 내려가는 것이 불편했다.

욕조 턱과 바닥이 나무로 마감되어 미끄럽지도 않고 냄새도 좋았다.

뿌연 자옥탕도 있었고 미지근한 물도 있어 헹기기에 좋았다.

면도날도 있었고 삼푸, 린스, 물비누도 나란히 셋트되어 놓여 있었다.

그런데 때밀이 수건이나 닦는 수건이 없었다.

이유는 거의 매일하는 목욕이라 때가 나올 턱도 없고 한국처럼 수건을 다량으로 세탁하다보면

이상한 냄새나는 세재를 넣어 덜 씻은 채로 말려 제공함으로

건강에 나쁘고 기분 상 좋지 않음을 고려했으리라 짐작된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있었다.

남탕인데 여자 종업원이 나돌아 다녔다.

나는 이상했는데 일본 사람들은 아무렇지 않게 생각하는 것 같았다.

젊은 아가씨 같으면 난처할 것 같았는데 할머니라서 그런지 나도 괜찮았다.

오면 오고 보면 보고 아무렇지도 않았다.

 

목욕 후에 저녁 식사를 했는데 점심 식사와는 달리 뷔페식이었는데 골라서 맛있게 먹었다.

특히 참치 고기가 맛있었고 야채 주스가 시원했다.

그리고 카메라와 비디오의 밧데리가 바닥나서 충전하기 위해

호텔에 220V Translator를 원했으나 없다고 했다.

강력하게 주장하니 어디서 구해왔는데 보니까 새것이었다.

구입해서 가져온 듯 했다. 밤새도록 충전되도록 꽂아 두었다.

 

둘째 날 아침 식사를 맛있게 하고

빌린 220V Translator도 반납하고 버스에 올랐다.

호텔 직원이 모두 나와 인사를 했다. 손을 흔들어 주었다.

버스는 눈 덮힌 쌋뽀로를 누비려고 아침 일찍 출발했다.

 

 

 

 

눈 덮힌 쌋뽀로 - 하나님께서는 어쩌다 이곳에다

이렇게 아름다운 경치를 주셨을까!

달리는 버스에서 바라다 보이는 산야는 정말 아름다웠다.

그냥 나무가 아닌 아름드리 나무가 계속 펼처져 있었다.

이는 국가차원에서 오랜 세월을 두고 가꾸어 온 결과라 여겨진다.

우리나라는 쓸 만한 나무가 별로 없고 군데군데 소나무와 잡목이

아무렇게나 있고 아카시아와 가시덤불로 이어져 있으니 반성해야 할 일이다.

옛날에는 쓸만한 나무는 모두 베어 땔감으로 다 써버리고

일본 사람들이 와서 우리를 괴롭히고 벌거숭이 산에 사방사업을 한답시고

아카시아를 심어놓아 생명력이 너무 강해 요즘와서 경제성이 없어

죽여도 죽지 않고 강력한 제초제 근사미를 뿌려도 죽지 않으니 큰 일이다.

우리는 덕분에 아카시아 꿀은 더러 먹긴 하지만 제대로 된 나무를 심어야 한다.

우리의 자연 환경과 친환경의 건축 자재를 위해서, 우리 후손들을 위해....

 

  

 

 

 

  우리를 실은 버스는 열심히 달려 산등성이를 넘고

산 모퉁이를 돌아 넓은 평지로 나왔는데

멀리 멀리 펼쳐진 눈 덮힌 들판, 저 먼 곳 구름 위로 산이 솟아 있었는데

나도 모르게 고함을 질렀다.

자던 사람들이 놀라 모두 깨어 같이 고함질렀다.

어찌하여 하나님께서는 이곳에다가 이런 경치를 주셨을까!

왜 우리나라에는 이런 곳이 없는가!

전에 베트남 하롱베이에 갔을 때도 한 얘기를 또 하게 되었다.

하나님은 불공평하시다고....

세상의 잡다한 유색의 더러움을 흰 눈으로 덮으시고

그것도 1미터 이상으로 깊게 덮으셔서

오직 깨끗함과 고요로 잠재우시기 위함인가?

아니면 이곳을 거치는 사람들에게 마음 속으로

느낌으로 따로 바라시는 바가 있는 것인가?

 

신이시여 말씀하소서.

우리가 무엇이라 해야 합니까!

우리나라와는 달리 이곳 일본에는 3000m가 넘은 산이 수십 개가 된다고 한다.

워낙 높게 솟았기에 한참 달렸는 데도 같은 그 산이 보였고

모퉁이를 돌아 달려고 아직 그 산이 보였다.

 

 

 

 

 

  버스는 달려 도야(洞爺)로 이동했다.

194312월에 생성된 쇼와신잔(昭和新山)의 활화산에 이른 것이다.

멀리 산봉우리에서 뿌연 연기를 내뿜고 있었으며

그 것을 배경으로 사진과 비디오로 촬영했다.

그곳을 떠나 도야코(洞爺湖)에 이르렀다.

바다같은 호수이었으며 아무리 추워도 지열 때문에 얼지 않는다고 한다.

유럽의 고대 성 같이 꾸민 배가 호수를 한바퀴 돌았다.

배와 함께 상주하는 갈매기들이 관광객이 주는 새우깡을 먹으러 손바닥으로 겁 없이 달려든다.

한폭의 그림이라 사진도 찍고 비디오로 촬영했다.

갈매기의 비행이 정말 유연했다.

날마다 바뀌는 관광객이지만 그들은 언제고 배 주위를 날 것이다.

목숨이 붙어 있는 한.....

그곳에서 태어나 그곳에서 죽게 될 갈매기의 일생을 생각해 보았다.

지금은 밤이 되어 내일을 위해 짝지어 자고 있을지도 모른다.

호수의 물색은 검은 색이었다.

그러나 물은 맑게 보였다.

멀리 눈 덮힌 산, 호수의 검은 물, 하늘은 뭉게구름이 피어 있고,

갈매기는 배 주위를 질서있게 나르고... 대충 그림이 그려질 것이다.

가보지 못한 사람이라도....

 

 

 

 

잠시 머문 후에 오타루(小尊)로 이동했다.

작은 항구와 좁은 언덕 길, 옛 운하와 석조 창고가 많은 곳이었다.

현지식의 점심을 했는데 여기서는 생선 초밥이 나왔다.

식사 후에 거리로 나가 구경했는데 마른 오징어를 썰어 파는 곳도 있었고

아이스크림도 팔았는데 여기의 명품이란다.

옛날 운하를 이용하던 시절에 지은 창고를 이용한 상점이 많았으며

상점마다 아기자기한 오르골과 다양한 기념품을 팔고 있었으며

특히 기타이치 가라스(北一 Glass)에는 10만 종류가 넘는 유리 제품을 전시하고 있었다.

 

 

 

 

오타루 구경을 한 후 쌋뽀로로 이동하였다.

쌋뽀로는 일본의 5대 도시이며 지하철도 있었다.

홋까이도 청사를 구경하였는데 붉은 벽돌의 도청(아까렝가쵸)이라는 별칭이 있고

홋까이도 개척의 역사가 담긴 미국풍 네오바로크 양식의 건물이었다.

복도에 대형 그림이 있었는데 미국과 관련된 그림이었다.

버스를 타고 얼마 떨어지지 않는 오오도리공원(大通公園)으로 갔다.

해마다 눈 축제가 열리는 곳인데 금년은 끝났다고 했다.

건물사이에 있는 공원이었다.

근처에 홋까이도 시계탑이 있었는데

에펠탑처럼 생겼고 오르내리는 엘리베이터가 있음을 불빛으로 알 수 있었고

시간이 조명되어 사방에서 볼 수 있었다.

 

 

약속 장소로 오는 길에 옛 시계탑에서 사진을 찍었다.

전기 조명도 잘 해두었고 사진 찍도록 설 곳도 마련되어 있었고

나뭇가지의 조명은 정말 환상적이었다.

오오도리 근처의 큰 시계탑 옆에는 NHK 방송국 분국도 있었고

아름다운 조명을 배경으로 여러 장의 사진을 찍었다. 

 

 

 

 

  구경을 마친 후 마지막 숙소인 Apa Hotel & Resort Sapporo로 향했다.

일본에서 수십 개의 Apa Hotel을 여사장이 경영한다고 한다.

비교적 깨끗한 호텔이었으며 좋았다.

그런데 카메라 밧데리가 소모되어 충전 Translator를 요구했으나 없다고 했다.

저희들 끼리 뭐라고 하더니만 결국 해결해 주지 못했다,

지난밤에 묵었던 호텔은 규모가 작았는데도 해결해 주었는데 여기는 그러하지 못했다.

기분이 별로 였다.

영어로 한참 설명하고 그것은 여러분들의 손님에 대한 의무이며

노력하고 개선해야 할 점이라고 역설했다.

 

 

 

 

  아침에 일어나 온천탕으로 갔다.

여기서는 어제와 달리남탕 여탕이 서로 바뀌었다.

내부구조도 약간 다르고 천정도 달랐다.

남여의 정기를 서로 바꾸어 준다고 하여 이렇게 하는가 보다.

늘 오던 사람들도 환경이 바뀌면 새롭다는 상술도 작용했으리라.

식사도 깔끔하고 맛있었다.

주로 밥 대신에 빵과 뻐터와 쨈을 먹었고 생마를 갈아서 준비한 것도 있었다.

 

 

 

 

  식사 후에 버스에 짐을 싣기 전에 온천탕 안으로 들어가서

탈의실과 탕안의 장면도 찍었다.

마침 아무도 없었다.

일본 사람들은 주로 일을 마친 후 저녁에 많은 사람들이 온천욕을 한다고 한다.

호텔 밖에다 눈사람을 만들어 두었는데

그곳에서 많은 사람들이 기념촬영을 했다.

눈이 너무 내려 앞이 보이지 않을 지경이었다.

떠나기 전에 만들어 둔 대형 눈사람을 배경으로 몇 장을 찍었는데

바쁘게 찍다보니 별로였다.

여기서는 호텔 직원들이 우리가 탄 버스가 떠날 때 나와 보지 아니했다.

큰 호텔이라서 그런가 보다. 30분을 달려 시내 면세점에 들렸는데

가이드가 세라믹칼, 말기름 화장품, 정로환, 스쿠알렌, 키토산, 감기약 등을 선전했지만

나는 아무것도 사지 않았다.

목욕탕에서 본 삼푸가 있는가 찾아 보았지만

조그마한 것 뿐이었고 욕탕에서 본 대형은 없었다.

 

 

 

 

  공항까지 가는데 30분 정도 걸린다는데 창밖을 보니

온통 내린 눈으로 하얗게 되었으나 날은 점점 맑아지고 있었다.

공항에 도착하여 면세점에서 카메라 후레쉬를 찾았지만 거기도 없었다.

괜히 엔화 67천을 환전했다고 생각했다.

아내와 며느리에게 줄 아이라인을 2세트사고 손녀 혜원이에게 주려고

일본 아기인형을 하나 샀다.

더 많은 선물을 사고 싶었지만 마땅한 것이 없었다.

 

한국인에겐 한국인에게 맞는 화장품을 써야 한다.

얼굴색과 피부가 다르기 때문이다.

그리고 돈을 외국에다 뿌려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탈 비행기는 KE 772 대한항공 보잉 737이었다.

출국 수속을 밟고 비행기에 올랐다.

눈 덮힌 쌋뽀로를 뒤로 두고 우리를 실은 비행기는 구름위로 솟았다.

갈 때는 비행기 날개 뒤였는데 올 때는 날개 앞쪽이었다.

비행기에서 내려다보니 구름사이로 산이 보였다.

잠시 보이더니 사라지고 보이는 것이라고는 뭉게구름 뿐이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뭉게구름이 새털구름으로 바뀌더니

다시 너저분한 구름으로 바뀌고 비행기도 덜컥거렸다.

2시간이 지나자 한국의 산야가 보이고 남해안 일대가 보이고

배들도 긴 물거픔을 달고 이리 저리 가는 것을 내려다 볼 수 있었다.

곧 착륙한다는 방송이 들렸고 비행기는 좌우로 흔들거리다가 곧 착륙했다.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입국 신고를 하고 나왔는데 짐은 풀어 보지도 않았고

신고한 카메라 렌즈도 보자고 하는 사람이 없었다.

괜히 걱정했다. 공항 주차장에 둔 박준하 선생님의 차를 타고

경주 백률사 근처에 내리니 오후 350분 이었다. 

 

 

          

 

                       

     일본이라는 나라는...

일본은 입헌군주국으로 면적이 377Km2이다.

우리나라는 남북한 합해 22Km2이니 우리 보다 1.6배 크다.

인구는 127백만명(2003년도)이나 된다.

일본열도는 홋까이도, 혼수, 시코쿠,규수 4개의 큰 섬과

34백여개의 작은 섬으로 이루어져 있다.

전국토는 지진과 화산이 자주 발생한다.

200여개의 화산이 있는데 그 중 유명한 후지산은

2377m1707년에 폭발한 휴화산이다.

아시마산과 사쿠라지마산은 잘 알려진 활화산이다.

각지에 온천이 많은 것도 화산의 발달과 관계가 있다.

                                                                  

 

 

 

 

   일본열도는 남북위차가 22도나 되고 아시아대륙과 태평양에서 불어오는 기단이

부딪치는 곳이므로 기후 조건이 매우 다양하다.

습도가 높고 강수량이 많다.

겨울철에는 강한 북서풍이 동해상의 습기를 몰고와 일본 서해안에 폭설을 내리게 한다.

홋까이도 북부지역에 눈이 오는 날은 연평균 130일 이나 된다.

일본의 우기는 6월에서 9월까지 이다.

태풍과 관련이 되어있으므로 홍수와 산사태가 자주 일어난다.

 

백제(百濟)로부터 4세기 말에는 한자와 유교가,

6세기에는 불교가 전래되어 문화가 크게 발전하였는데,

쇼토쿠태자[聖德太子(성덕태자)]는 불교를 바탕으로 한 정치를 하고 각지에 많은 사찰을 건립하였다.

7세기에 지배계급은 당()나라의 제도를 모방한 율령제도를 지배의 기본체제로 하는 정치개혁을 통하여

 왕실을 중심으로 집결하고자 하였고, 국민을 공민(公民양민)과 노비(천민)로 나누었다.

8세기 말부터 9세기에 걸쳐서 율령국가의 기반이었던 반전제가 무너지고

 귀족·사찰의 사적(私的) 토지소유인 장원이 발달하였다.

 

10세기 이후에는 장원·공령(公領)의 경작을 도급받은 농민상층(農民上層)이 

차츰 토지경작권을 가지게 되어 자립적으로 경영하게 되었다.

그리고 경작과 경영을 유지하기 위하여

무장한 지주농민과 관리 가운데 무사(武士사무라이) 가 생겨났다.

 

 

 

 

메이지유신 이후 프로이센 헌법을 본뜬 메이지 헌법을 제정하였는데

이는 왕중심의 강력한 군주권을 배경으로 입헌주의 외관을 갖춘 것이었다.

지금의 일본헌법은 제2차세계대전 뒤인 1946년 메이지 헌법을 개정하여

제정한 것으로 구헌법과의 가장 큰 차이점은

왕을 국정에 관한 권능을 가지지 않은 국민통합의 상징으로 규정한 것과

국민주권을 강조한 점이다.

 

19458월 말부터 19524월까지 연합국에 의한 일본점령,

실질적으로 미군의 단독점령기간 중 일본은 외교자주권을 가지지 못하였다.

19519월 제2차세계대전의 종료를 위해 연합국과 일본이

강화조약(샌프란시스코강화조약)을 체결하였는데

이때 미·일안전보장조약이 체결됨으로써

미국점령군은 주둔군체제로 계속 일본에 남게 되었다.

 

세계 GNP10% 이상을 차지하고 있는 일본은

세계무역에서도 거의 비슷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1995년 수출액에서는 미국과 독일에 이어,

수입액에서도 미국과 독일에 이어 각각 제3위를 차지하였다.

 

20세기 들어 제국주의 시대의 본격화는 일본자본주의를 제국주의로 전환하도록 촉진하였다.

·일전쟁, ·일전쟁의 승리로 타이완·()사할린·한국을 식민지화하는 한편,

양 전쟁 후 관영인 야하타제철소[八幡製鐵所(팔번제철소)]의 창설과

·해군 공창(工廠)의 증강, 철도국유화 등 군비확장을 위하여

정부 주도로 중공업 육성이 추진되었다.

 

 

 

 

기독교의 전래

근세 봉건사회의 성립을 향해 치닫고 있던 전국시대는

미지의 세계로부터 새로운 문명과 문화의 파도가 일본에 밀려들어온 때 였다.

16세기 중반 포르투갈의 흑선이 가져온 총과

'동양의 사도'로 칭해진 자비에르가 전한 기독교가 그것이다.

1549년 일본 포교를 시작한 예수회의 프란시스 자비에르가

가고시마에 도착하여 오우치씨의 보호를 받으며 포교를 하였다.

막부는 초기에 기독교에 대해서는 방임하는 태도를 취했다.

그러나 기독교의 포교가 스페인과 포르투갈의 침략을 초래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과

신도가 신앙을 위해 단결하는 것을 꺼려하여 1612년 직할령에 금교령을 내리고,

다음에는 전국으로 확대해서 신자의 개종을 강제했다.

이후 막부와 각 번은 선교사와 신자들에 대해 처형과 국외추방 등의 혹독한 박해를 가하게 된다

 

 

 

 

  막부 출범부터 기독교의 유입은 무역과 달리 수난의 길을 걸었다.

1543년 포르투갈 인을 태운 중국 배가 규슈 남부의 다나가시마에 표착했는데

이것은 일본에 온 최초의 유럽인이었다.

이때 영주가 포르투갈 인이 갖고 있는 철포를 구입하여

가신들에게 사용법과 제조법을 가르친 이후,

포르투갈 인들은 매년 규슈의 각 항에 내항하여 무역 활동을 했다.

스페인인도 1548년 나가사키현의 히라도에 내항하여 무역을 개시했다.

 

큐우슈우의 제영주는 포르투갈배의 기항을 희망하고

생사나 군수품을 구입하기 위해 기독교 보호에 노력하였다.

포교와 무역의 일체화를 가장 강력히 추진한 다이묘는

오오무라 스미타다(大村純忠), 1562년 세례를 받고

영내의 기독교화를 도모하여 요코세우라와 후쿠다(福田), 나가사키 등 3개항을 개항하였다.

 

 

기나이(畿內)지방 포교는 1559년 빌레라 신부에 의해 착수되었는데,

다음해 장 이때 등장한 선교사는 과학적 지식을 토대로

천체와 기상현상을 설명해 주는 등 농민의 천문지식에 도움을 줌으로써

기독교가 용이하게 경작 농민사이에 침투할 수 있도록 해 주었다.

 

 

 

 

  .게다가 농민을 직접 지배하고자 했던 영주층은

사원과 결탁한 재지세력을 억압하기 위해 스스로 개종을 행하고

나아가 영민의 개종을 추진하여 영주권을 확립하려고 하였다.

 

오다 노부나가가 사원대책을 취하면서

통일 정책의 도구로서 선교사를 보호하고 기독교를 이용한 것은 교세 확대를 더욱 촉진하였다.

히데요시는 노부나가와 마찬가지로 기독교에 호의적인 태도를 취하였다.

통일정책이 일환으로서 보호하고 이용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히데요시는 15876월 돌연 하카다에서

<선교사 추방령>을 발하고 예수회 신부들에게 일본 퇴거를 명령하였다.

그리고 나가사키를 몰수하고 직할령으로 삼았다.

 

"신국(神國)" 일본을 표방하며 이단종교의 선교를 금한

이 추방령은 한편으로는 상선의 내항만큼은 환영한다는 뜻을 분명히 밝혔다.

결국 나가사키의 직할령화는 무역독점을 위한 포석이었던 샘이다.

그리고 일본국내에 공포한 법규에 따르면,

'20023천 이상을 소유한 자'가 기독교인이 될 경우 히데요시의 허가를 받아야 하였으나,

그 이하의 무사는 어떤 신앙을 갖든 자유였다.

일반 하층민에게도 기독교 신앙은 자유에 맡겨졌다.

 

 

 

 

  그러나 기독교인이 잇코오종파(一向宗波)인 본원사 승려들처럼

천하에 해를 미칠 가능성을 확인하고,

기독교에 잇코오잇키와 같은 구조적 성격이 있음을 느껴

위기감을 심화시킨 것도 부정할 수 없다.

조선침략의 거점으로서 큐우슈우를 중시한 그에게 이는 중대한 문제였다.

또한 인격의 평등을 설파하는 기독교의 가르침은

통일자 히데요시 자신의 신격화를 위해서도 허용할 수 없었다.

 

그러나 히데요시는 예수회가 일본, 포르투갈 양국 상인의 조정자역할을

하고 있음을 알고 있었고,

상품의 독점매입에 실패하게 되자 예수회 신부에 대한 금력을 완화시키고

나가사키에 포르투갈 인을 위한 교회재건을 허가하였다.

그곳에 관리를 파견하고 봉행을 두었으나

나가사키는 이후에도 계속 기독교 도시로 남아있게 된다.

 

히데요시의 금령 후 예수회 신부는 히라도에서 회합을 갖고

순교할 각오로 일본체류를 결정하였다.

박해 속에서도 선교사들은 아리마, 오오무라, 아마쿠사지방에서

포교에 주력하고 투철한 신앙심의 배양에 정진하였다.

 

한편 1593년 프란시스코회 수도사가 필리핀 총독사절로서 내일하여,

히데요시의 금교령을 무시하고 교토에서 과감한 포교를 전개하였다.

1596, 때마침 도사의 우라토에 표착한 스페인선박 "산 펠리페호"의 승무원이

"스페인왕은 기독교로 먼저 인심을 끌어 모은 후 그 나라를 정복한다"하고 호언장담한 것이

히데요시의 분노를 사 박해는 다시 강화되어

다음해 2월 프란시스코회 신부와 기독교인 26명이 나가사키에서 처형당하였다.

 

 

 

일본이란 나라가 잡신이 정말 많은 나라입니다

그래서 복음역시 전달되기가 쉽지 않은 상황이죠

하지만 일본에서 기독교의 위상은 굉장히 높습니다.

왜냐하면 초기 일본의 근대화에 기여한 수많은 리더들이 기독교인이 많았기 때문이죠..

일본의 개신교 선교 역사는 한국에 비해서 25년 앞서면서도

종교의 완전 자유화 속에서 현재 0.3%의 복음화(12천 인구에 기독인 수 30만명)

극히 미진한 데는 몇 가지 원인이 있다

 

 

 

 

 

             전통적 종교 (우상)숭배의 사상

 

일본인들은 무엇이든지 쉽게 바꾸지 않으려는 보수적 전통적 사상이 강하다.

예를 들면 음식점도 100년 이상 몇 대째 계속 하는 곳이 많다.

오랫동안 섬기던 우상을 쉽게 버리려고 하지 않는 타성과 근성이 일본인의 체질에 강하다.

그래서 800만 우상이 지금도 존재하고 있다.

기독교 종주국인 미국과 제2차 세계대전에서 패하였을 때는 복음화가 빨랐지만

 한국 전쟁과 월남 전쟁을 통하여 급속히 경제성장을 하고

 1970년대는 미국과 거의 동등한 경제 대국이 되고 나서

 일본인의 교만과 인본주의, 종교에 대한 무관심과 배금주의쾌락주의 등 

육신적 생활의 풍요로 인해서 더욱 영적인 것에 대해 무관심하게 되었다.

 

가장 큰 이유는 일본의 교회들이 1%의 일본 복음화도 되기 전에

대부분 독일의 자유주의 신학, 우치무라 간죠의 무교회 주의로 기울어져서

전도는 물론 기존 성도들의 자녀(Remnant)마저 신앙유지를 시킬 수 없는 무기력한 교회가 되었다.

 

그래서 일본의 사역은 가족같은 친척을 통한 전도가 많으며

선교사역역시 아직 미진한 부분이 많은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선교사의 말을 빌려말하자면 일본 기독교인의 변화는

매우힘들어도 그들이 개심했을때 거듭난 삶을 너무도 명확시 산다는데 있다

그래서 일본의 기독교 인구는 적으나 희망은 아직 있다고 본다.

 

 

 

 

일본문화는 원래 기독교의 일신론과는 거리가 먼 초특급 다신론적이며

샤머니즘까지 가미된 성향이 짙습니다.

서양문화에 대한 적극적인 호기심에 널리 퍼지긴 했어도 결국 뿌리를 내리지는 못했습니다.

아직까지 일본은 종교만큼은 서구화되지 않은 나라 중에 하나입니다.

카톨릭 선교 사업은 규슈 북부 지역에서 중점적으로 번성하였으며

교토, 오사카도 마찬가지였지요.

사비에르가 일본에 도착한 후 32년 동안에 로마의 예수회 대표에게

해마다 보낸 선교사들의 보고서에 의하면,

교회가 200, 100명이 넘는 외국인과 일본인 직원을 가진 병원이

20, 또 개종자가 15만 명이었습니다.

 

그러나 이후 막부시대 메이지시대에 들어와

신도 국교화 정책에 의하여 탄압이 시작되며

수많은 순교자(30만명)를 낳게됩니다...

일본의 기독교인은 개신교인 약55만명, 가톨릭 46만명, 정교회 26천명정도 됩니다.

모두 합쳐도 104만명으로 전체인구 127백만명의 1%도 안됩니다.

한국과 마찬가지로 개신교인이 계속 줄고 있는 실정입니다.

 

 

 

 

  일본 기독교의 문제점

은 한두가지가 아니지만 국민성과 역사로 인하여

일본인들의 다신관이 가장 문제라고 봅니다.

무종교성이라고 하지요. 일본인들은 크리스마스에는 성탄을 축복하고,

설날에는 신사참배를 하고 결혼은 주로 신사나 교회에서 올리지만 장례식은 절에서 합니다.

이것은 일본 역사에 전통적으로 내려온 '사상'에서 비롯되었다고 보며

종교로 인해 를 깨지 않기 위해서 종교적인 자유를 인정한 것입니다.

덕분에(?) 종교 혁명 등으로 큰 싸움이 일어나지 않은 매우 드문 나라 중 하나입니다.

 

기독교에 있어서는 전도하기 가장 까다롭고 힘든 대상이

바로 무교성을 지닌 사람이나 그런 풍토의 사회입니다.

자신들은 아무거나 믿어도 별 상관이 없다고 생각하는데

유일신만을 강조하는 기독교에 대해서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지요.

그래서 일본이 아직까지도 복음이 많이 전해지지 못한 것입니다.

첫째 : 일본의 만신론 사상 때문입니다.

일본은 여러 가지 신을 믿는 다신교 문화입니다.

그래서 기독교의예수님도 일종의 신으로 받아들이고

자기들이 믿어왔던 우상과 같이 믿고 있습니다.

이러니 일본의 기독교는 복음이 들어와도 영향력이 발휘가 안됩니다

 

둘째 : 양비론 사상입니다.

일본 만화에 등장하는 악당케릭터를 보시면 알겠지만

악당도 절대악이 아닌 사연많은 이유있는 악행을 하는 악당으로 소개합니다.

마찬가지로 일본문화에는 절대악과 절대선이 없다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기독교에서 강조하는 절대악(마귀)과 절대선(그리스도)에 관한 내용들이

마음에 와닿지 않는 것입니다.

오늘날 그들의 조상들이 2차대전때 저지른 만행에 대해서 반성을 주저하는 이유

역시 이러한 양비론 사상이 그들의 마음 속에 뿌리 내렸기 때문입니다.

 

셋째 : 기독교에 관한 안 좋은 추억이 있습니다,

기독교가 처음 들어왔을 때 별일 없었는데

시마바라에서 과중한 세금과 기독교 금지에 대항하여

기독교도의 반란(1637)이 일어난 것입니다.

가까스로 진압한 막부정권은 전반적인 기독교 금지는 물론

기독교를 포교하는 포르투갈을 영구 추방하는 쇄국령을 내리게 됩니다.

 

 

 

 

 일본은 좀 심하게 말하면 저주받은 나라입니다.

그들은 우상숭배 문화가 가득하고, 일제시대 아무리 식민지라지만

그 정도로 잔인하게 식민지를 학대한 나라는

역사상 극히 드물다고 할 수 있습니다.

여자들을 정신대에 보낸 것과 인간의 몸을 생체실험의 도구로 사용하는 것을

일본은 비밀리에 합법화하기까지 했습니다.

 

물론, 독일의 나치도 그와 똑같은 행동을 했지만, 독일은 자신의 전과를 철저히 회개하고,

그 땅에 다시는 그런 비극이 있을 수 없도록 법률까지 제정해서 막고 있습니다.

그에 비해 일본은 아직도 그 전과를 뉘우치지 않고

전쟁의 희생자들이 빨리 죽기만을 학수고대하고 있습니다.

미국의 위대한 예언가 에드가 케이시는 '일본은 반드시 바다에 가라앉아야한다.

(The greater portion of Japan must go into the sea.)'라는 의지적 예언을 말한 것도

바로 일제시대 때입니다.

1930년대 중반, 이것은 결코 우연의 일치가 아닙니다.

그렇게 때문에 일본인들의 세계에서 기독교가 뿌리내리기란 극히 힘이 들다고 보시면 됩니다.

기독교 문화가 회개와 유일신을 기초사상으로 삼고,

여러가지 죄악을 지적하기 때문에 일본인들이 받아들이기 힘든 것이지요.

그렇다고 모든 일본인들이 모두 악한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그들이 우리에게 많은 죄를 지었지만 그들을 용서함으로써

우리의 죄도 사하여 주신다는 주님의 말씀에 순종해야 합니다.

일본의 개신교 선교 역사는 한국에 비해서 25년 앞서면서도

종교의 완전 자유화 속에서 현재 1%도 안되는 복음화 (1억 2천 인구에 기독인 수 55만명)로 

극히 미진한 데는 이 같은 원인이 있습니다.

 

7,800개의 기존의 교회를 유지할 목회자가 없고(신학교 지망생이 없음)

교역자 노령화와 교역자 없는 교회가 점점 늘어가고 있는 암담한 실정입니다.

경제가 풍부한 나라에서는 먹고 즐기는 것에 몰두하게 되어 있습니다.

휴일에는 구경(관광)가기에 바쁘고, 맛있는 음식 먹기에 즐거움을 갖고,

국민소득이 2만불이 넘으면, 육신의 만족에 먼저 신경을 쓰다보니

영적인 문제에는 등한히 할 수 밖에없습니다,

육신의 쾌락이 먼저이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옛날에는 한국에서 지금은 중국에 다니면서

여자 기생관광으로 큰 물의를 이루고 있지 않습니까?

 

 

 

결론적으로 영적인 문제와 육적인 문제가 다툼이 될 때에는 육정이 이기는 것입니다.

 한국의 성적 타락이 바다 건너에서 온 것입니다.

가까운 한국이 기독교 국가로 5만여 교회가 있어도 일본인들이 볼 때에는

'한국이 그렇게 교회가 많아도,

그렇게 부르짖어도 우리나라보다 못살지 않느냐!

'경제적으로 비교 의식도 있음으로 이것도 한 가지 이유가 된다고 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일본을 긍휼히 여기신다면,

구원시키기 위하여 큰 어려움을 보내신다면,

미국이 911일 테러 후에 교회에 사람들이 많이 나가듯이

사람은 고난을 당하면 어쩔 수 없는 방법인 것 같습니다.

만약에일본의 열도가 일년에 30cm씩 침하된다고 한다면,

땅 속의 불이 솟구쳐 섬 하나가 없어진다면

많은 사람은 이제야 깨달아 교회에 나가 하나님에게 기도할 것입니다,

사람들은 마음이 완악하여 선한 말로는 듣지 않으니까,

고통을 주어서라도 하나님의 백성은 구원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일본에도 분명히 하나님의 백성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일본에서 5째 큰 도시인 쌋뽀로에 다니면서

교회 십자가를 전혀 볼 수 없었다는 것은 비참한 일이었다.

우리나라 수도 서울에서 지하철을 타고 밤에 나가면

십자가 불빛이 셀 수 없을 만큼 많은 것과 비교가 된다.

어지간한 촌동네를 가더라도 두서너개의 십자가를 볼 수 있다.

우리는 축복 받은 민족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일본인들은 천국 지옥은 사후 세계이다보니

눈앞에 보이는 것부터 즐기는 것이 아닐까요.

 

실은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이 더 중요하며

하나님의 영원한 세계를 바라보는 것이 더 중요한 것인데...

어찌할꼬!!

 

제일교회 이우길 집사 씀